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룡 건축에서의 “도시”
조성룡의 건축에서 “도시”는 핵심적 주제이다. 그의 일련의 작품에는 항상 도시적 풍경․장소․기억 등의 개념이 근저에 깔려 있으며, 또한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들은 도시 속에서의 주택 혹은 근린 시설들이다. 그의 도시관 – 정확히 말한다면 도시와 건축의 관계, 아니면 도시 속에서의 건축의 과제 -을 이해한 후에야 “양재 I”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초기의 “빛나는 도시”나 50년대의 구조주의적 태도에 대한 반성은 도시를 지배하는 자본의 성격이 변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토지는 더욱 세분되고 공공의 역할이란 도시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데 그칠 뿐, 수많은 소유주들의 개별적 자본의 논리에 도시 건축 전체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별 건축물의 합의된 통일점은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건축가들의 다양한 주장이 혼재된 집합으로서 도시가 존재한다. 기존의 콘텍스트가 개개 건축에 강한 외부적 조건으로 존재하는 서구에 비해, 급조된 환경을 가진 일본과 한국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의식있는 건축가들은 도시 전체의 환경적 분열을 애통해 하면서도 마끼나 구로가와와 같이 외부의 공공영역 만을 형성하는 데에 자족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좀 더 전위적인 그룹은 주어진 대지 내에서 소위 “도시적 불안전성”을 표출 함으로써 항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시란 불연속적인 상징들의 콜라쥬이며 건축적 단편들의 경험적 구성체일 뿐이다. 거대 자본이 빚어내는 상업건축의 난립 속에서 그들은 작은 실내에 만족하며 외부 환경과는 격리된 내부의 소우주에 은둔함으로써 침묵으로 저항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주택 속에 또 작은 근린 생활시설 속에 보석을 감춤으로써, 황폐한 도시 속에서 그나마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위안을 주어왔다. 안도 다다오, 시누하라 가즈오, 이또 도요, 하라 히로시 등 일본의 유명 건축가들 뿐 아니라 우리의 능력있는 건축가들, 특히 4․3 그룹의 많은 작가들의 건축에서 위와 같은 단편적인 도시관을 읽는다.
서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5공 6공의 정통성을 창출하기 위한 거대 프로젝트들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영종도 국제 공항의 거대한 소음에 건축가들의 소외는 더욱 깊어간다. 토초세의 제도적 결함과 이를 회피하기 위한 소유주들의 교활함은 도시 내의 모든 비워져 있는 토지에 구조물을 급조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건축가들은 더욱 바빠졌으나 밑없는 무력감에 좌절하고 만다. 조성룡이 비판하는 양재동 포이동의 텍사스 촌은 현재 한국의 제도와 자본이 지시하는 도시의 풍경이며, 쳐다 보기도 싫다는 고만고만한 근린 생활시설들은 쏟아지는 물량의 즐거움에 혹은 무력함에 정신을 팔아버린 건축가들의 초상화이다. 이러한 동네에 보안관으로 지명된 조성룡 역시 황량한 풍경과 불결한 주민들에 질려 버린 듯하다. 80년 대 일본의 보안관들이 그랬듯이 그는 외부 환경과 벽을 쌓고 제한된 개구부를 내어 감시를 한다. 그에게 즐거움을 주는 유일한 개구부는 하늘을 향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에 주어진 유일한 자연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구름을 바라보며 구원을 갈구한다. 전체성을 상실한 도시에 대한 외면이며 회피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벽으로 전면을 차단하며, 전면 도로를 소음과 혼란의 영역으로 규정하여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건물 내부에 직선 계단을 설정함으로써 도시의 요소를 내부로 끌어들이고 새로운 질서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단편으로서의 도시관은 내부의 도로마저 불연속성을 띠게 만든다. 직선 계단은 하늘로 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으며, 좌측 벽을 개방하지 않아서 독립된 길의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작가의 말대로 ‘빛과 어두움이 엇갈리는 중간 영역’이 되었다. 근린 상가건물의 유일한 공공 영역인 계단마저 완전히 개방하지 않았다. 반면 3,4층의 구성은 개방적이며 생명력이 충만하다. 두개의 레벨은 수직적 교감에 부산하며 하늘이 보이고 작은 마당도 있다. 보석은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진 보석
부정적 도시관은 소극적 전략을 낳는다. 이 동네의 풍경을 변화시키려는 전략은 이러한 보석들을 양재동 곳곳에 심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의 도시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분노도 고함도 외치지 않는 무표정한 파싸드로써 철저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보안관의 임무 태만이며 소극적 비판일 뿐이다. 건축 속에 보석을 감추기 보다는 ‘도시에 건축을 아로 새긴다’는 하세가와 이쯔꼬 류의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다. 계도하는 건축이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면 오브제로서의 건축도 낡은 패러다임이다. 팔라디오의 명제처럼 건축은 작은 도시이고 도시는 확대된 건축이다. 물론 부분과 전체 사이에 다른 차원의 논리가 작용하기는 하지만, 건축은 적어도 도시의 풍경이 되고 환경의 일부가 된다. 폐쇄된 건축은 폐쇄된 도시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그의 건축에는 식물성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나 녹지는 황량한 도시를 은폐하는 미학적 오브제일 뿐 환경으로 작용하지 못함을 직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내부로 끌어 들이고 싶어한 자연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뭇 잎에 이는 바람 소리이며, 빗 방울이 아니라 창문에 부딪는 빗물 소리이다. 즉 그의 건축에는 존재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여과되고 흔적으로 남은 자연 만이 있다. 현대의 도시에서 원초적인 자연을 소유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대신에 도시 환경 자체가 “인위적인 자연”으로 대치된다. 도시를 자연으로 본다면, 또 자연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당한 작업이라면, 마땅히 도시의 경관을 내부로 차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성룡이 바라 보는 도시의 신개발지는 자연 파괴적이며 부정해야 할 작위물이기 때문에 도시의 자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초적 자연은 물론, 인위적 자연도 수용할 수 없다면 “비어있슴” 만이 자연을 대치할 수 있다. 건축의 원형적 환경으로서의 자연성은 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성룡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고도의 도시적 감각과 미니말리즘적인 감싸이고 텅 빈 마당은 그 나름으로 자연을 치환한 것이다. 자연성이라는 모호한 개념 대신 포근함 혹은 풍성함의 용어로 대치한다고 하면, 그의 건축에는 포근함이나 풍성함 보다는 구조물과 인간 간의 팽팽한 긴장과 텅 빈 무상함이 짙게 깔려있다.
그의 모든 건축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다. 이성을 신뢰하며 기하학적으로 완결된 구성을 이룬다. 또한 그의 작품은 고전적 비례감을 기본기 위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역사적인 선례들을 중시하고 있다. 굳이 범주화 시킨다면 신합리주의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허무주의적인 감수성과 차겁고 절제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축이 건강해 보이는 것은 창작 과정에 전반에 흐르는 합리주의적인 바탕 때문이다. 그러나 비합리적이고 단편화된 세계에서 합리주의자는 고독해 질 수 밖에 없다. 난잡하게 화장을 한 파편들로 가득찬 도시 환경을 외면하고 대지 내부로 건축을 은둔시킬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는 건축가가 후기 산업사회의 환경을 모더니스트의 자세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해체주의자들은 오늘의 도시란 신바람나는 건축의 무대로 보이지만, 모더니스트들에게는 거대한 정신병동과 같이 보인다. 모더니스트들이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정신과 의사로서 적극적인 치유책을 찾던가 아니면 정신병동을 떠나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의 건축을 보호해야만 한다. “양재 I”은 병동에서 격리된 합리주의자의 은신처이다.
그러나 보안관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이제는 외쳐야한다. 금세기 초 비엔나의 건축적 소음에 치를 떨던 로스의 침묵은 담론으로서의 침묵이었다. 그때는 침묵의 건축이 필요한 시기였고, 로스의 건축 이론은 가식적 외관보다는 내부 공간의 진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로스의 침묵은 이론의 전략적 도구였을 뿐 오히려 웅변이었다. “양재 I”의 침묵은 외부의 소음과 추악함에 몸을 사린 회피다. 황폐화된 환경 속에서 긍정적인 실마리를 찾아내고 개방화된 구성을 통해 이웃을 포용하여, 가식과 치장과 상품으로 가득찬 우리의 도시를 구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