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3.06.01.
출처
건축가
분류
건축문화유산

문화재란 무엇인가? 문화의 유산이며 유물이다. 건축 행위의 문화적 차원을 인정한다면 모든 건축물은 넓은 의미의 문화재이다. 문화재 라는 규정은 곧 보존 이라는 적극적 보호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건축 문화재는 공예품이나 미술품과 같이 박물관적 보존은 적합치 않다. 순수 미술품은 애초부터 감상을 목적으로 창작되지만 건축물은 사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건축은 토지에 뿌리 내리고 있어서 세워진 장소를 떠나 보존된다면 건축적 가치의 절반 이상이 훼손된다는 점이다. 예컨데 전국의 살림집을 한 장소에 모아둔 민속촌이나, 기능이 없어지고 장소가 바뀌어 버린 서울의 벨기에 영사관 같은 류들은 건축적 의미의 보존이 아니다. 최상의 보존은 바로 그 장소에서 실제적인 기능을 가질 때, 즉 건축적 생명력을 유지할 때이다. 고답적으로 말하면 설계 당시의 의도대로 사용되며 주변 환경을 유지하고 있을 때가 최상의 보존이다. 이러한 점에서 통상적인 건축 문화재 들-조선시대 이전의 왕궁이나 서원들, 대다수의 상류 주택들은 역사적 유물일 뿐 건축적 생명력을 잃고 있고, 따라서 온전한 보존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중세 유럽의 도시나 종교건축들이 최상의 보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미 도시적 환경은 파괴되어 버렸고, 건축 자체의 기능도 소멸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차선의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과거의 문화재는 우연이든 선택이든 간에 역사적 여과과정을 통해 살아 남은 것들이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든지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소중하며 보존해야 할 것이다.
문화재란 어휘에는 어쩐지 골동품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건축을 문화재로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 건축의 임무는 문화재를 보존해야 하는 데 있지 않고, 문화재를 만들어 가야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건축은 기능적 미학적 경제적 개성적 차원을 넘어서 역사적 생명력을 얻기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 어쩌면 그러한 건축 만이 보존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우리 시대의 명작들이 사라져 버렸고 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이 마당에 원론적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보존의 기준을 논해야 하고 보존의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2.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 :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가치

박물관학에서 말하는 보존해야 할 건축 문화재란
1)역사 예술 과학기술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
2)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련된 기념적 건축물
3)역사상 시대를 대표할 건축물
을 지칭한다. 즉 역사적 가치, 기념적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수한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판정되는 건축물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현대건축에도 부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2)와 같은 부류는 건축이라기 보다는 기념물에 가깝다.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의사의 생가는 건축적으로 또는 건축사적으로 별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위대한 독립열사의 기념관으로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결국 건축적 의미에서 보존해야 할 것은 두 부류로 귀착된다. 건축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건축적 성취도가 뛰어난 명작. 건축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많은 부분 뛰어난 성취도를 가진 건축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가지의 기준이 항상 일치하거나 등가인 것은 아니다. 이미 헐려진 옛 화신백화점은 최초의 근대적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의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건축적 성취도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옛 조선총독부 역시 건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식민지 건축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료로서, 또 양식건축의 희귀성 때문에 보존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측면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이란 대부분 당대의 건축적 성취도가 뛰어난 것을 의미한다. 건물을 왜 보존하려고 하는가. 한 문명권의 문화적 축적을 위해서이며, 구체적으로는 교육을 위해서이다. 문화의 축적과 발전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제도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 교육은 물론 당대 혹은 후세 건축가들의 참고자료로서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단지 역사적 가치가 우선되는 건축에 일반 건축가들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예컨데 부산 구덕운동장은 최초로 쉘구조를 시도했다는 역사적 가치를 갖지만, 건축가들의 레퍼런스가 되기에는 여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건축기술사의 측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구조물이 된다. 최초로 커튼월을 시도한 명동의 옛 성모병원, 돔구조의 장충체육관 등 역시 그러한다.
어떠한 건물이 역사적 가치를 갖는가의 기준은 건축과 역사를 보는 시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서 객관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따라서 보존의 기준은 주도적인 역사관이 어떤 방향이냐에 달려있다. 여기에는 미학적 판단보다는 한국 현대건축사의 정립을 위한 학문적 판단이 기준이 될 것이다. 필자는 한국이 현대건축사를 세계 건축이 겪어왔던 모더니즘의 출현과 전개과정이라는 보편적 시각에서 보려한다. 따라서 보존이 기준도 필자 개인의 사관에 의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1) 개항기와 일제기의 양식건축들이 우리 현대건축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하지만 근대 이전 서구의 건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교과서적 자료이다. 이들의 보존 여부에 심각한 논의는 필요치 않다. 이 땅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박물관적 보존의 대상으로 충분한 가ㅈ치가 있다. 이미 문화재로 지정되어 십여개소가 보존되고 있지만 아직도 철저한 조사와 보존 대상을 선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2) 일제기에 건립된 식민지용 건축들은 민족 주체성의 이유 때문에 보존의 대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건축역사를 수탈과 단절의 기간으로 본다면 보존 대상의 폭이 확대될 것이다. 예컨데 지방 도시들에 잔존하는 동양척식회사 건물들, 은행 지점들, 일본식 사찰과 신사들, 일식 주택들 가운데 유형적 양식적 전형성을 갖는 예들은 보존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들을 우리 건축이 겪지 못한 양식적 절충주의의 모습과 근대 직전 혹은 초기 모더니즘의 갈등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학문적 자료로 취급되어야 하며, 식민지 경험의 비극적 교훈을 위한 대중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3) 해방 이후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수용과 전개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하려고 했던 목표와 특징적 성격들이 보존 기준의 준거가 될 것이다. 모더니즘의 목표는 여러가지로 규정될 수 있겠지만, 기능과 재료 공법 그리고 공간 조형의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근대 건축의 특징인 건축가의 자의식적 표현이라는 기준도 중요하다. 즉 적어도 초창기인 60년대까지의 건축 가운데 모더니즘적 재료와 공법이 성공적으로 혹은 최초로 실현된 예들은 보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재료와 기능적 측면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비교적 객관적인 일이지만, 근대적 내부공간과 형태에 관한 기준은 보다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의 기준은 건축적 완성도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단, 모더니즘의 외래 사조나 건축가의 영향이 뚜렷한 건축, 즉 드 스타일류의 형태나 꼬르뷔제, 미이스, 라이트 등 거장들의 번역판은 우선적으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본다.
4) 무엇보다 중요한 대상은 한국 현대건축에 중요한 공헌을 한 건축가들의 작품들이다. 약속된 규범과 양식에 충실한 건축이 명품이었던 근대 이전과는 달리, 건축가의 자의식과 창조성이 강조되는 근대 혹은 현대 건축의 특성 상 개개의 건물보다는 오히려 중요한 작가들 자신이 보존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도적 건축가였던 이천승 이희태 김정수 김중업 김수근 …등의 작품은 어떤 형태로든지 일괄적인 보존이 필요하다. 또한 이 세대의 평가가 지나치게 소수의 건축가들에게만 집중된 경향이 있다. 보다 넓은 범위의 연구가 진행되어 새롭게 조명되는 작품과 건축가들이 발견되기를 희망한다. 그 이후 세대들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평가가 유보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시대적인 평가이며, 동시대의 평가가 늦어진다면 평가를 내리기도 전에 대상이 사라져버릴 위험이 높다. 따라서 완벽하지는 않으나 우리 세대의 건축과 건축가들에 대한 평가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야 보존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5) 그 외에도 보존되어야 할 비주류의 건축들이 존재한다. 예컨데 60년대까지 활발했던 도심지 한옥 주거들, 지방의 중등학교 건물, 종교건축들 …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있다. 시급히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들이다.

3. 어떻게 보존할 것이가.

보존의 방법은 다양하다. 굳이 완전한 실체로 남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모든 대상을 남겨둘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문화와 자본의 수준이 세련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대상이 될만한 건축들의 목록과 기초적 조사들이 필요하다. 보존의 여부는 조사 작업 이후에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철저히 기록되어야 한다. 작업의 주체는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다. 암묵적으로 해방 이전의 건조문화재만이 보존의 대상이 되고 있음 또한 현실이지만, 이제는 동시대의 문화재를 지정할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관리할 수 있는 행정력 때문에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다음의 주체로는 건축관련 단체들이다. 각 단체들과 대학이 연합하여 조사 연구작업을 수행해 나간다면 정부의 역부족과 나태를 극복할 수 있다.
조사작업 이후에는 평가를 통해 보존의 방법과 등급을 정해야 한다. 최선의 보존은 전제한대로 원래대로의 기능과 행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소유주 스스로 이루어진다면 논의의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정부 또는 보존단체의 개입이 있어야한다. 영국의 예를 들면 National Trust라는 민간단체가 주도되어 근대건축에 대한 보존과 활용을 감시 지도한다. 보존 능력이 없는 소유주의 경우 국가가 매입하여 사용권을 부여하고 보존의 책임을 지우며, 능력은 있으나 보존 의사가 없는 경우는 법적 사회적 여론으로 압력을 가한다. 대부분의 소유주는 할 수 없이 본존에 동의하여 일반에게 유료 공개함으로써 보존 비용을 충당한다.
도시의 개발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굳이 철거를 해야 할 경우는 이전 보존을 의무화할 수 있다. 이는 개발에 따른 수익자 부담 원칙에 근거를 두며 법적 제도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전과 현지 보존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대상 건축물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 시급하다.
국가 문화재는 아니지만 보존의 필요가 있는 대다수의 경우는 더욱 건축적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특히 민간 보존의 차원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으로, 철거된 건축물의 일부를 남겨서 장소성과 기억을 유추한다거나, 혹은 신축된 건물 내에 전시실을 두어 철거 이전의 상황을 전시하는 것 등이다. 이들은 법적 강제보다는 건축가의 상상력과 양식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어느 경우든지 일단 지어진 건축은 도시민 전체의 것이라는 인식이 선행되어야한다.
재삼 강조하지만 어떤 방법의 보존일지라도 철저한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현재의 문화재 관련법령을 개정해 현대건축의 영역까지 확대하고 점적인 보존보다 장소와 지역이라는 면적인 보존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에 앞서 중요한 것은 건축가 스스로의 문화적 역사적 인식이며, 일반 대중과 도시민들의 의식 계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