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3.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2000년 건축계의 최대 관심사는 건축사 제도의 국제 인증문제와 이에 따른 건축교육의 전면적 개편이다. 작년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한 이들 문제는 결코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국제건축가연맹 (UIA)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국내 건축계에 자격 인증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었고, 조금이라도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국내 건축계의 앞날을 걱정했더라면 자체적인 대비책을 마련하고 국제적 협상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할 3단체의 대비는 이러한 여망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사안의 중대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대비책 마련에 시간을 맞추지 못했으며, 능동적인 협상을 벌이지 못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소재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해서 각 단체는 단체대로, 문제의 당사자인 대학은 대학대로 개별적인 이해득실 계산과 부분적인 대책 마련으로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작년 이후 3단체의 움직임을 볼 때, 신뢰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모든 건축인이 머리를 맞대고 온갖 지혜를 짜내어도 해결될까 말까하는 엄청난 문제 앞에서 단체 이기주의와 소아적 이해 계산에만 분주하다. 이 땅의 수많은 건축인들과 학생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따라야하는가?
급기야 몇 명의 소장층 교수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건축교육의 미래 (도서출판 발언)>이라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필자도 이들의 순수한 애정과 헌신에 감동하여 작업에 동참하였는데, 1년여의 과정 내내 공식 단체에서 해야할 의무를 힘없는 개인들이 대신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현실을 개탄하곤 했다. 뒤늦게 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3단체가 협동으로 <건축사 자격제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수행하여 그 대강이 몇차례의 공청회에서 마련되고 있다. 이제 건축사 자격제도, 교육제도, 그리고 인증제도에 대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마련된 시안들에 따르면, 미국내 기구들인 NCARB나 NAAB 기준의 한국어 번역판일 정도로 미국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을 최소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미국식 건축교육과 자격 제도는 건축주 요구의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전문적 서비스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년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여 결과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된 것이 미국의 경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 전개과정과 보유 자원이 다른 한국에도 적용될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별 천민자본을 조정하고 감독할 수 있는 공공적 비판의식 교육이 더욱 절실하며, 전문기술자보다는 사회적 책무를 가진 지식인의 역할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건축가 교육을 지향하는 모든 대학의 교과과정이 획일화되고 교과목 이름까지 같아질 우려도 있다. 제도란 최소의 기준만 마련되면 된다. 그 최소선을 초과하는 내용은 해당 대학의 자율에 맞겨야 다양한 견해와 실험정신을 가진 건축가들을 배출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훌륭한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교육의 주체인 교수와 학생들의 자질과 성취도가 최종적인 결과물이 될 것이다. 해방 후 왜곡된 교육제도 속에서도 우수한 건축가들이 성장했으며, 이만한 환경이라도 마련했으니 제도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소박한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교육무용론과 연결될 뿐, 사회적 주장은 될 수 없다.
이번에 7회째를 맞은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심사과정을 지켜보면서 우울한 연민을 지울수가 없다. 많은 건축 공모전에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천명 넘는 대규모 학생들이 응모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던, 파행된 교육 제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열망과 노력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부족한 학교교육의 폐해가 짙게 깔려있다. 아직도 건축을 건물만들기가 전부라고 여겨서 주어진 땅과 환경에 대한 접근이 극히 미약하다. 또는 학교 교육을 무시하고 선후배 간에 이어지는 비정규적 지식에 근거한 설익은 모방과 시도들이 일부를 이룬다. 물론 기성 건축가를 능가하는 빛나는 작품들도 적지 않게 있어서 미래를 밝혀주고는 있지만, 학교 교육이 더욱 충실하다면 한단계 높은 차원의 노력들이 보람을 거둘 것이 확실하다.
해방 50년만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제도 개혁이다. 한번 정착되면 바꾸기 어려운 것이 제도이고, 더구나 국제적 약속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기는 불가능하다. 비록 외압에 의해 시급하게 이루어지는 개혁이라고는 하지만, 건축계의 지각변동에 해당하는 거대한 변화다. 건축교육계는 의욕에 찬 교수들과 열망에 가득한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 부디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