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성곽 기술의 결정판
수원 화성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는 ‘동서양의 성곽 축조 기술을 종합한 아시아의 사례’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이유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는다.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사회에서 문물을 받아들일 만한 외국이란 ‘중국’밖에 없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그나마 중국과의 교류마저 단절된 상태였다. 수원화성이 건설된 18세기에는 비로소 중국과의 교류가 재개된 시점이었고, 중국을 통해서 서양 물정의 소식은 전해졌지만, 아직 서양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동서양의 성곽 기술을 종합하여 건설했다는 것일까?
1789년, 정조 임금은 자신의 친아버지이며 당쟁의 와중에서 비운의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 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릉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시역, 팔달산 아래였다.
천하의 효자 정조임금이라 하더라도, 단지 생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신도시 건설이라는 대규모 역사를 벌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륭원을 이전하면서 소요되는 비용은 노론 벽파가 장악하고 있던 금위영과 어영청의 경비에서 충당시키기도 했다. 효와 정통성을 빌미로 정적들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큰 뜻을 실행에 옮겨줄 두 명의 신하를 택했으니, 도시계획과 성곽의 설계를 맡은 정약용과, 건설자금 조달부터 공사를 총 지휘할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었다. 정약용은 당대의 큰 실학자였으며 채제공은 소장 실학자들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정약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 출중한 저술을 남긴 실학의 완성자였을 뿐 아니라, 예술과 건축에도 뛰어난 식견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정조는 약관 30대 초반의 중급 관리에 불과했던 그에게 개혁을 마무리짓는 국가적 사업인 수원화성 설계를 맡기게 된다. 최고의 천재답게 그는 1년여의 연구 끝에 수원화성의 설계와 공사방법을 완성하였고, 현재 모습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때, 정약용은 한국의 전통적인 성곽 뿐 아니라, 중국의 성곽제도와 기술을 여러 서적을 통해 연구하면서, 발달된 중국과 서양의 성곽기술을 도입했으니 그의 견식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곽보다 도시를
수원화성의 현존하는 성곽과 그 부속시설들의 조형에서 대단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그러나 성곽이란 도시를 감싸는 경계물에 불과하다. 수원화성의 건설 목적은 성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만의 인구를 정착시킬 생활의 터전, 즉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성의 진정한 가치는 도시계획의 개념과 구조에 있다.
새로운 도시의 성패는 그 도시가 자생능력이 있는가, 즉,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갖추는가 였다. 농경사회에서 도시를 키우고 인구를 집중시킬 수 있는 수단이란 상업 뿐이었다. 화성은 입안 당시부터 상업도시로서의 목표를 가지고 도시계획이 시행됐다. 화성 완공 직후 인구유입이 기대만큼 신통치 않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유인책을 강구한다. 수원을 한양과 마찬가지 등급의 도시로 격상하는 특별법을 포고하기도 하고, 각종 금융특혜를 시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울과 개성의 부자들이 수원에 전방廛房을 설치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10만냥을 무이자로 융자해 주었다. 토박이 화성상인들에게는 7만냥을 융자해 주었다. 이런 특혜조치 1년만에 수원읍의 인구는 1,000호가 넘게됐고, 인근에서는 가장 큰 거점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여느 도시와 달리, 가로의 성격도 상업적이었다. 시내 한 가운데를 남북로와 동서로가 관통하고, 그 교차하는 지점에는 ‘십자가十字街’가 형성됐다. 수원읍은 십자가로 구획된 4개의 지역 – 서성자내, 북성자내, 남성자내, 동성자내로 이루어진다. 십자가 주변이 도시 중심으로 쌀가게 포목가게 그릇가게 등 상업시설이 밀집하게 된다. 이 상업지역은 남북로를 타고 뻗어나가 도시 전체가 상업지구화되는 효과를 거둔다. 수원읍내의 구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서울과 곡창지대인 호남을 잇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부 경기지역의 거점도시로 시장권을 넓혔다.
수원은 철저하게 자생력을 가진 자족도시를 지향했다. 도시민 모두가 상업에 종사할 수 만은 없었고, 여전히 인구 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정조는 수원에서 농업경영체를 실험했다. 만석거라는 7만평의 저수지를 축조해 농지를 조성하고, 국영농장인 대유둔을 경영했다. 또 서호 옆에는 서둔을 경영해 농부들을 고용해 임금을 줄 수 있었다. 고용된 농가 2집마다 소 한 마리를 대여해 농사에 활용케 했다. 대여한 소들은 농사에만 활용될 뿐 아니라, 번식과 매매가 성행하게 됐다. 수원의 소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성장했고, 유명한 ‘수원갈비집’ 들도 번성한 소시장의 여파로 생기게 된 것이다. 수원에 아직도 서울농대가 자리잡고 있는 유래도 뿌리가 깊다. ‘수원갈비’와 함께 2세기 전 정조의 야망이 변형된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지금의 수원시는 근대사를 겪으면서 여러 차례 변화와 확장이 있어서 원래 도시계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성곽은 1970년대 말끔이 복원되어서 더없이 아름다운 여러 폭의 그림과 같다. 지형을 따라 구불거리는 성곽의 곡선들, 적절한 간격으로 돌출되고 우뚝 솟은 공심돈과 치성들, 날아갈 듯 언덕 위에 자리잡은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어울어짐, 7개 아취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화홍문, 환경조각을 연상케하는 봉수대의 굴뚝들, ………. 무엇보다도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집합적 아름다움.
그러나 수원화성은 관광용 눈요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기 위한 군사용 건축이었다. 직접적으로 수원성곽을 사용하고 관리한 집단은 왕실 친위부대였다. 외침과 전쟁에 대한 우려가 없었다면 수원성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용 건축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아름다움이 사기를 저하시키는 주범이라 믿는 전략가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현상이다.
아름다운 성은 수원성 뿐만이 아니다. 해미읍성도 온달산성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동화의 무대가 될 정도로 아련한 중세 유럽의 카슬과 부르크들, 르와르 강변의 낭만적인 샤또들, 산 마리노의 처절하게 감동적인 산성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 히메지성의 비장감이나 중국 만리장성의 웅장함까지도.
왜 세상의 모든 성들은 감동적인가? 거기에는 주민의 재산과 영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생존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에 장애가 될 일절의 가식이나 과다함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고하게 구축됐기 때문이다.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 세월의 침식에도 굳건하게 자세를 유지해 온 끈질김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능적이면서 가장 강한 건축이 바로 성곽이고,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기도 하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성곽도 있다. 그런 성들은 대부분 쉽게 함락된 곳이며, 마지못해 상징적으로 축조된 부실한 성들이다. 강하지 않은 성, 절박한 생존의 희구가 없는 성들은 아름답지 않다. 적어도 성곽건축에 있어서 강함과 아름다움은 결국 하나다. 강한 것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성곽은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