집필일
1995.03.08.
출처
경상일보
분류
건축문화유산

울산지역에 현존하는 옛 기와집은 모두해서 10호가 채 되지 않는다. 이처럼 역사 자원이 빈약한 우리 시에 석천리 古家같이 완비된 한옥이 남아있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넓은 분지 한 복판에 자리잡은 뛰어난 안목도 대단하거니와, 솟을대문채부터 사당채까지 모두 9채의 건물들로 구성되어서 상류주택의 품격을 지키고 있는 격식도 우수하다.
이씨 고가는 멀리 보이는 안산에 전체적인 축을 맞추어 배치되었다. 대문채 – 사랑채 – 안채의 각각 중심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도 앞의 안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망을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이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이와 같은 자연과의 관계성이다. 기능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현대 주택과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벌판 한 복판에 집을 세웠기 때문에 뒤가 불안하다. 그래서 높은 괴목들을 뒷 담장에 심어 인공적인 산을 만든 셈이다. 뒤에는 산, 앞에는 내가 있어 자연적으로 아늑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평화와 여유가 집 전체에 흐를 수 있었던 이유도 자연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이용에 있다.
건물 세부를 다듬었던 목수들의 기술이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안동이나 경주와 같이 권문세가들은 전국적으로 솜씨 좋은 목수들을 풍부한 재력과 권력으로 불러와 매우 정교한 맞춤의 집을 지었지만, 나머지 지방의 상류층들은 그 일대에서 목수를 구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은 정교하게 다듬은 세부에 있지 않다. 약간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들이 모여서 이루어 내는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성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성취이다. 이씨 고가에는 그러한 전체성이 있다. 건물 자체를 보지 말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이루어지는, 또는 건물과 담장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간을 보아야 한다.
이씨 고가는 울산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매우 소중한 유산이다. “문화도시 울산”이라는 표어는 말로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없어진 기념물들을 복원한다고 막대한 예산을 쓰거나, 새로이 무슨 상징물들을 만든다고 없는 솜씨를 짜아내는 일들에 앞서서 그나마 남아있는 유산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도록 수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문화도시 울산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 평범한 상식을 울산의 지식인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