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엇갈린 ‘건축’
“‘건축’에서 ‘한국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꽤나 근본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은 함정을 가지고 있는 문답의 유희가 되기 쉽다. 60년대 이후 지속돼 온 이 물음을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려 노력한 사람, 그 답변을 건축물로 표현하려고 한 사람 모두 서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관념놀이를 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건축’에 대한 일치된 정의도, ‘한국성’에 대한 공통적인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데 ‘한국성이란 불변의 요소, 한국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 과거 한국건축 대다수에서 찾을 수 있는 최대공약수’라 결론을 내리고 현대건축 창작에 반영하려는 노력들이다. 그러나 현대건축가들에게 건축이란 개인적인 창작이며, 항상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늘상 새롭게 건축을 전개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설사 건축가들이 예의 정의를 수용하여 소위 ‘한국적 작품’을 실현한다면, 곧 과거를 모방 혹은 인용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을 받게된다. 이러한 딜렘마는 과거의 건축을 보는 눈과 현대건축을 보는 눈, 혹은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흔히 과거의 건축은 건축가의 개성적인 창작품이라기 보다는 집단적 문화의 산물로 인식한다. 예컨데 랭스 대성당이 고딕양식에 얼마만큼 충실했는가, 혹은 프랑스 고딕과 영국 고딕양식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지, 랭스 대성당과 싸르뜨르 성당의 건축적 차이가 무엇인가는 뒷전이다. 마찬가지로 불국사 건축에서 통일신라 전성기의 기술과 미학을 읽으려는 노력은 있지만, 건축가 김대성이 어떠한 기하학을 사용했고 그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항상 과거의 건축은 시대의 산물이며 문화적 표상이 된다.
그러나 츄미의 라빌렛뜨 공원이 과연 프랑스적인가를 묻거나, 민현식의 신도리코 본관이 얼마나 한국적인가를 묻지 않는다. 더 이상 민족적 문화의 표현이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의 현대건축이 일본이나 미국과는 달라야하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고유한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주문은 더 이상 정당하지 못하다. 한국만의 고유한 건축이란 자칫하면 세계문화와 시대에 뒤떨어진 돌연변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왜 과거의 건축과 현대건축에 대한 시각이 달라야만 하는가? 왜 몸은 현대건축의 첨단적인 욕조에 잠겨 있으면서, 유독 ‘전통’건축에 대해서는 전근대적인 가락의 노래를 부르는가? 그거야 과거와 현재의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역사상 모든 시대와 나라의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다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지금 이 곳에 서서 다른 공간, 다른 시대를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무엇이 있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찾는데 가장 주목해왔던 장르는 주거건축이었다. 주거는 생활의 일차적인 반영체이며, 한국인의 주생활은 어느 다른 민족과도 비교해 독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살림집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묵시적인 인정을 해왔다. 그러나 서로 다른 차원에서 주거건축을 바라보는 눈들은 아무런 결론과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모적인 혼란만을 연출할 뿐이다. 특히 학자들이 바라보는 주거의 전통과 실무건축가들이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기획된 두건의 사례를 비교해 보자.
하나는 학계의 공식적인 연구사에 대한 조망이고, 다른 하나는 실무건축가들이 생각을 토로한 것이다. <표-1>과 <표-2>에서 나타나듯이, 실무건축가들이 전통주거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부분은 대지의 구성과 배치의 방법론들, 마당의 비어있음, 온돌과 창호 기둥 지붕들의 요소, 형태적 이미지, 공간의 성격 등 구체적이고도 실제 설계와 직결되는 해석과 응용의 차원이다. 또한 역사와 전통을 통하여 안팎, 허와 실, 사이, 궁극공간, 확고한 역사인식 등의 개념과 이론을 추구하려는 실천적 자세를 갖는다. 반면 건축학자들은 고고학적, 인류학적, 민속학적 접근방법과 문헌연구, 각 시대별 특성, 주거유형의 원류와 분포상황 등에 관심을 갖는다.
<표-1> “한국주택사 연구의 현황과 전망” 목차
(대한건축학회지 33권 2호.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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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제 목내용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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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 한국주택사 연구의 전망 건축역사적 측면의 개관
장경호 주거지의 발굴과 그 성과 원시주거지 연구 개관
김동욱 주택관계의 문헌과 그 연구 문헌자료의 현황과 연구방법
신영훈 조선조 한양도성의 제택고 문헌고찰을 통한 사실발굴
유승용 민가연구의 상황 연구사
강영환 한국 전통민가 연구의 동향과 과제 연구사
김광언 조선조의 주거풍속 민속학적 성격
김홍식 택보요전에 있어서 민택의 양택론의 계획방법
간잡이 방법론고
김의원 개화기에서 구한말까지의 도시와 주거의 변천
도시 발달과정 속의 도시와 주택
임창복 일제시대 주택건축의 경향고찰 주택설계
송주현 문화재로 지정된 전국 주택건조물 현황 주택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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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근본적인 차이는 ‘주거건축’에 대한 정의나 인식에 나타난다. 건축가들은 주거를 건축가의 사상과 독창적인 사고를 통해 구현된 하나의 원형적 결과로 인식하지만, 학자들은 한 사회집단의 문화적 보편성의 산물로 정의한다. 다시 말하면 전통주거를 구체적인 설계프로세스를 통하여 얻어진 개별적 성취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도와 관습에 의해 존재했던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상으로 볼 것인가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 간의 괴리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모든 논의는 방향을 잃을 것이고, 더욱이 현실적 유용성은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과거의 건축을 지역과 시대의 문화적 표상으로만 인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결국 현대 한국건축의 방향 설정을 위한 지극히 현재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의 건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건축도 현대적인 건축관으로 쳐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건축’이란규범이 아니라 자유이며, 인습적인 제도가 아니라 건축가의 개별적 창작이며, 시대와 사회에 종속된 부품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자성이 보장된 자율적인 존재로 정의되어야 한다.
<표-2> “설계원점으로서의 한국전통건축” 내용
(월간 건축문화 1990년 2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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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핵심적 어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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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창의적 인용 / 지역성과 국제성 / 현대적 감각
과정적 공간과 위계성 / 공간의 연계 수법
김인철 이미지와 추억 / 요소들 : 마당 지붕 기둥
우경국 대지의 분할방법 / 본채와 부속채의 배치방법 / 마당의 구성 /
사랑채와 정원과의 위치적 특성
개념들 : 안과 밖 / 마당개념 / 허와 실 / 사이개념
강철구 어떻게 스스로의 원형을 추구하고 반영할 것인가?
최영집 한국건축의 (유전자적) 원형질 / 해석과 응용
대문 / 마당 / 지붕과 추녀 / 마루 / 온돌 / 창호 / 꽃담
송광섭 공간구성과 변이 / 집합 / 형태 / 과정적 공간 / 입면형식
채의 개념과 전통적 질서 / 대청과 식당공간, 마당과의 관계
김병윤 궁극공간 / 기둥과 외부공간 / 자연성
장순용 인간적인 척도 / 비례감각 / 색채구성 / 질감구성 / 면적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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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엇갈린 ‘한국성’
학문 연구, 특히 역사연구는 목적에 따라 대상과 방법론을 달리할 수 있다. 하나는 과거의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 목적을 둔 지식지향적 연구이고, 다른 한 방향은 현재적 필요에 따라 과거를 추적하는 실천지향적 연구다. 앞의 것이 엄밀한 고증과 소위 객관적 가치관을 요구한다면, 뒤의 것은 비교적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우선으로 삼는다.
80년대 까지 건축계의 화두였던 ‘전통’ 혹은 90년대의 ‘한국성’을 찾기 위해 수많은 연구와 논의들이 있어왔다. 어쩌면 순수 건축사 연구의 목적을 가진 대다수 연구업적들도 사실은 ‘한국성’ 탐구라는 근본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성’ 모색이라는 현실적 목적을 가진 연구와 논의들은 궁극적으로 실천지향적이기 때문에 그 대상과 방법론을 달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한국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국성’이란 ‘한국건축의 문화적 특성’을 의미하며, 문화적 측면에서 건축을 바라보려면 라포포트 류의 이론을 따르기 쉽다. 문화인류학적 건축론은 한국의 지식계에서도 정설화된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계획과정의 주체와 방법에 따라 민속적 전통 folk tradition과 대설계 전통 grand design tradition으로 나눌 수 있다. 민속적 전통의 건축이란 한 문화권의 구성원 대부분이 알고있는 계획과 시공의 방법에 의해 생산되는 건축유형으로 개별적인 개념이나 개성보다는 문화적 동질성과 문화요소가 주된 요소가 된다. 이에 반하여 대설계 전통에 속하는 건축이란 전문집단 혹은 개인의 탐구에 의해 변형되고 창조되는 건축형들로 문화적 집단성보다는 건축가의 지적발달의 과정, 혹은 이론과 개념의 실현화 과정이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두 전통의 건축들을 세분화하여 라포포트는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원시적 건축 Primitive
-전산업시기의 토속건축 Preindustrial Vernacular
-고급, 근대건축 High-style architecture and Modern
원시적 건축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주거를 건축할 능력이 있어서, 건축가 건축주 시공자의 역할이 일치하는 상태이다. 토속건축이란 원시적인 건물보다 개별적인 가변성과 분화가 있으나, 수정되는 것은 유형이 아니라 개개의 표본들이다. 원시적 건축과 토속건축은 민속적 전통에 속하는 건축들이며, 근대 이전의 주거건축은 대부분 토속건축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라포포트의 분류는 두가지 결정적 오류가 있다. 첫째로 계획과정과 시대라는 두가지 분류의 기준을 혼용함으로써 혼란을 가져온다. 원시적 건축은 논외로 치더라도, 토속건축과 고도양식의 건축 (줄여서 고급건축), 전산업시대와 근대의 분류는 서로 차원이 다른 범주적 기준이다. 그러나 그의 분류대로라면 “근대이전의 건축은 토속건축, 근대이후는 고급건축”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근대 이전의 건축과 이후의 건축이 서로 다른 발생의 근원을 가졌고, 따라서 서로 다른 목표와 방법에 의해 탐구할 것을 강요하게 된다. 즉 근대이전의 건축은 문화적 산물인 토속건축의 범주에 속하므로 건축유형의 분류와 분포, 그 사회적 발생원인과 변천과정 등을 다루어야 하지만, 근대 이후의 건축은 전문적 건축가가 개입하는 고급건축이므로 건축가의 개념과 이론들을 주 탐구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방법론적 단절을 전제하고 있다.
두번째의 오류는 비유럽사회에는 더욱 심각한 피해를 가져온다. 그는 “근대이전=토속건축, 근대이후=고급건축”의 등식에서 유럽의 전통은 제외하고 있다. “고급건축과 근대”를 한 항목으로 취급하는 그의 분류방식은, 비록 명확한 언술을 피하고는 있지만, 유럽사회에는 근대이전에도 고급건축의 전통이 있으나 비유럽사회에는 고급양식적 전통이 없다는 견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이전의 유럽건축에는 토속과 고급건축의 전통이 공존하지만, 그래서 양식사적인 전개과정으로서 건축의 역사가 구성되지만, 과거의 비유럽건축은 모두 토속건축의 범주여서 양식사적인 역사는 물론 근본적인 변화도 발전도 없다는 정체론을 유도한다. 다양성이 건축문화의 척도임을 생각한다면, “유럽=고급건축, 비유럽=토속건축”이라는 지역적 편견을 갖게한다. 이 편견대로라면, 동부 프랑스 끌뤼니의 수도원은 그 지역의 토속건축이 아니라 로마네스크라는 고급양식의 개성적인 작품이지만, 북경의 자금성이나 경주의 불국사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문화적 파워가 만들어낸 토속건축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 없는 시각이 한국의 학계에도 최선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슬로건이 주창되지만 실상은 “가장 한국적인 건축은 가장 토속적인 건축”을 의미할 뿐이며, 세계 고급건축의 객석에서 즐기는 이국적인 취미나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성이 토속성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한, ‘이 시대 우리 건축’에서 한국성을 찾는 노력 자체가 한국건축의 위상을 고급건축에서 토속건축의 차윈으로 격하시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라포포트의 오류는 그 자신이 의도한 결과라기 보다는, 서구 건축계에 깊게 깔려있는 집단적인 편견의 결과일 것이다. 이 편견들은 서구의 건축사적 인식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그 틀을 수입하여 이론을 구축한 한국의 건축계나 학계의 지식인들에게도 깊게 전염되었다. ‘한국성’ 하면 항상 과거의 한국건축을 대상으로 삼으며, 특히 지극히 토속적인 민속마을과 초가삼간을 연상하는 지적 습관. 따라서 한국성이란 ‘과거의 한국건축 대부분이 향유했던 보편적 성격’을 의미하게 된다. 당연히 궁궐보다는 사찰이 한국적이며, 민가가 더욱 한국적이라는 양적 판단, 집단적 판단에 중독된다. 그러면 과연 20세기의 한국성이란 아파트의 획일성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고층 아파트야 말로 이 시대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건축군이며, 현대판 토속건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토함산의 석굴암을 생각하자. 석굴암은 인도의 초기 석굴에서 시작해서 중국 석굴의 수많은 실험을 거쳐 경주에 정착한 지극히 국제적인 운동의 귀착점이었다. 이전에도 석굴암은 없었으며, 이후에도 없었다. 한국건축사를 통해 유일무이한 존재. 당시로서는 최신의 공법과 기술이 동원된 최고의 하이테크 건축이었다. 희귀한 건축이기 때문에,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니까 석굴암은 가장 비한국적인 것인가? 유네스코의 지정을 힘겹게 따낸 불국사와 종묘 역시 유일무이한 건축이니까 한국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아무도 이 우매한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험정신, 국제적인 운동, 하이테크, 유일한 예외성, 독창성과 특수성 등이 오히려 ‘한국성’의 속성이 될 수 있음을 반증한다. 더 이상 ‘한국성’을 집단적 보편성, 고유함, 전통적인 인습에서 찾지 않아도 좋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한국성’ 탐구가 과거에 연연해할 필요만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보편적 구조 속에서 특이함’을 추구하는 근대적인 정신이 ‘한국성’ 탐구의 지적 배경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시대의 의미있는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한국성’을 찾는 것이 더 빠른 길일 수도 있다.
3. ‘한국성’ 찾기 이전의 문제들
‘건축’과 ‘한국성’의 개념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합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논의의 목표가 지극히 현재적인 문제해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건축의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인정하더라도, 현대적 ‘건축’이란 결국 개별 건축가의 개별적인 창작이다. 따라서 건축을 이해한다는 행위는 건축가의 세계관과 개념을 읽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추적함을 의미한다. 건축의 이해는 곧 설계 프로세스의 대한 비판적 이해다.
건축을 지식학의 체계로 볼 때, 건축적 과정이란 건축가의 깨달음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건축의 한국성이란 형태나 요소나 공간 등의 물질적 존재에서 추출하기 보다는, 건축화된 지식과 지혜에서 찾아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현대건축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 건축에 대한 이해 역시 무엇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다는 왜 만들었는가의 이해가 중요하다. 석굴암의 공법과 새겨진 조각들에 대한 미학적 이해보다는 석굴암 건축의 국제주의적 흐름과 수용의 변용, 구형공간을 만들어야 했던 김대성의 생각과 실현을 위해 발명한 테크놀로지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계속되는 이야기지만, 이제 더 이상 집단적인 건축‘문화’에서 한국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포기해야한다. 오히려 건축을 개별적인 실현으로 인정하고, 개별 건축가의 특수한 생각과 해법들을 추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건축이론들이 추출되기를 기대한다. 한국성의 개념은 개별적 이론들이 집적되고 갈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비평하는 사이에서 창출되어야 한다. 그 검증의 과정을 거친 이론이야말로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개별적 건축은 거대한 단일이론을 거부한다. 예컨데 ‘한국건축은 선이다’라든가, ‘비애의 미학’ 또는 ‘구수한 큰 맛’등 일견 명쾌해 보이는 규정들은 몇 개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건축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건축가들의 사고는 비전체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온 한국건축의 역사를 너무나 간단하게 개념화시키고 있다.
복잡한 사물들의 공통점을 찾는다거나, 아니면 고유성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결국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예를들어 과거 한국건축의 보편적인 성격으로 흔히 지칭되는 ‘자연과의 조화’란 현상은 어느 민족의 전통건축에도 공존하는 성질이다. 또, 한국 주거건축의 원형을 소급해 올라가면 원시시대의 움집으로 귀결되는데, 움집이란 청동기시대 전 세계에 산재했던 가장 국제적인(?) 형식이 되고만다. 다시 말해서 거대하고 단일한 ‘한국성’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비한국적인’ 것으로 귀착된다는 모순에 빠진다. 과거 현재를 막론하여 건축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건축가들의 복합적인 사고를 존중해서 추출된 개별적인 이론, 단편적인 개념들, 구체적인 변용과 돌연변이에 가까운 희소성들에서 한국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과거의 건축을 토속적인 문화의 산물로 보는 자세를 벗어나, 과거의 명작들 하나하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별적 세계관은 개별적인 작품들에서만 찾을 수 있다. 양산의 통도사를 현존하는 1000개 전통사찰의 하나로 볼 것이 아니라 자장율사라는 독특한 건축지식인의 설계작품으로, 1200년간 지속적으로 변화되고 재구성되어 온 건축적 유기체로 바라보아야한다. 통도사에서 찾아질 수 있는 한국성이란, 자장의 초기 구상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후에 전개되어온 건축적 변화와 과정에 있다. 초기의 이론도 중요하지만, 긴 개별적 역사 속에 내재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도사에서 찾아질 수 있는 한국성이 해남 대흥사의 것과 달라도 좋고, 부석사 병산서원 창덕궁 종묘와 달라도 좋다. 아니, 오히려 다르면 다를수록 한국건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선택가능한 한국성의 방향을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바람직하다.
4. ‘한국성’ 찾기의 방향
<이시대 우리건축>이라는 전제에서 한국성을 논의한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결과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실천적인 목적은 지향점을 뚜렷이 가져야한다. 한국성 추구의 목표가 한국적 건축을 세계시장에 수출하려는 문화산업적인 데에 있다면, 세계인들이 선호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개발해야 한다. 예컨데 ‘씨받이’나 ‘서편제’ 같은 건축은 신기함과 생소함 때문에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시장개척에 성공했다. 그러나 다시 유사한 소재, 유사한 정서를 반복한다면 세계의 시장은 곧 식상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적인-정확히는 과거의 한국적인’ 특수성만 강조되었지, 인류 공통의 보편적 정서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국적’ 특성이나 개별성은 인류 혹은 건축의 보편성 안에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더욱이 논의 목표가 건축의 독창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든가, 세계건축이 직면하고 있는 딜렘마들을 해결할 실마리 발견에 있다면, 탐구의 대상과 방향과 방법론은 다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현대건축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점검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한국성 탐구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의 21세기에 대한 예견은 무엇보다 환경문제가 부각된다. 환경은 비단 건축 뿐 아니라 인류 문명 전반에 대한 심각한 위기로 다가온다. 건축계에서는 이미 ‘지속가능한 건축’ 또는 ‘환경친화적 건축’의 패러다임들이 제안되고 있지만, 아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 초보적인 논의들로 보인다. 한국건축을 단순히 자연과 조화된 건축이라고 추상화시킬 것이 아니라, 지형의 선정과 이용에 대한 건축적 개념과 방법론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한다면, 세계건축계에 새로운 환경적 패러다임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건축의 중대한 실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도시와 건축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건축계의 숙제로 남아있다. 도시와 건축은 점점 분화된 영역으로 멀어져가고, 빛나는 건축으로 가득한 서울은 암울한 도시로 악화된다. 그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 그 수많은 캠퍼스와 문화단지들에서 도시적 질서, 환경적 안락함은 사라지고 있다. 도시화된 건축, 혹은 건축화된 도시에 대한 해법들이 부족한 것이다. 눈을 돌려 과거의 한국건축을 보면, 건축의 실체는 건물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이, 건물과 환경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적 관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건축이 달성한 큰 성취, 즉 집합적 건축의 개념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용한 대안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구조주의적 접근이나, 유형학적 접근이 해결하지 못했던 도시건축의 문제를 이른바 ‘한국적 집합성’의 해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한국성’ 탐구의 방향을 환경과 도시로 제안한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현실적 판단 위에서 방향을 설정하자는 제안이다. 필요가 다양하다면 다양한 방향에서, 중대한 한가지 문제에 봉착했다면 한가지 방향으로 총력을 모으면 된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정된 문제의식이나, 획일적인 방법론이나, 규정된 방향성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면 또 다시 단순화와 집단화의 오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성’에 대한 원론적, 추상적 논의는 일단 유보하기로 하자. 개념적 정의보다는 부분적 가설을 설정하고 그들을 충실히 실천하는 시행착오만이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다’. 또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