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학파의 태두, 晦齋 李彦迪
경주는 단지 천년 전 사라진 왕국의 수도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인 慶尙道의 이름이 慶州와 尙州에서 따왔듯이, 경주는 신라시대 이후에도 중요한 지방의 중심도시로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安東지방과 더불어 嶺南學派의 본거지로서 수많은 유학자, 정치가들을 배출한 명문 고장이었다.
조선시대 최대 학파인 영남학파의 태두로 꼽는 이가 바로 晦齋 李彦迪(1491-1553)이다. 그는 인근에 있는 江東面 良洞마을 출신으로, 吏曹 禮曹 刑曹의 3判書(내무, 외무, 법무장관)와 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고, 副首相까지 지낸 대정치가이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李迪이었으나 당시 국왕의 명으로 ‘彦’자를 첨가하여 이름을 바꿀 정도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충신이기도 했다. 양동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양반촌으로서 지금도 100여호의 전통적인 살림집들이 보존되어 있고, 특히 이 마을 이씨 종가인 無忝堂과 香壇은 李彦迪이 직접 설계한 작품으로도 커다란 가치가 있다.
양동마을이 李彦迪의 本家라면, 옥산서원이 위치한 慶北 慶州市 安康邑 玉山里 일대 紫溪계곡은 李彦迪이 그의 小室과 함께 생활했던 隱居地이다. 승승장구 벼슬길에 올랐던 李彦迪은 40세 때,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본의아니게 7년 동안 낙향생활을 하게된다. 그에게는 두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本妻가 있는 양동마을을 외면하고 둘째 부인의 연고지인 옥산골에서 獨樂堂이라는 집을 짓고 오랜 은거생활을 즐기게 된다. 獨樂堂은 옥산서원의 북쪽 500m 정도 떨어진 절경의 계곡가에 자리잡고 있다. 獨樂堂은 李彦迪 자신이 설계하고 거주하던 곳으로, 바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한 자연의 경관이 펼쳐지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 집이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닫혀있지만, 자연에 대해 열려있는 은거지로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 그의 건축가적 자질에 대해 경탄하게 된다.
7년간의 은거 뒤에 정계에 복귀한 그의 인생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벼슬은 비록 고위직에 올랐지만, 그는 소위 정계의 실세가 아니었을 뿐 더러, 당시 실세였던 임금의 외척들에게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던 끝에 57세 때 한반도 북쪽 벽지인 강계로 귀양을 가서 7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유배지에서 운명할 때까지 곁에서 수발한 아들은 嫡子가 아닌 庶子인 李全仁이었고, 부친의 학문적 정통을 이어받은 이도 그였다. 이전인은 獨樂堂의 후계자가 되어 부친의 학맥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1574년 드디어 李彦迪의 기념서원인 옥산서원을 건립하게 된다. 옥산서원이 李彦迪의 고향에 세워지지 않고, 서자들의 세거지인 옥산리에 세워지게 된 내력이다.
재구성한 자연의 핵심, 서원과 獨樂堂
李彦迪은 매우 적극적이며 현실참여적인 지식인이었다. 청년기에 니힐리스트인 曺漢補와 ‘太極無極論辯’을 벌이면서 현실도피적 재야 지식인들을 준엄하게 비판하여 “東方道學의 정통을 세운 수호자”로 부각되었고, 오랜 관직 생활에서도 직언과 비판을 멈추지 않은 강직한 정치인이었다. 장년기에 맞은 타의적 은거생활 역시 현실도피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은둔생활에 적합한 장소를 선택했고, 주변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獨樂堂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계곡은 모두 李彦迪이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그 이전의 산은 그냥 산이었으나, 李彦迪의 은거와 함께 자연은 비로소 의미와 질서를 갖기 시작했다. 獨樂堂은 긴 계곡의 중간지점 평지에 위치했다. 따라서 특별한 主山이나 案山이 없는 지형이다. 그러나 그는 북쪽 봉우리를 道德山이라하여 主山으로, 남쪽 멀리 봉우리를 舞鶴山이라하여 案山으로 삼았다. 동쪽과 서쪽 봉우리는 각각 華蓋山과 紫玉山이라 이름 붙였다. 이 절묘한 산이름들은 性理學적 세계를 넘어선 불교적 혹은 도가적 명칭들이다. 원리주의적 性理學자였던 李彦迪은 인근 定慧寺의 주지스님과 밀접하게 교우하면서 불교적 세계관에 입문했고, 주변 자연을 逍遙하면서 道家的 세계관에 눈을 떳다. 그만큼 은둔생활은 오히려 충전의 기회였고 발전의 시간이었다.
그는 또한 계곡의 숱한 바위들 가운데 5곳을 골라 이름을 붙였고, 기능을 부여했다. 물고기를 바라보는 觀漁臺, 목욕하고 노래를 부르는 詠歸臺, 갓끈을 풀고 땀을 식히는 濯纓臺, 마음을 평정하는 澄心臺, 그리고 잡념을 씻어버리는 洗心臺. 이제 李彦迪의 눈에는 산은 산이 아니라 道學적 상징들이며, 바위는 은거와 수련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이들을 이른바 四山五臺라 불러 獨樂堂의 확장된 자연 영역으로 삼았다. 四山五臺로 구성된 전체 계곡을 紫溪라 이름짓고, 그 스스로 ‘紫溪翁’이라 자처하기도 했다. 이제 자연은 李彦迪의 ‘獨樂’을 위해 존재하는 드넓은 개인적 정원이 되었다.
그의 후예들이 세운 옥산서원도 李彦迪의 自然觀과 道學觀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서원은 우렁찬 물줄기가 떨어지는 龍湫瀑布가 있는 계곡에 세워졌다. 李彦迪인 이름 붙인 洗心臺의 옆이다. 서원은 지형상 西向으로 배치되었는데, 서쪽 案山이 바로 紫玉山이고, 산 이름을 따 옥산서원이라 명명했다. 獨樂堂과는 또 다른 자연의 중심이 생긴 것이다. 서원 안에는 인공적인 물줄기를 파서 자계의 맑은 물을 끌어들인 후, 明堂水라 이름지었다.
서원에는 여러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그 이름들은 모두 李彦迪의 학문적 내용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정문인 亦樂門은 <論語>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안니한가?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학문을 찾아온 학생들을 반기는 문이다. 휴식처 누각인 無邊樓는 宋代 유학자인 周敦頤(1017-1073)가 “경치에는 끝이 없다(風月無邊)”고 말한 내용에서 따왔다.
李彦迪의 대표적인 저술은 <求仁錄>이며,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공자가 다시 태어나 이 책을 보더라도 배울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회심의 역작이었고, 그만큼 ‘仁’은 그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서원 강당인 구인당은 말할 것도 없이 <구인록>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강당 양 쪽에는 2개의 온돌방이 있는데, 하나는 兩進齋이고 다른 하나는 偕立齋이다. ‘양진’이란 性理學의 중요한 가치인 ‘明’과 ‘誠’을 동시에 갖추어 나간다는 뜻이고, ‘해립’이란 ‘敬義偕立’, 즉,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써 사물을 연구한다는 뜻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東齋와 西齋의 명칭은 敏求齋와 闇修齋다. ‘민구’란 “민첩하게 仁을 구한다”는 뜻이고, ‘암수’란 “조용히 고요하게 스스로 수양한다”는 뜻이다. 모두 朱子의 학문 수양방법이며, 李彦迪의 교육적 신념을 표현한 명칭들이다.
엄격한 규범의 공간
옥산서원은 자계계곡 중에서도 최고의 절경에 위치했다. 높이 4m의 龍湫폭포가 떨어지는 龍沼 위를 외나무 다리를 통해 건너다 보면 귀가 멍할 정도의 물소리에 정신이 맑아진다. 또한 아름드리 참나무 열로 둘러싸인 진입로는 짙고 깊은 길을 만들며 학문적 수양처로 인도한다. 심신을 수련하고 끝 없는 학문의 세계로 몰입하기에는 더없이 아름답고 운치있는 장소다. 그러나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자리잡은 탓일까. 옥산서원 안에서는 바깥의 경승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청각적으로도 단절될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닫혀있다.
서원의 역락문을 들어서는 순간 자연에서 느낀 감동의 여운은 급격히 사라지고, 인위적인 건물들로 완벽하게 둘러싸인 폐쇄적 공간으로 전환된다. 내부의 중심장소인 강당 마당에서는 사방을 꽉 둘러싼 건물들 사이의 팽팽함만이 감돌뿐이며, 어느 한 구석 긴장감을 이완시켜 주는 곳이 없다.
강당마당은 강당과 무변루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끼워진 형식으로 구성된 정방형의 공간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모퉁이 부분이 서로 겹쳐져서 마당의 모퉁이는 닫혀져 버렸고, 그 뒤에 있는 다른 공간과도 차단되어 있다. 마당의 모퉁이를 닫기 위해 누각은 7칸, 동서 양재는 5칸으로 길이를 늘렸다.
누각인 무변루의 구성에 주목해보자. 바깥 자연의 경관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누각 벽면을 활짝 열어서 경관적 틀로 활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아름다운 자연은 그림이 되고, 누각은 액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옥산서원의 무변루는 바깥쪽 벽을 모두 막아서 외부 자연으로의 확장을 차단하고 있다. 무변루는 총 7칸이지만, 마당에서는 5칸으로만 인식된다. 가운데 3칸을 대청으로, 양 옆을 방으로 막아 내부적 경관을 차단한다. 다시 방 바깥 쪽으로 작은 루마루를 한칸씩 달아서 외부로 향하게 했다. 양 끝 루마루의 지붕을 가운데 5칸보다 한단 낮게 가적지붕으로 처리하여 이러한 의도를 더욱 명확히 한다.
다시 말해서, 무변루는 가운데 5칸의 몸체에 양끝 한칸씩의 루마루를 부가한 형식이며, 가운데 5칸은 마당 쪽으로 개방한 동시에 외부로는 폐쇄되며, 대신 양끝 루마루를 외부에 개방했다. 한동의 건물에 서로 다른 두 성격의 공간이 결합된 형식이다. 바깥에서는 7칸, 안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한 건물이며, 옥산서원의 폐쇄적인 건축개념을 대표적으로 읽을 수 있는 건물이다.
강당인 구인당 역시 중요한 건물이다.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이란 현판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이고, ‘구인당’ 현판은 石峰 韓號의 글씨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서예가들이 쓴 名筆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추사의 글씨는 가늘고 유장하며, 석봉의 글씨는 두껍고 윤택하다. 가운데 3칸 마루는 벽이 없이 마당에 열려있지만, 양 끝의 방들은 창문도 없이 벽으로 막혀있다. 이러한 구성은 마당 쪽으로 폐쇄된 벽을 세우려는 의도된 결과다. 누각의 구성과도 동일한 개념이며, 결과적으로 마당의 중심적 성격을 매우 강화시켜서, 서원 전체의 구심적이고 내부지향적인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옥산서원의 터는 크게 두 단으로 이루어진다. 아랫단에는 강당영역과 管理舍 영역이 좌우로 놓이고, 윗단에는 祠堂영역이 중심을 이루면서 좌우로 藏經閣과 碑閣을 배열했다. 관리사 뒤의 윗단에는 나중에 신축된 文集版閣이 위치한다. 아랫단이 생활영역이라면, 윗단은 상징과 보물들의 영역이다. 서원의 재산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이 書冊과 板本이며, 이들은 눈에 잘띄어 관리하기에 쉬운 곳에 배치한다. 사당 북쪽의 비각은 李彦迪의 神道碑를 위한 곳으로 절묘한 담장의 처리로 인해 독립적인 영역 속에 놓여졌다. 남쪽의 장경각 역시 양쪽 담으로 분리된 경사지에 놓여져 매우 중요한 건물임을 암시한다.
남쪽에 부가된 관리사 부분은 여타 서원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대규모다. 이 부분이 언제 조성됐는지 기록은 명확치 않다. 단지 1816년 창고의 수리기록이 있어서 18세기에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사 부분은 모두 4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각 건물의 명칭도 명확치 않다. 서원 건물의 수리기록을 종합해 보면, 가장 남쪽의 5칸 창고는 <大庫>, 마당 가운데 3칸의 조리용 건물은 <庖舍>, ㄴ자형의 긴 건물은 <庫廳>, 그리고 동쪽의 당당한 3칸 건물은 <書院廳>으로 추정된다. 大庫는 명칭 그대로 큰 창고이며 판벽으로 이루어졌다. 옥산서원의 재산 규모를 가름케하는 건물이다. 庖舍는 벽체를 반쯤 막은 개방형 건물로 서원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대형 부엌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庫廳은 서원의 관리인과 노비들이 기거하면서 잡동사니를 보관하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書院廳은 건물의 격식이나 당당한 형태로 보아 서원의 有司(總務)가 사무실과 접대실의 용도로 사용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특히 주목할 것은 관리사 마당 가운데 놓여진 庖舍다. 반쯤 개방된 벽체를 가진 이 건물은 서원의 큰 행사 때에 음식마련과 야외 식당으로 쓰이던 곳이다. 그러나 중요한 위치와는 상반되게 쓰여진 부재들은 원초적이다. 기능적인 편리함 외에도 굳이 이곳에 庖舍를 둔 이유를 더 찾을 수 있다. 庖舍가 없었다면 장방형의 넓은 마당이었을 터인데, 庖舍를 배치함으로써 마당은 정방형으로 바뀌고 서원청의 전속마당이 된다. 그러면서 庖舍 뒤쪽의 노비들 숙소를 가려버리는 이중적 효과를 거둔다.
옥산서원은 아름다운 경치와 우수한 건축공간 뿐 아니라, 귀중한 문헌자료들을 보관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보존된 중요한 서책들은 <三國史記> 완본 9책 (보물525호), <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524호), <海東名蹟> (보물526호) 등이다. 1970년대에 <淸芬閣>이라는 창고를 지어 이들 보물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 흉물스러운 시멘트 건물은 옥산서원의 ‘玉의 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