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7.01.06.
출처
국은광장
분류
건축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옛 건축물들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목조건축이다. 나무라는 재료는 썩기 쉽고 타기 쉬워서 오랜기간 보존되기 어렵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들은 전국의 거의 모든 중요한 건물들을 불질러 없애버렸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목조 건축 유적의 99%가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그 이전의 건물들로 아직도 보존된 것들은 산간 오지에 있어서 전쟁의 피해를 면했던가, 아니면 극히 재수좋게 남겨진 우연한 소산들이다.
서울의 숭례문 – 세칭 남대문은 서울에 신수도를 건설하면서 만든 8개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다. 흥인문(동대문)과 광희문(동남소문)이 보존되기는 했지만, 둘다 19세기에 다시 세워진 것에 불과하다. 서울에 남겨진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 조선초기의 건물로는 숭례문이 유일하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는 대단하다. 서울성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일본군들이 제일 먼저 점령했고, 제일 나중에 후퇴한 숭례문을 온전하게 남겨두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다행히도 황급히 퇴각하느라 불질러 버릴 여유 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현재의 숭례문은 1396년 최초로 세워졌던 것을 1448년 세종 시대에 다시 재건한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가 군사혁명을 통해 새왕조를 세운 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수도를 정해 개성을 떠나는 일이었다. 아직도 개성의 인심은 고려왕조를 흠모하는 분위기였고, 구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수도를 정하고 건설하는 대역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3년을 허비한 후에야 겨우 정해진 한양 땅에 시급히 왕궁을 건설하고 도시를 이전할 필요에 쫒기게 된다. 따라서 태조 당시의 서울은 임시 도시에 불과했고, 세워진 건물들의 질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세종시대의 서울은 곳곳이 붕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전시대의 엉성했던 도시와 건축을 재정비할 여유가 생겼다. 서울의 성곽을 대대적으로 다시 쌓고 성문들을 고쳐 지었다. 이때의 건축솜씨는 지금 남겨진 숭례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견고하게 쌓여진 돌 성벽 위에 날렵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의 루각이 서있다. 일반적으로 성문이란 아래의 석축부분과 위의 목조루각으로 이루어지며, 이 두부분 사이의 비례와 형태가 성문건축의 완결성을 결정한다. 현존하는 성문 가운데 숭례문을 최고의 작품으로 치는 이유는, 이 문의 성벽부와 루각부의 비례와 형태가 완벽하게 조화되기 때문이다. 같은 서울의 성문이지만 4세기 후에 건립된 흥인문과 비교해 보자. 흥인문은 루각부분이 아래 성곽부에 비해 큰 가분수 꼴이고, 숭례문에 비해 전체 규모가 작으면서도 둔중해 보인다. 시대적인 미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술적인 수준의 차이이기도 하다.
세종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일컬어 ‘진경시대’라고도 한다. 안견과 안평대군으로 대표되는 회화에서는 사실적인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풍경들이 그려졌고, 음악계는 박연 등이 민족음악을 집대성하던 시대였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숭례문 뿐 아니라 지방에 남겨진 몇 개의 건물들은 공통적으로 당당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화려하되 지나치게 기교로 흐르지 않고, 견실하되 딱딱하지 않다. 예술학적으로 말한다면 고전적인 규범과 낭만적인 개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최고의 미학을 달성한 작품들이었다. 숭례문에는 새시대를 열고자하는 희망에찬 예술 의지가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 다시 세워진 흥인문의 미학적 내용은 대조적이다. 약화된 왕권을 다시 일으키려는 정치적 의도와, 근대화 개방화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시대풍조가 흥인문을 오로지 규범에만 치우친 권위적인 건물로 만들었다. 숭례문과 흥인문을 비교하면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다’ 라는 명제가 잘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