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1.02.21.
출처
연대건축
분류
건축론

40년은 평가의 시작 시점
우리 사회는 특정대학 동문들의 활동양식이나 가치관 등을 몇 단어의 문장으로 규정짓는 것에 익숙해 있다. 특히 한국 사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는 연세대 출신들에게는 도시적이고 핸섬하다는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연고전 중계로 대표되는, 저널리즘에 의해 고착된 이미지일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 편견은 한 나라의 국민성을 운운하는 대목에서 극에 달한다. 예컨대 일본인과 독일인은 근면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킨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확률적으로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단체로 해외관광을 나온 두 나라 국민들의 방종을 설명할 수는 없는 말이다. 이른바 국민성이란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시절부터 사회적 통제와 훈련에 의해 조성된 전통에 불과하다. 설혹 집단적 특징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집단을 이루는 개인적 성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유순하고 다감한 일본인들이 집단화되어 저지른 광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몇 가지 반증만으로도 한 집단의 집단적 성향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작업이라는 것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가적 차원의 국민성 논의가 그러할 진대, 하물며, 연대 출신 건축가들의 특성을 예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예를 들어, 연대 출신 건축가들이 대부분 포스트 모더니스트로서의 성향을 갖는다고 가정한다면, 후진들도 그 성향을 따를 수 밖에 없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단지 현재 활약하고 있는 동문 건축가들의 통계적 성향에 불과한 것이다. 그나마, 다양한 개성을 생명으로 하는 건축가 집단에 통용되기 어려운 비확률적 통계에 불과하다.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연대 출신 건축가들의 최대 공배수를 추출하고, 그 의미와 한계를 되새겨보는 것 역시, 지나간 짧은 과거에 대한 비확률적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가 교육에 관한 한, 특히 졸업생들의 사회적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예상외로 긴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한 건축가가 홀로 설 수 있는 사회적 연령을 35-40세로 본다면, 그의 작업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 완숙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50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대학 입학 후 3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야 그 건축가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대학 단위로 평가범위를 확대한다면, 적어도 10년 정도의 개인적 평가들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그 대학의 성과를 논할 수 있게된다. 어림잡아 계산한다면, 한 학과가 교육을 시작한 이후 4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학과의 교육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연대 건축과 설립 40주년의 의미는 바로 사회적 평가가 시작되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는 시기로서, 한 동문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이 동문 바깥에 있으면서(非同門) 다른 학교 출신 건축가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큰 부담이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한 줄 기록을 남긴다는 영광만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1세대 동문들의 공동미덕
연대 건축과가 설립된 1960년대는 한국 사회의 커다란 전환기였다. 비록 5.16쿠데타로 정치적 정통성이 무너지고, 오랜 기간 군부독재의 혼돈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과 건설을 국가의 목표로 삼았던 경제 부흥기의 시점이기도 했다. 군사정권이 세운 국가 주도형 경제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재벌육성과 대규모 건설업체가 필요했고, 도로와 항만과 교량 등 대규모 국토 변형공사를 담당할 인력 양성이 시급히 요구되는 때였다. 이때부터 줄곧 건설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 자리매김되었고, 총GNP의 23%를 상회하는 건설계의 황금시대를 열어나갔다. 한 나라의 건축문화가 꽃을 피우려면, 훌륭한 교육을 통해 우수한 건축가들과 건설인력을 배출해야하는 동시에, 그들의 이상과 실력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이 존재해야 한다. 비록 정경유착에 의한 독재적 경제정책과, 미국 원조와 출혈 수출에 의한 외화 획득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대형 공공건축들이 건설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여건이 마련된 해방 이후 최초의 시기였다. 연대 건축과는 이 황금시기의 개막과 동시에 설립되었고, 그 졸업생들은 상대적으로 풍족해진 건설계에 배출되어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1960년대는 본격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수용기로 기록된다. 모더니즘 건축은 근대 시민사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모토로 삼았던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산물이었다.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50년대 한국 사회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가 되었으나,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아직 전근대 단계였다. 20세기 초에 형성되어 30년대에 이미 서구사회의 주류 건축사조로 자리잡은 모더니즘 건축은 2차 대전 후 전 세계적 건설 부흥기와 함께 온 지구를 뒤덮는 거대하면서도 유일한 건축양식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후진국의 도시들은 고층건물과 콘크리트 박스형 건물들이 ‘근대화된 도시’의 상징으로 각광을 받아, 대부분의 아시아 도시는 모더니즘의 강력한 세례 아래 개조되어 갔다.
국내 건축계는 1960년대에야 비로소 선진적인 몇 건축가들을 통해 본격적인 모더니즘의실험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걸출하게 활약한 분이 바로 김정수였다. 최초의 커튼월 모습을 도입한 옛 명동성모병원, 뾰족탑 등 전통적 어휘를 거부한 근대교회인 장충동교회 등 형태와 공법, 재료 등 모더니즘의 문법과 교의를 충실히 실현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특히 국내파 건축가였던 그의 노력과 실험은 자발적이고 자생적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바로 그 김정수가 연대 건축과의 1세대 교수진의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 연대 건축과의 교육 방향이라던가 학풍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건축가로서 모더니즘을 수용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당연히 후진들에게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교육했다. 연대 건축인들이 가지고 있는 학풍은 어느 정도 김정수 교수의 영향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기적으로나 교육방향으로나 연대 건축과의 창설은 그야말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비록 60년대가 경제부흥기의 시작점이라 하더라도 건축적 현실은 아직 냉냉한 때였다. 당시 건축과 졸업생들을 받아줄 수 있는 설계사무소란 기존의 종합건축이나 무애건축, 아니면 막 시작한 공간사나 엄이건축 정도였다. 특히 무애건축은 서울대 출신들로 채워져 타대학 졸업자가 취업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고, 나머지 주요 설계사무소도 수용인원이 많지 않아서, 신생 학교인 연대 졸업생들이 취업하고 수련을 받을 사회적 여건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온갖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유수한 설계사무소에 들어가서 현재까지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는 굳센 이들이 연대의 건축가적 전통을 세우게 된다.
초창기 동문 건축가 가운데 김태웅, 김창일, 우시용, 김태인, 강철구, 이각표, 한영제 등을 꼽을 수 있다. 1세대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의 경력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는데, 우선 처음 실무 수련을 개인 사무소보다는 대형 설계조직 (당시로서는)에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개인 사무소란 기존 대학의 교수들이나 역사가 오래된 대학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신생 대학 졸업자인 1세대 동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란 대형조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도 존재했다.
종합건축(김태웅, 김태인, 강철구), 공간사(우시용), 삼육건축(김창일, 박영호)등 설계회사에서의 시작은 자신들의 설계사무소 운영형태나 작품 성향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한 두 사무소에서 10여년 이상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우시용 같은 이는 첫 직장인 공간사에서 17년간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 비로소 시공건축으로 독립한 예다. 1세대 동문들의 짧은 이력서에서 성실함과 진중함을 그들 세대 공동의 미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수미상관(首尾相關)이라 할까, 대조직에서 첫 출발한 이들은 현재 운영하는 설계사무소도 대형화된 설계조직을 선호하고 있다. 또,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기존 조직을 인수하여 운영하거나, 협동 건축가로서 운영에 참여하는 특징을 보인다. 김태인과 강철구의 동우건축은 대우건설 설계실과 관련을 맺으며 출발하여 성장한 사무소로, 활발한 활동은 물론, 모교와의 지속적 관계 속에서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각표가 대표로 있는 엄이건축은 원래 엄덕문+이희태의 조직이었다. 한 분은 사망하고, 다른 한 분은 자신만의 소규모 아뜰리에로 독립해 나가면서 와해되려는 대조직을 이각표가 인수한 것이다. 김창일은 정림건축과 연계되어 부회장으로 경영을 책임진 적이 있으며, 한영제는 오래 동안 인제건축의 공동대표를 역임하였다. 예외라면, 김태웅은 비교적 일찍 고향인 포항에 개업하여 작품활동은 물론, 지역 문화 발전에 다양한 참여를 하고 있는 독특한 경우다.

2세대 동문 – 분화된 건축가의 길로
1970년대 후반은 건축계의 인적구성에서 큰 변화가 있던 시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존의 설계사무소들은 대형화되거나, 아니면 아예 개인 아뜰리에로 존재하게되는 극단적인 양상이 전개되었고, 건설회사 규모가 급속히 성장하여 대다수 젊은 건축인들을 확보함으로써, 건축계에는 오히려 인력이 부족하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중동붐’이 불면서, 대규모의 중동건설에 참여한 국내 건설회사들은 기술자 뿐 아니라, 현장 설계와 감리를 담당할 수많은 건축가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국내 건축사무소의 유능한 중진인력들이 대거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진출하여, 설계사무소들은 인력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건설회사 보수는 설계사무소의 2배였고, 중동 파견에 자원하면 4배까지 격차가 벌여졌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경제적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젊은이들은 흔치 않았다.
따라서, 설계사무소가 유능한 후속 인력을 확보하고,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사무소 규모를 좀더 대형화하고 조직화하여, 건설회사 설계실과 경쟁하면서 대규모 설계들을 수주하는 방법이 한가지 길이었다. 정림, 원도시, 공간, 동우, 엄이 등 기존 조직들의 대형화는 물론, 조금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서울건축, 창조, 삼우 등 건설회사 설계실이 아예 독립회사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대형사무소는 안정된 고용성과 비교적 높은 보수를 직원들에게 보장할 수 있었다.
반면, 김수근과 김중업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중진 건축가들은 이른바 ‘작가주의’를 고집하면서 소규모 개인 아뜰리에 스타일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게 된다. 서울대 동문들의 목구회, 한양대 출신들의 한길회, 홍익대 출신 건축가들의 금요회 등 기존 주요대학 출신 건축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대조직 합류를 거부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작은 규모의 작품들에 전력을 다하게된다. 이들 사무소에서 박봉에 시달리는 직원들은 건축가로서 소장의 명성과 작품 참여과정에서 배우는 즐거움만이 유일한 존재이유였다.
약관 30대였던 연대 1세대 동문들은 아직 독립할 연배들은 되지 못했다. 단지, 높은 보수를 약속하는 건설회사로 옮기는가, 아니면, 속해있던 대형사무소에서 건축가의 길을 계속 가던가 선택만이 가능했다. 아마도 많은 연대 출신의 잠재적 건축가들이 이 시기에 건설회사로 진로를 선회하여 건축가의 길에서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
20대 졸업생들인 70년대 학번들은 비교적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건설회사냐 사무소냐의 선택을 지나면, 어떤 사무소를 갈 것인가 선택의 고민도 제법 생겨났다. 특히 설계사무소가 건축가 수련의 필수과정임을 알게된 이들은 보수가 얼마냐는 기준보다는, 누구 밑에서 건축가 수련을 받을 것인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또한, 기성 건축가들의 아뜰리에는 물론, 이제 막 시작한 동문 선배들의 사무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전통도 생겨났다.
현재 정림건축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김진구는 첫 직장인 정림에서 성장한 건축가의 경우에 속한다. 나한진은 공간을 거쳐 이공건축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비록 대조직 속에서 성장하고, 그 조직을 이끌고 있지만, 이들의 작품 성향은 작가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개별적이며 개성적이다. 매사건축의 소장인 전재근은 정림과 선진엔지니어링 등, 유수한 대조직을 거쳤음에도 자신의 아뜰리에를 개업하여 독창적인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예조건축 대표인 주영정은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자신의 사무소를 개업하여, 주목할 만한 작업들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는 경우다.
70년대 학번들은 1세대 선배들과는 달리, 조직보다는 자신의 작업과 개성을 더욱 소중한 가치로 삼고 있다고 보인다. 또한 그들의 작품에서도 합리적 성향보다는 자의식이 풍부한 독창적인 해법들을 활발하게 개진하고 있다. 90년대 걸작으로 꼽히는 바른손센터나 홍천휴게소의 공동건축가인 양남철의 역량에서 그 무한한 세대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1세대 건축가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좁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2세대 동문 건축가들은 더욱 다양한 경로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SK건축 소장인 김상경은 미국에서 건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희대 교수로 화려한 국내 생활을 시작했다. 교수 시절 몇 차례 중요한 현상설계에 당선되더니,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가기 위해 아예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안정된 교수직에 연연해 할 때, 반대로 지극히 불안정한 건축가직을 택한 희귀한(?) 경우다. 피아건축 소장인 오경은은 활발한 작품활동은 물론, 본격적인 여성건축가로서 대외활동도 두드러진다. 아직도 여성건축가의 활약이 미약한 한국사회에서 연대 건축과는 오경은에서 시작하여 민선주라는 걸출한 여성건축가들을 배출하는 산실이 되고 있다. 울산대의 성인수 교수와 부경대의 김기환 교수는 설계와 평론,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성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는 교수 건축가이다. 70년대 학번들은 설계와 이론 사이의 공존적 보완관계에 눈을 떠, 이론적 설계 또는 건축적 이론 탐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필훈은 태두건축의 건축가인 동시에, 아마도 연대가 배출한 최초의 건축비평가로 기록될 것이다. 원도시 건축에서 충실한 수련기를 겪고, 오하이오 주립대 유학에서 이론적 토대를 닦은 후, 이론적 건축가로서, 실무 비평가로서 독자적인 입지를 쌓고 있다.

건축계의 중심이 될 386세대
이른바 연대의 386세대 (1960년대 출생으로 80년대 대학을 다닌 3-40대) 건축가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평가받기에는 사회적 연령이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세대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는 한국 건축계 최대의 견인력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 된다. 외람된 말이지만, 연대 건축과가 설립되고 그간 쏟아온 교육적 정열과 사회적 활동은 아마도 이들 세대 건축가들에서 또 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을까?
새로운 건축세대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수준높고 풍부한 국제경험 속에서 성장한 이들이다. 이들의 동년배들은 앞서 언급한 2세대 동문들이라 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의 외국 유학 때문에 4-5년 정도 사회적 연령차이를 보인다. 영국 AA스쿨 최초의 한국인 정규졸업자이며 수많은 국제경기 수상경력을 가진 김종규가 이들 세대의 건축적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설계조직 M.A.R.U.를 이끌면서 동시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로서 교수건축가의 길을 가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한 최문규와 민선주(재학중에 유학갔으니 명예동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사무소를 기반으로 여러 현상설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상당 수의 건축적 펜들을 확보하고 있는 스타들이기도 하다. 또한 M.A.R.U.의 공동대표인 정일교는 자신의 주택<박스 하우스>를 소재로 단행본까지 출간하면서 많은 건축상들을 수상하고 있다.
보다 젊은 세대 가운데, 건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은 김광수, 김성식, 조민석, 신춘규, 한형우 등이다. 30대 초-중반인 이들에게 이상할 정도로 주류 건축계가 그들의 성장과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김광수는 이미 작은, 그러나 대단히 창조적인 몇 개의 작업으로 건축계에 화려하게 등단했다. 렘 쿨하스의 OMA 출신으로 현재 뉴욕에서 사무소를 열고 있는 조민석은 2000년도 미국 건축가협회가 선발한 주목할 신인 10인 가운데 뽑힐 정도로 국제적 활약을 보이고 있다. 신춘규는 피터 아이젠만 사무실 출신으로 국내에서 활약이 기대되고, 이외에도 많은 30대 예비건축가들이 미국과 유럽 각지의 학교나 유수한 설계사무소에서 성장하고, 국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상당한 성과를 통해 검증을 받기도 했으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 세대에 와서 연대 출신 건축가들이 확고한 건축계의 주류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신생학교 출신으로서 어려움을 겪었던 선배들의 여건과는 달리, 오히려 국제적 경험에서 선두에 섬으로써, 국내 건축계에 많은 기여를 하고 타 학교 출신들과 어울리고 있는 세대가 되었다. 건축학회 등 기존 단체는 물론, 서울건축학교 등 여러 공간에서 주요 멤버로서 사회적 활동도 활발하고, 건축계 내부의 여러 움직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저널이나 강연 등으로 이미 유명해진 이들의 건축관을 추종하는 젊은 펜들도 생겨날 정도이다. 1-2세대 선배들이 어렵게 건축계에서 시작한 자수성가형 건축가들이었다면, 이들 세대는 주류-비주류의 소외구조가 제거된 속에서 시작부터 축복을 경험하고 있는 행복한(?) 세대들이다.
1990년대 이후, 연대 건축과 재학생들이나 대학원생들은 여러 공모전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왔다. 그들은 귀국한지 얼마 안된 젊은 선배들의 공식적, 개인적 지도를 통해 새로운 세계을 접할 수 있었고, 연대 특유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학풍과 합쳐져 건축의 정보화나 세계화 경향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체득하게 된다. 당연한 결과로 해외유학에 대해 가장 뜨거운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도 청운의 뜻을 품고 해외 명문대학이나 유명 사무소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연대 건축인들의 이 뜨거운 열망은 계속될 것이고, 그들의 활약에 힘입어 연대 건축가들은 이 나라 건축계의 중추적 존재로 부각될 것이다. 이 예상은 단지 축사가 아니라, 적어도 386세대 이후 건축가들 분포를 통계적으로 살펴볼 때, 신뢰할 수 있는 예측이다.

합리성과 진취성, 그 학풍들
이 글은 주로 연대 출신 건축가들의 성장 경로와 집단적 성향을 살펴보는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건축가의 진정한 평가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건축적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수십명의 연대 건축가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업적들과 작품들을 평가할 위치도 아니고, 능력도 없다. 한가지 언급할 수 있다면, 건축 작품은 건축가의 성장경로나 성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1세대 건축가들이 주로 대형 조직에서 성장하여, 그들 스스로 대 조직형 사무소를 운영하는 경영자적 건축가들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작품은 일정 규모 이상의 관공서나 오피스 등 상업건물이기 마련이다. 또한 작품을 다루어나가는 과정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경제적일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전위적 실험은 기대하기 어렵고, 여러 직원들과 협력자들의 협동이 우선하기 때문에 소장 개인의 개성이 반영되기도 어렵다. 튼튼하고 기능적이며 세련된 건물 -우수한 건축들은 가능하지만, 문제작이 나오기는 힘들다. 이 현상은 소장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조직 설계사무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결과이다. 연대생이 가지는 사회적 이미지- 도시적이며 세련되고 합리적인-들에 걸맞게, 연대 건축가들의 가장 큰 장점은 건축적 합리성이나 형태적 세련성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비록,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대조직 사무소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1-2세대의 여러 건축가들이 조직 사무소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작가주의적 작품보다는 합리적 작품들을 더 선호하는 것도 연대의 학풍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보인다.
또 다른 연대의 이미지는 자유롭고 진취적이라는 인식이다. 진취성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시하며, 자유주의는 규범보다 개성을 우선적 가치로 삼는다. 2세대 건축가 중 일부는 이미 포스트 모던건축이나 디컨스트럭션을 자신의 중요한 건축적 포지션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세대의 건축가들은 한국 건축계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건축적 관습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독자성이 가미된 다양한 건축을 실험하고 있다. 해외 유학도 학위보다는 실질적인 경험을 쌓는데 활용하고 있고, 실무경험을 대조직보다는 실험적인 개인사무소에서 쌓기를 원한다. 타대학 출신들이 SOM에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을 때, 연대 유학생들은 피터 아이젠만이나 렘 쿨하스의 건축을 접하기를 갈망했다. 연대 건축가의 새로운 세대가 21세기 초반 우리 건축계의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예측은 바로 이러한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가능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대의 사회적 이미지가 그대로 건축화된다면 적지 않은 약점들도 노출될 것이다. 세련성은 가벼움으로 직결될 수 있으며, 합리성은 리더쉽 부족으로, 합리주의적 건축은 고만고만하게 무난한 건축의 양산으로, 진취적 경향은 유행을 좇고 경박한 유명세에 취하고 마는 일시적 허탈로, 자유주의적 성향은 건축계와는 절연된 개인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모든 사회적 이미지가 응축되어 집단적으로 작동한다면, 배타적 선민의식으로 포장되어 동문의 단결과 세력 규합에 몰두하는 파행적 동문주의로 변화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위험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동문계나 건축계와 거리를 두고 있는 개인주의적 행동양식을 염려할 때라는 지적이 적절하겠다.
연대 건축과는 학과 설립 40년 동안 이루었던 것 보다 앞으로 더 많은 성과와 업적을 쌓을 것이다. 지금까지 배출된 건축가들의 활약도 그러했지만, 현재 잠재되어 있는 건축적 에너지가 몇 배 더 위력적으로 펼쳐질 것을 믿고 있다. 단지 앞으로 약속된 영광된 미래를 연세대라는 한 대학을 위한 개별적 시간이 아니라, 우리 건축계를 이끌어가는 주축으로서 소명감과 연대의식 속에서 전체적인 공동의 영광으로 승화시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