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7.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분단 55년만에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는 감동의 장면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 경향 각지 대학의 건축과들은 대대적인 환경미화 작업에 열중이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교협)에서 주관하는 1999년도 대학 평가가 공교롭게도 건축분야였고, 바로 그 실사가 각 대학별로 시행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도 평가가 왜 새 천년의 6월에 실시되는지 의문이지만, 평가 준비 때문에 시달린 교수들의 불평이 아니라도 이번 평가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평가 시기가 하필 이때인가? 작년부터 건축계는 국제 인증을 둘러싼 학제개편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최근에 건축사 자격을 비롯한 교육 인증까지 일관된 시안이 발표되었고, 대부분의 대학들은 2002 학년도부터 건축(설계)와 건축공학 교육을 분리하여 실시할 준비들을 갖추고 있다. 건축계는 이제야 비로소 해방 55년 동안 왜곡되어 왔던 교육적 질곡을 극복할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 대학 평가는 미래의 계획과는 무관한 과거 5년간의 업적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내년 혹은 후년부터 시급히 시행해야할 과제들은 미뤄 놓은 채, 올 상반기 6개월간을 오로지 평가준비로 허송해 버렸다. 이처럼 소모적인 평가를 수용하여 교수들의 연구시간을 온갖 서류 정리와 보고서 작성에 허비하게한 책임은 누가질 것인가?
둘째, 평가 수행과정에서 드러난 상식 밖의 불공정 행위다. 대교협에서는 정해진 평가기준없이 대학들의 자체 평가보고서를 접수한 후, 보고서 내용들을 정리하여 평가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따라서 전국 대학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그 와중에 전국 8개 대학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따로 평가 기준을 정해 일방적으로 각 대학에 통고했다. 그것도 본격적인 평가가 시작되기 1주일 전 급박한 시점이었다. 이미 보고서를 제출한 각 대학들은 몹시 당황했고, 설정된 기준에 맞추어 보고서를 재작성하느라 밤을 새는 등 큰 혼란을 야기했다. 더 큰 문제는 기준 설정에 참여한 8개 대학은 이미 내부 정보를 입수하여 앞으로 정해질 기준에 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기준 설정 논의 과정에서 내부 정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다른 대학들은 어떤 사전 정보에 접할 수 없는 불공정성을 노출시켰다. 출제될 문제를 미리 알고 대비한 대학과, 그렇지 못한 대학의 준비 상황은 말할 나위없이 현격한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 우여곡절 끝에 설정된 평가기준의 문제점이다. 평가란 어쩔 수 없이 정량적인 기준을 포함할 수밖에 없겠지만, 물량 위주의 평가기준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전임 교수수는 10명 이상, 5개 전공 이상을 만점으로 하고 있다. 교수수는 학생 비율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이번의 경우, 학과의 크기나 학생수와 관계없이 무조건 전임교수만 많으면 유리하도록 되어있다. 또, 전임 교수들이 5개 이상의 전공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건축(공)학과가 설계부터 시공 도시까지 백화점식 교육을 해야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화 전공화를 지향하는 건축교육 구조조정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시대 역행적 기준이다.
교수 연구실적에 학생공모전 지도여부를 포함시키는 것도 문제다. 학생공모전이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자발적인 과외활동이며, 지나친 공모전 응모로 인해 정상적인 설계교육이 피해를 본다는 항의도 많다. 공교육을 포기하고 사교육에 치중하라고 권고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양보다 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해야할 건축교육 개혁의 방향에 반대되는 기준이다. 기준 설정에 참여한 대학은 수도권 사립대학 5 대학, 지방 사립대학 2, 그리고 국립대학 1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들 8개 대학에 유리하도록 임의로 평가기준을 설정한 것이라면, 교육적 윤리적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소모적이고 형식적인 대학평가 결과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전국 대학의 실정이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 혹은 재단의 압력 때문에, 혹은 홍보 효과 때문에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번 평가 결과를 무의미하다고 여기면서도 한점이라도 더 얻으려 무리한 준비에 여념이 없는 과정을 보면서, 과연 앞으로 전개될 건축교육 개혁이 제대로 정착될 것인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 호의 특집으로 건축사 자격제도와 교육 인증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필자들이 제도보다는 내용을, 형식과 물량보다는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핵심적인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대학 평가과정에 나타난 허구성과 갈등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재현될 소지가 있다. 인증을 행하고 기준을 작성하는 측에서 자신이 속한 기관이나 집단의 소아적 이익에 집착하여 건축판 게리멘더링을 행하고, 사전 정보를 편파적으로 빼돌리고, 제도적 업적 건수에 연연해하는 한,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교육과 건축계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다행히도 건축사협회와 건축가협회, 두 단체가 손잡고 건축연합회를 결성하여 창구를 단일화하고 객관적 제도 마련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모처럼의 대국적인 결단에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난관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