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건축은 이번 호로 통권 121호, 창간 10주년을 맞는다. 새로운 건축문화 육성의 고귀한 뜻을 펼치기 위해 부산의 건축 지식계가 총의를 모아 어렵게 어렵게 창간하여 오늘까지 오면서 이상건축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초기 기반을 닦았던 부산에서 본사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도약을 추진중이기도 하다. 하나의 전문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편집진들이 참여하였고, 건축계 뿐 아니라 인문사회계의 유명 필진들이 원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적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초창기부터 지속해 온 이상건축의 성격이었다. 건축계의 정론지임을 표방하며, 상업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 보다는 건축이론을 중심으로 비평적인 시각을 제시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 건축계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유행적 세련성이나 기술적 성장이 아니라, 독창적이고도 보편적인 건축이론의 정립이라고 판단해 왔기 때문이다.
건설업의 비중이 국민 총생산의 23%에 달하는 이상 현상을 30여년 간 유지하기 위해 정말 엄청나게 많은 건축물이 이 땅을 뒤덮어왔다. 그러나 그 거대한 물량을 설계하면서도 체계화된 건축 이론 하나 제시하지 못하면서 한국건축은 여전히 세계건축의 변방에 머무르고 있다. 열심히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다보면 질적인 혁신이 있으리라는 이른바 양질변환(良質變換)의 명제는 기술주의적, 물량주의적 허구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 거대한 물량에 중독되어 정신은 마비되고 경제적 쾌락만을 추구하여 상업주의적 건축만이 성공을 거두는 악순환를 확대하고 있다. 알맹이 없는 고만고만한 건축,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의존한 겉보기 화려함의 건축들만이 시장에 횡횡할 뿐, 건축의 독창성이나 개성은 물론이고 대사회적 설득력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건축 이론의 존재가 더욱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이런 상황에서 이론지의 성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이론지의 지면을 빛내 줄 이론가들이 부족하다. 한국대학의 철학과에는 철학자는 없고 철학 소개자만 있다는 비판과도 마찬가지로, 국내 이론가 또는 비평가들은 자신의 시각과 비평을 제시하기 보다 해외 이론가들의 사고와 시각을 자신의 무기와 같이 사용해왔다. 이러한 학문과 이론의 대외종속화 현상은 비단 건축 이론계에만 한정된 일은 아니라, 우리 사회 인문학계 전반에 걸친 심각한 위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문학계는 최소한 위기의식을 가지고는 있고, 철저한 자신반성과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위기는 아니다. 반면 건축계는 오히려 “이론이 밥 먹여 주는가”라는 반지성적이고 회의론적인 풍토가 더욱 만연하고 있다. 새로운 이론가, 비평가들은 가뭄에 콩나듯하고, 대학원 연구자들도 이론분야를 기피하여 앞으로도 인력 양성 가능성은 희박하다. 심지어 90년대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극소수의 비평자들도 이제는 지치고 고갈되었는지 섬뜩한 글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상건축 자신의 문제도 없지 않다. 인력이 없으면 키워야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러려면 수지타산을 넘어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이슈를 개발하고 논의 활동을 기획하며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고 기회를 주어야한다. 그만한 노력을 해왔는가 스스로 물어보면 떳떳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이미 이름이 난 극소수의 필진들에게만 매달려온 감이 없지 않고, 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집중시킴으로써 그들의 재능과 자원을 고갈시킨 책임마저 느껴진다. 최소한의 경제적 물질적 보장도 없고, 새로운 참신한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문제는 건축계 전반에 만연되어가는 극심한 물량주의와 상업주의다. 적어도 90년대의 젊은 건축인들은 자신 스스로 지식인이요, 사회개혁가로서 일말의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의 인문학적 중요성이 논의되었고, 공학과 기술적 한계를 넘어선 사회활동도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설계란 인문적 정신 활동의 결과였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의 극심한 물량 감소기를 겪으면서 건축계는 경제적 생존을 지상목표로 삼게되었고, 여타의 정신적 활동은 철없는 자들의 탁상공론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이론지를 표방하는 이상건축 역시, 판매가 원활치 않아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론의 부재는 새로운 건축의 등장을 무산시키고, 진부한 건축들은 건축시장을 축소시킨다. 축소된 건축 시장 속에서는 또 다시 생존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이론의 활동을 사장시키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한국건축의 변방성은 기술의 부족이나 재원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낙후된 건축적 질은 정신의 부재, 이론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시장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이론의 회복과 이론적 건축의 일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상건축이 끝까지 본연의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할 소명이 여기에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한 잡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건축계의 운명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