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축적 소설에 대한 기대
건축인의 위치에서 문학 작품 속의 건축이 주요한 소재가 되거나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이 되기를 원하며, 그러한 문학을 ‘건축적 문학’이라 부르려한다.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는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건축적 소설’이다. 이 소설은 파리 씨테섬에 있는 노틀담 성당의 건축적 구조를 사건 전개의 중요한 틀로 삼을 뿐만 아니라, 노틀담 성당의 건축적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함으로서 건축물과 건축공간을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대접하고 있다.
홍명희가 소설 ‘임꺽정’을 연재했던 1928년부터 1940년까지는 한국 문학사상 유례없는 격변기였고 많은 실험적인 소설들이 발표되었다. 민족문학 세력이 약화되면서 카프의 형성과 함께 계급문학이 성행했으며,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의 뒤를 이은 한국문학 2세대들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작가들은 관심의 영역을 일상공간으로 넓혀 건축적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다.
예컨대 박태원은 1934년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수에 가까운 소설가 구보씨가 1930년대 여름 어느 날 자기 집에서 출발하여 종로, 화신백화점, 경성역 등 총 연장 15.7km를 거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묘사한 소설이다. 당시 경성 시가지의 모습을 충실히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이 소설의 매력을 느끼지만, 그 보다 장면의 묘사에 그 배경이 되는 건축의 공간적 구조가 중요한 소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두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꺼내 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 앞까지 나간 아들은, 혹은 자기의 한 말을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들의 대답 소리가 자기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중문 밖에까지 들릴 목소리를 내었다. “일즉어니 들어오너라.”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이 소리를 내어 열려지고, 또 소리를 내어 닫혀졌다. 어머니는 얇은 실망을 느끼려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려 한다. 중문 소리만 크게 나지 않았으면, 아들의 ‘네’ 소리를, 혹은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주인공은 1930년대 북촌 어디 쯤에 지어진 ‘개량한옥’에 살았을 것이다. 마당을 빙 둘러 방들이 있고, 집 밖으로 나가려면 방문 앞의 쪽마루를 딛고 마당에서 중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전형적인 도시한옥의 구조이다. 중문이 있다고 하니 중문 밖에는 하인들이 사는 행랑채가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있는 안방과 아들 방 사이의 공간적 거리, 목재로 된 육중한 중문을 여는 소리 등이 모자간의 세대차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건축적 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은 건축적 소설인가? 건축적 충실도 여부가 이 소설의 문학사적 고전성을 좌우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소설이 꼭 건축적 미덕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또 한편의 걸출한 건축적 소설이 되기를 기대했다. 세부 묘사가 정밀하고 조선시대의 풍속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탁월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라고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소설 임꺽정에는 신앙, 놀이, 관혼상제, 의식주 등 풍성한 민속과 풍속이 그려져 있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음식에 관련한 묘사는 전 권에서 317건에 달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건축적 묘사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전 10권을 통틀어 22건 정도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작품을 읽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된 부분은 9건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건축적 상황설정이나 묘사가 소설의 중요한 틀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정교하게 배경 공간을 설정한 뒤 사건을 전개한 구성이 돋보이는 부분도 있다.
임꺽정 일당이 개성 송악산의 대왕당을 무대로 하룻밤 소동을 벌이는 부분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의 지문과 같이, 정교하게 건축적 상황을 설정한 뒤 각 공간을 일관되게 이용하고 있다. 이미 설정해 놓은 대왕당의 건축적 무대를 활용해 여러 등장인물들의 위치와 동선을 적절히 묘사한다.
안마당의 화톳불은 마루방에 비치는 것을 박수들이 좋게 여기지 않는지 ……….. 문간에서 밥 먹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틔워놓느라고 각각 밥그릇을 들고 이리저리 나앉고 또 밝은 데를 향하느라고 거지반 전각을 등 뒤에 두고 돌아앉아서 …….(8권 88쪽)
또는 도시 공간의 묘사 자체로서 소설의 동선 이동과 장면 전환을 유도하기도 한다. 꺽정의 애첩이 된 기생 소흥이의 동네를 묘사하는 부분은 마치 도시의 길과 골목을 추적하며 이동하는 카메라의 앵글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장찻골다리에서 소흥이 집을 찾아가자면 다리 남쪽 큰 골목을 십여 간쯤 나가다가 동쪽 실골목으로 꺾이는데, 그 실골목이 사람 서넛만 늘어서면 팔 놀리기 거북할 만큼 너비도 좁다랗거니와 길이 역시 짤막하였다. 실골목 안을 들어서면 바른손편은 큼직큼직한 집 뒷담이요, 왼손편은 작은 집들 문앞인데 맞은바라기 서향으로 문난 집은 치지 말고 작은 집이 모두 다섯 채에 안침 다섯째가 소흥이의 집이었다. (8권 235쪽)
조선시대에 조성된 한양의 도시 공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묘사하기 어려운 부분이며, 한양 시절 서울의 장통교에 부근에 있었음직한 동네와 도시주택의 배열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틀담의 곱추>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이 건축적 묘사와 공간적 해석이 소설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건축적 소재는 단지 일상적 배경을 그리기 위한 수많은 영역들 중 하나일 뿐이며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나마 음식이나 민속과 같은 다른 영역에 비해 다루어진 빈도나 묘사된 밀도가 낮다. 또한, 건축을 단지 배경으로만 다루어 건축을 비롯한 인공적인 환경 자체에 대한 비평적 시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봉산관아를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할 때도 “동헌이 있다, 홍살문을 들어선다, 내아와 문루가 있다” 등 건축물의 존재만 언급될 뿐, 관아 건축이 위풍당당하다든가, 공간의 구성이 엄격하게 질서가 잡혀있다든가, 아니면 휘어진 처마선의 그림자가 처연하다든지 하는 미학적 비평적 관심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임꺽정>은 건축적 소설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소설에 나타난 건축적 내용들이 허황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지 않게 등장하는 건축적 컨텐츠들의 원천은 어디이고, 작가는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소설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통로일 것이다.
2. 건축 컨텐츠의 원천과 시각
작품은 작가를 넘어설 수 없다. 특히 <임꺽정>과 같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10권도 미완에 그칠 정도로 방대한 대하소설의 경우, 작품의 격과 질은 철저하게 작가의 역량과 시각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성장과정과 같은 배경적 이력이 작품 분석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홍명희는 조선말 명문가문에서 태어나 엄격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된 탁월한 한학실력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문헌자료들을 들추어 줄거리의 골격을 세우는 한편, 야사류의 문헌들을 섭렵하여 풍부한 이야기들로 살을 붙여 <임꺽정>을 창작할 수 있었다. 홍명희 시대에 비록 민속사적 관심을 비롯해 국학 부흥이 일어나기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민속사, 건축사, 도시사, 지리학 등 미시역사학의 학문적 축적이 일천했던 시대다. 따라서 건축 또는 지리적 환경을 묘사하는 데에 해당 분야의 연구성과를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고, 마땅히 작가 스스로 역사 문헌들 속에 그 원천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모산성의 소재지는 평산읍에서 남으로 칠십 리요, 성벽은 석축인데 주회가 이천사백팔십 척이요, 고가 십오척이요, 성내의 우물은 단 하나뿐이나, 다른 곳 열 우물이 부럽지 않도록 수량이 많았다. 평산 경내 산성이 자모산성 외에 태백산성과 성황산성과 철봉산성이 있어 모두 합하여 넷인데 그중에 태백산성이 제일 컸다. 태백산성은 황주 정방산성, 해주 수양산성, 은율 구월산성, 서흥 대현산성, 재령 장수산성 다섯 산성과 아울러서 황해도내 육대산성으로 칠 것이라 성이 넓고 곡성, 옹성까지 구비하여 성의 규모가 자모산성으론 견줄 수가 없었다.
9권에는 꺽정이 패가 추격하는 관군을 피해 자모산성으로 피신하는 장면에 등장한 자모산성에 대한 묘사다. 묘사의 순서는 산성의 소재지 – 크기 – 보유자원 순으로 이어진다. 뒤에는 자모산성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평산 경내 산성을 소개하고, 그 뒤에는 황해도 일대의 대표적인 산성도 소개한다. 마치 <동국여지승람> 따위의 지리지 한 부분을 읽는 듯한 서술의 순서와 태도를 드러낸다. 아마도 홍명희는 <임꺽정>을 위하여 지리적 무대가 되는 경기도, 황해도 일대의 지리 자료들을 여러 문헌에서 발췌 저장했다가 적절한 곳에 배치하였을 것이다. 관군의 추격을 당하는 급박한 과정에서 이처럼 개론적인 내용을 소개할 여유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지만, 이 역시 홍명희 특유의 작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소설의 무대인 16세기의 상황을 철저히 고증할 만큼 풍부한 역사문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증 역사학의 시각에서 <임꺽정>의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은 작업이다. 예를 들어 돌이가 서울 주팔이의 집에 머물면서 서울 구경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각 속에 달린 인경도 들여다보았고 경복궁 대궐 앞에 있는 해태도 구경하였고, 또 중부 경행방에 있는 원각사와 서부 황화방에 있는 흥천사도 돌아보았다. (1권 202쪽)
소설의 시점은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한지 10여년 흘렀으니 1515년 언저리이다. 원각사는 1504년에 연방원이라는 왕실 기방을 설치하여 이미 절의 기능을 잃어버렸으며, 1512년에는 절의 건물들을 헐어서 재목을 일반에게 나누어 줘 건축물마저 사라진 폐허였다. 흥천사는 태조가 서부 황화방(현 정동)에 창건한 절이지만 연산군 때 화재로 전소되어 중종 시절에는 이미 없어진 절이다. 그러나 홍명희 시절에 서울시민들은 원각사 자리와 흥천사 자리를 모두 알고 있었고, 홍명희는 문헌을 통해 조선 초의 지명을 되살리려 했지만, 연대기적 고증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소설이 역사교과서가 아닐진대 10년 정도의 연대적 차이가 그리 심각한 실수는 아닐 것이다. 상식과 문헌자료를 적절히 섞어 조선 초기에 있었음직한 상황를 묘사한 것만도 대단한 성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홍명희는 청년시절 서울과 도쿄에 유학하며 신식학문과 문학에 접하면서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성장한다. 그 스스로 “천박한 이상주의를 아주 싫어하는 리얼리스트”라 할 만큼, <임꺽정>은 전반적으로 사실적 묘사에 근거하고 있다. 인물의 설정이나, 사건의 전개, 인물들의 갈등 등 핵심 줄거리는 인간적 사회적 정치적 보편성을 가지고 재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주를 비롯한 배경적 묘사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고증의 대상이 된다. 리얼리즘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필수조건으로 삼아야만 성립할 수 있다. 홍명희가 그리려한 시대는 15세기였고 장소는 경기-황해도 일대였다. 또한 그는 <임꺽정>의 리얼리즘적 서사를 통해 사라져가는 ‘조선정조’를 그리려 했다. 그러려면 핵심 줄거리 뿐 아니라 의식주 민속 등 세부묘사가 사실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작가가 체험하지 못한 시공간을 문헌자료와 역사적 상상력에만 의존하여 묘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결국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작가 개인의 체험에 근거한 상식적 상상력을 동원하게 된다. 임꺽정 시대의 조선정조를 그리기 위해서 조선말 양반가에서 태어나 식구가 수십 명이나 되는 대가족 속에서 성장하며 얻은 체험이 중요한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옛날 우리 집의 구조나 가재도구, 살림의 규모, 일상생활, 손님으로 드나들던 사대부의 모습……등등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었겠지요.”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전반적인 인식이었지만, 홍명희 역시 조선적인 것은 곧 과거의 것이고, 서구적 (일본적)인 것은 곧 현대라는 묘한 이분법적 인식의 틀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꺽정>에 나타나는 건축적 묘사는 대부분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건축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방의 것들이다. 건축적 장면이 전권에 고루 등장하는 것이 아니어서 의형제 편을 다룬 4~5권에는 기껏 한두 장면 정도, 6권에는 전무한 까닭도 여기에 기인한다. 비교적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는 장면은 대부분 서울의 도성 풍경과 양반 사대부의 주택, 서울이나 지방도시의 중인 주택 등에 집중되어 있다. 모두 벽초의 체험반경 안에 들어오는 대상들이다.
서울 윤판서 여식의 혼인잔치를 자신의 집에서 치르는 장면이 2권에 그려진다. 잔치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윤대감집의 큰사랑, 작은사랑, 수청방, 하인청 등을 등장시켰다. 현존하는 19세기 서울 대감집들과 동일한 공간구조이다. 그러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16세기에도 과연 이런 집이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남자주인이 거주하는 사랑채의 존재는 ‘남녀차별’이라는 , 아버지의 큰사랑과 아들의 작은사랑이 따로 있다는 것은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가치관 때문에 나타난 사회적 건축이다. 건축학계에서는 그 정착시기를 성리학적 가치체계가 완전히 정착된 17세기, 대략 임진왜란 이후로 잡고 있다. 고려말 조선초의 상류주택은 사랑채를 분리하지 않아서 남녀주인이 같이 안채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윤대감댁은 16세기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 서울 어딘가에 있었던 대가의 모습일 것이다.
홍명희는 본질적으로 지식인이요 유산계급이다. 그것도 국내 최대 저항지식인 단체인 신간회의 핵심으로 활동할 정도로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임꺽정>은 철저하게 민중사적 시각에서 민중의 삶을 그리려고 했다. 역사의 주체는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이며, 민중의 삶을 통해서만 역사의 움직임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 작가의 역사관 때문이다. 캐릭터의 설정이나 역사적 사건의 의미, 등장인물의 행동 양식 등은 작가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재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이나 소품으로 등장하는 구체적인 물건들은 창조의 대상이 아니라 고증의 대상이 된다. 핵심 줄거리는 민중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지만, 배경과 소품은 사실 자체가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임꺽정>의 시공간을 체험하지 않았고, 민중의 일상적인 삶과 미세한 영역들을 체득하지 못했다. 그의 창작을 도와줄 민중사, 민중주거학 등 세부적인 학문적 성취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서울의 상류주택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데 비해, 민중들의 주택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의 민중주택 -민가들은 지역적으로 많은 편차를 보여, 각 지방에는 특유의 지역형 민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전국을 무대로 이야기를 옮겨다닌 <임꺽정>에서는 지역형 민가에 대한 차별성을 발견할 수없다. 그나마 그려진 것도 이교리가 유배지로 머물었던 거제도의 민가 (1권 27쪽), 이교리 장인의 함흥 지방 민가 (1권 160쪽) 정도가 잠깐 묘사될 뿐, 나머지 민가의 묘사에서는 특별한 지역적 성격을 읽어내기 어렵다.
양주골 백정인 임꺽정은 물론이고, 그의 여덟 의형제들도 대부분 지방 산골의 하층민 출신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라고 생활한 건축물의 묘사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인물인 원판서의 저택이나, 기생 소흥이의 서울 기방 따위가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홍명희 개인과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는 하지만, 민중소설을 지향하는 <임꺽정>에서 핵심 민중이 아닌 상류층이나 주변층의 묘사에 그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건축의 세계에서 바라봤을 때 소설 <임꺽정>에서 여러 아쉬운 점들을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 분야의 기대일 뿐이며, 오히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건축적 묘사를 분석하여 작가의 의도와 성취를 되새기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건축 상황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궁궐, 관아, 사찰 등 공공부분의 건축물이다. 이 분야의 건축물은 현재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건축적 특징이 다양하여 할 이야기도 많으며, 서사를 뒷받침할 문헌자료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임꺽정>에 공공건축물이 등장하는 빈도가 낮고, 묘사의 수준도 피상적이다. 특히 조선조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 또는 유학 공공건축이라 할 향교나 서원 등 유교건축에 대한 묘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의 눈에 유교 엘리트들의 건축은 민중적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는 부정적 건축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크고 작은 민간의 살림집들이다.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건축 묘사의 거의 대부분은 살림집에 대한 것들이다. 왕조시대의 공공건축이란 민중을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한 반민중적 건축이며, 민중들의 건축이란 자신들의 살림집과 마을 공동체적 건축 – 성황당이나 상여집 정도에 국한했다. 따라서 민중의 삶을 그리려는 <임꺽정>에서 각종 살림집은 중요한 건축적 무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는 꺽정이 패의 근거지인 청석골 산채의 건축들이다. 매우 드물게 묘사되었고 묘사의 섬세함도 없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들이 아닐까 한다. 다른 건축들은 홍명희의 체험과 문헌에 근거한, 실존하는 건축들의 재현이지만, 청석골의 건축은 순수히 작가가 창조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건축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청석골 전체의 그림을 공간적이고 건축적으로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 소설을 더욱 사실적이고 풍부한 서사물로 창작되었을 것이다.
3. 공공건축에 대한 묘사
홍명희의 증조 홍우길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부 승목은 병조참판을, 부친 범식은 금산군수를 역임했다. 가문으로만 보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이며, 홍명희 자신도 정통 한학을 교육받은 유학자였다. 따라서 동헌과 같은 관청건물은 매우 익숙했을 것이며, 유학 교육기관인 서원이나 향교도 무척 친숙한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과 향교에 대한 묘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관아건축에 대해서도 봉산관아를 무대로 매우 짧은 장면만이 서술했을 뿐이다.
…….홍살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루 위에 폐문 소리 끝나갈 때 수교가 삼문 안에 들어와서 쌍창 열어놓은 동헌방을 바라보니 원님이 어디를 가고 자리가 비었었다. 수교가 동헌 마루에 올라서자 방에서 아이 통인 하나가 마주 나왔다.
‘안전껩서 내아에 듭셨느냐?’
‘아니요, 뒤 납셨소.’ (8권 110쪽)
홍살문(紅箭門)은 관청이나 향교, 왕릉 등 입구에 세운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문이다. 보통 관아의 정문은 2층 누각건물인데, 아래층으로 출입용 대문 세칸을 달아 삼문(三門)을 이루고 위층은 전망용 마루인 문루(門樓)가 된다. 관아의 중심건물은 사또의 집무실인 동헌(東軒)이며, 마루가 깔리고 옆으로 휴식용 온돌방이 붙은 구조다. 내아(內衙)는 사또가 기거하는 일종의 관사라 할 수 있다. 관아 특유의 건축 요소인 홍살문, 삼문, 문루, 동헌, 내아 등을 충실하게 언급했지만, 관아건축 자체에 대한 감상이나 느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이봉학이 잠시 소속했던 전주감영의 봉학이의 처소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자세하고 정교하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아 폐실로 남았던 곳을 수리하여 봉학이 이용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길고 자세한 건축적 묘사 부분일 것이다. 또한 단 방 2칸을 다루고 있어, <임꺽정> 전권을 통틀어 가장 소규모 공간을 묘사한 대목이다. 굳이 이 부분을 이처럼 자세하게 다룬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마치 사진과 같이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봉학이의 새 방은 아래윗간 사이를 장지로 막은 이칸 마루방인데 아랫간에는 골방이 뒤로 붙어서 쌍창이 앞으로 났을 뿐이나, 윗간에는 앞쌍창 외에 뒤되창이 더 있고 아랫간은 짚을 깐 위에 멍석을 깔고 멍석 깐 위에 기직자리를 깔아서 화롯불 피우고 낮에 앉고 이부자리 펴고 밤에 잘 만하나, 윗간은 마루청 위에 바로 기직자리를 깔아서 밑에서 나오는 찬바람만 막을 뿐이고 아랫간에는 등 뒤 벽장 위에 횃대가 걸리고 머리맡 벽 위에 감사가 준 환도가 걸리고, 또 발채 골방문 옆에 활과 전동이 걸리었으나 윗간에는 벽에 군데군데 대못이 박히었을 뿐이고 아랫간에는 방구석에 탁자가 놓이고 탁자 앞에 재판이 놓이고 재판 위에 촛대와 화로와 요강이 늘어 놓였으나 윗간에는 아무것도 놓인 것이 없었다. 아랫간은 자못 아늑한 맛이 있고 윗간은 밤낮 썰렁한 뿐 아니라 같은 방에 장지 하나 사이가 딴 세상같이 달랐다. (5권 315쪽)
<임꺽정>은 의도적으로 한반도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건을 구성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묘향산과 금강산과 같은 명산들이 등장하고, 그 명산에는 이름난 사찰들을 빠트릴 수 없다. 보현사, 유점사, 칠장사, 청룡사 등 여러 사찰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사찰들의 건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특히 안성 칠장사는 갖바치가 말년에 주석하면서 살아있는 부처로 숭배되었던 곳이며 꺽정이 일당이 중요한 사건을 일으켰던 장소였지만, 건축물에 대한 묘사는 찾아 볼 수 없고 단지 민중들이 애착을 가지고 자주 이용하던 민중적 장소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예외적으로 양주 회암사만 가람 전체의 배치와 모양이 정확하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제존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 뒤를 마쳐 거룩한 절이 제도가 굉걸(宏傑)하였다. 중앙에 보광전 다섯 간이 있고 그 뒤에 설법전 다섯 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사리전 두 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삼간 대청 한 채가 있고, 그 동서편에 동방장, 서방장이 각각 세 채가 있고, 동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삼 간이 있고, 또 서방장 서편에는 장경각 삼 간이 있고, 그 외에 불전과 종루와 승방과 객실이 즐비하게 연하여 간수가 도합 이백예순두 간이었다. (3권 243쪽.)
회암사는 고려말 조선초 대형 가람구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최근에 발굴조사를 완료했다. 발굴된 유적의 모습은 위에 그려진 <임꺽정>의 묘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거의 그대로 발췌 인용한 것이다. 이색은 회암사의 전성기였던 고려 말에 회암사를 방문하여 가람의 모습을 정교하게 기록했고, 후대에 파괴되고 매몰된 채 몇 백 년을 지난 오늘날 발굴을 했으니, 기록과 유구가 일치할 수밖에 없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쓰기 위해 여러 문헌들을 섭렵했으며 그 가운데 <회암사수조기>를 입수하여 저장했다가 적절한 시점에 사용한 것이다.
‘삼간 대청’은 이색의 원문에 ‘정청(正廳)’으로 되어있고, ‘장경각’은 ‘대장전(大藏殿)’이라고 되어있다. 정청이란 회암사 가장 깊은 곳,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왕실용 건물인데,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라 생각하여 풀어 쓴 것이다. 대장전은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며 ‘장경각’ 역시 마찬가지 기능의 이름이지만, 의미 전달이 더 잘될 것 같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불교사찰에 대한 상식이 풍부했다는 사실도 된다.
회암사 묘사가 문헌에 근거하여 규모 서술에 그쳤다면, 송악산 대왕당은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문간방의 외쪽 지겟문을 열고 내다보며….(중략)….. 위채 삼 간, 아래채 삼 간, 도합 여섯 간 집으로, 위채는 대왕과 대왕부인의 목상을 뫼신 이간 전각이 있고 전각 한쪽 머리에 단간 곳간이 있고, 아래채는 문간이 한 간이요, 서편으로 마루방이 반 간이요, 동편으로 방이 간반인데 마루방에는 북향으로 외쪽 지겟문이 있을 뿐이고 방에는 북향으로 쌍바라지가 있는 외에 문간으로 난 외쪽 지겟문과 동쪽으로 난 들창이 있었다….. (8권 78쪽)
마치 영화의 장면을 보는 듯,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듯 그려져 있다. 건물들의 규모와 관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문과 창까지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당집 -무속 신앙의 장소 -은 홍명희 당시의 일반적인 당집 사례를 그렸거나, 어떤 문헌의 내용을 발췌했을 것이다. 단, 서술의 방식이 회암사의 경우와 달리 구체적이어서 문헌을 따온 것이 아닌 듯하다. 아마도 홍명희 당시의 무당집들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또는 송악산 어딘가에 실재했던 대왕당을 그대로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타의 공공건축과는 달리 대왕당의 묘사는 ‘건축적 소설’의 차원까지 이르고 있고, 어딘지 애정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위정자들의 궁궐이나 관아, 민중 억압층인 유림들의 서원이나 향교, 민중에 기생하는 사찰 따위와는 달리, 민중의 애환과 소망을 담아내는 대왕당이라서 그러했을까? 평단의 지적대로 <임꺽정>이 민중사적 시각에서 민중의 생활사를 담아내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4. 살림집의 민중사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건축은 모든 사람들이 기거하고 생활하는 살림집이다. 살림집은 또한 한 사회의 건축문화를 형성하는 주류이며 생활상의 필요에 부응하는 기능적 건축이고, 그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기술로 만들어진 가장 토착적인 건축이다. 종교적 이상이나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지어진 공공건축물과 건축을 이루는 동력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살림집이 토속건축(Vernacular Architecture)이라면 종교적 정치적 건축은 고급건축(High Architecture)에 속한다.
민중의 삶을 그리기 위해서 살림집만큼 적합한 건축은 없다. 따라서 민중소설을 표방하는 <임꺽정>은 당연히 가장 중요한 건축 배경으로 다양한 살림집들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삶의 형태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듯이, 과거의 살림집들은 현재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었다.
공공건축은 소수의 지식인이나 건축가들의 창작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경주의 불국사는 김대성이라는 귀족건축가의 작품이며, 조선초 경복궁은 정도전과 권중화라는 사대부 관료가 설계한 작품이다. 반면, 수백만 채에 달하는 살림집들은 ‘건축가가 존재하지 않는 건축 (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이다. 살림집, 특히 하층민의 살림집의 건축가는 바로 그 사회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살림집의 형태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계층에 따라 독특한 특징을 가지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나타난다. 주거 유형론자들은 시대적 형식을 ‘주거양식’, 계층적 형식을 ‘주거형식’, 지역적 형식을 ‘주거형’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임꺽정>에 등장하는 살림집의 모습을 이런 분류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이 조선 전기인 16세기 중반이기는 하지만 건축 배경의 묘사는 19세기말의 상황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가장 오래된 소설로 평가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은 고려 말 개성을 무대로 하고 있다. 김시습은 자신의 시대보다 2세기쯤 전의 공간적 상황을 묘사하면서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고려 말의 살림집은 집안에 누각이 있을 정도로 도시적 밀집성을 반영했고, 부부 동거의 구조로서 자녀들은 별당채를 이용하였기에 이들을 연결하는 복도들이 발달했다. 부부 별거형이며 단층화되었던 조선 후기의 주택과 대조적이다.
<임꺽정>의 시대배경인 조선 전기의 살림집들은 대략 고려 말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조선시대 살림집이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였고, 이때부터 가부장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남녀유별, 장유유서 등 사회적 가치관이 주택의 형태를 바꾸게 된다. 홍명희는 <임꺽정>에서 조선의 정조를 그리려 했지만, 세부 사항들의 시대적 고증문제는 그다지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생활사에 대한 연구가 20세기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된 분야임을 감안할 때, 당시에 의식주와 같은 일상사에 대한 정확한 고증을 기대할 수는 없다. 홍명희가 추구한 ‘조선 정조’란 조선조 전체를 하나의 시대로 인식하여 전기와 후기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으며, 단지 외래문화에 대해 한국 고유의 문화를 부각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따라서 그가 그리고 있는 조선 정조란 그가 살았던 시대인 20세기 초의 전통적 일상에 기반을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림집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건축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계층이 다양하듯이 살림집도 계층적으로 다양한 형식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계층을 넘어 양반-중인-상민의 엄격한 계급적 신분을 가졌던 조선 시대에는 각 계급 고유의 주거형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학계에서는 권문세가나 양반층의 주택을 통칭하여 ‘상류주택’, 서울의 역관이나 상인층, 지방의 중농층들이 가졌던 주택을 ‘중류주택’, 그리고 소농층이나 소작인 서민들의 주택을 ‘민가’라고 부른다.
상류주택은 서울 인근의 고관대작들, 지방의 대지주 사대부층의 살림집을 포괄한다. <임꺽정>에는 특히 서울 대감가에 대한 묘사가 자세한데, 앞서 지적한 대로 홍명희 시대에 실존했던 최상류주택의 체험적 묘사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 한양의 대감가들은 고관 가족의 생활 뿐 아니라 사병조직에 다름없는 하인층들의 기거 장소, 각지에서 들어온 상납품들의 보관소, 세도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비밀회합의 정치적 장소로도 쓰였다. 따라서 안채와 사랑채는 물론, 행랑채, 광, 마굿간 등 다양한 시설들이 필요했다. 또한 서울에서 터잡고 성공한 가문답게 파종가로 승격하여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뒤안에 위치했고, 장성한 자녀들을 위한 별당채도 마련했다. 이 건물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외부공간으로 나뉘어지고, 각 마당들은 여러 중문들로 연결된다. 7권에서 노밤이가 길게 설명하는 원계검 판서의 살림집은 이러한 최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
그 집이 모교다리 북쪽 천변 첫골목 안 남향대문집인데 대문 안에 들어서면 하인청과 행랑방들이 있구 대문과 마주 난 바깥중문 안에 들어서면 잡잇간-마굿간-광 들이 있구 사랑 중문은 서편으루 꺽여 나구 안중문은 맞은편 층계 위에 드높게 매달려서 대문 밖에서 안중문이 곧게 들여다보입니다. 안중문간을 지나 들어서면 육간 대청이 남향으로 놓이구 안방은 동쪽이구 건너방은 서쪽이구 건너방 모퉁이에 사랑에서 드나드는 일각문이 있답니다. 안 뒤는 훨씬 넓어서 서편으루 사당방채가 있구 동편으루 별당채가 있는데 별당채는 안방 뒤 광채와 비슷한 줄에 서향으루 놓였답니다. 별당채만두 조그만 여염집만해서 안방이 이 간, 마루가 삼간, 건너방이 한 간인데 별당 안방이 곧 그 처녀의 방이랍니다. 앞으루 대문-바깥중문-안중문을 지나서 안 뒤에 있는 별당에까지 들어가는 건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구 …… (7권 176쪽)
꺽정이 패가 서울에 끈을 달고 있었던 층들은 장사치나 기생과 같이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비교적 탄탄한 경제력을 가진 이들의 주택은 서울의 중류주택들에 해당한다. 원판서의 딸로서 꺽정이의 첩이 된 원씨 부인을 위해 ‘간 수 적고 방은 많은 집’을 얻었는데, 규모는 작으나 되도록 많은 식구들이 살아야하는 중류주택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소문 안에 새로 산 집이 꺽정이가 거처하는 한온이의 집과 흡사하여 안에 안방-건넌방이 있고 또 밖에 바깥방이 있어서 건넌방에는 상직 할미와 아이년들을 두고 바깥방에는 행랑 사람을 들일 수 있었다. (7권 191쪽)
길에 면한 바깥채와 안 쪽에 놓인 안채, 두 채로 이루어진 집으로 최소한의 내외 분리가 이루어진 집을 묘사했다. 기생 소흥이의 집은 기역자 안채와 일자 아래채, 두 동으로 이루어져 규모는 좀 더 크지만 기본적으로 원씨 부인의 집과 같은 구조이다. 이러한 집들은 서울 북촌 일대에 많이 남아있는 이른바 ‘도시형 한옥’으로서 조선 후기에 번창하여 일제기와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지어졌던 소규모 기와집들이었다.
소흥이의 집은 기역자 원채에 안방, 안방 부엌, 대청, 건넌방이 있고 일자 아래채에 문간, 뜰아랫방, 광이 있는데, 서쪽 안방 뒤와 북쪽 대청 뒤와 동쪽 장독대 담 너머는 삥 돌아 남의 집이요, 오직 남쪽 아래채 앞이 실골목이다. (8권 235쪽)
그러나 역시 <임꺽정>의 주인공들은 백정, 머슴, 소작농, 등짐장수 등 하층민들이었고 그들의 주택인 ‘민가’는 이 소설의 건축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민가에 대한 묘사는 양적 질적으로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작게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두 칸 초막 따위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다지 묘사할 만한 크기도 설명이 필요한 복잡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류층 작가 홍명희의 체험적 한계 때문에 민가에 대한 묘사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박유복이 하루 밤 신세를 졌던 경기도 산골에 있었던 신불출의 집 묘사는 인상적이다.
양편에 단간방이 있고 중간에 토마루 한 간이 끼여 있고 한편 머리에 부엌이 붙어 있는 네 간 집인데 부엌 붙은 안방에만 등장불이 켜 있었다. (4권 71쪽)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중간에 토마루 한 간’이 끼여 있다고 한 대목이다. ‘토마루’란 나무널을 깐 마루가 아니라 흙으로 빚어 만든 개방된 방으로, 방과 방 사이에 끼어있어 마치 마루와 같이 사용되는 공간으로 경상도에서는 ‘토마리’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경상도 산간 지방에는 ‘도투마리집’이라는 아주 가난한 이들의 살림집 형태가 있다. ‘도투마리’란 옷감을 짜는 베틀에서 씨줄을 공급하는 실패로서, 양 쪽 방 사이 가운데에 토마루를 가져 신불출의 집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도투마리집’은 실패와 닮았다고 유래한 이름이기보다, ‘토마루를 가진 집’이라는 의미상 유래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림집, 특히 하층민의 민가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지역형들을 형성해왔다. 학자들마다 분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한반도에는 함경도형, 평안도형, 경기형, 영동형, 남부형, 제주형 등 크게 6개의 주거문화권이 존재했다고 본다. 제주를 제외하고 모든 지역을 순회하며 이야기를 전개한 <임꺽정>에서 모두 다루어야할 지역형 살림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형 정도만 묘사되었을 뿐, 나머지 지역형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1권 정도에 이교리가 유배된 거제도의 민가와 함흥의 장인집에 대한 간략한 언급 정도만 찾아볼 수 있다.
함경도형 민가는 이른바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이라는 매우 특별한 구조의 형식으로, 집안에 외양간이 있고 부엌과 방 사이에 벽 없이 터져 있어서 설명하고 묘사할 부분이 많은 집이다. 그러나 <임꺽정>에서는 ‘봉당이 있다’ 정도로 매우 피상적인 언급으로 끝냈다. 또한 이교리가 유배되어 기거했던 거제도의 살림집은
이교리의 거처하는 방은 단간이라도 간살이 넉넉하여 과히 좁지 아니하고 뒷들창과 앞되창을 함께 열어놓으면 바람이 잘 통하여 과히 덥지 아니하였다. (1권 27쪽)
라고 하여 남부형 민가의 일반적인 특징을 그리고 있다. 남부형 민가는 집의 깊이가 얕고 폭이 긴 홑집구조로, 바람을 끌어와 더위를 피하도록 앞뒤로 맞창을 뚫었다는 정도의 초보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다.
5. 홍명희의 민중건축 -청석골의 설계
의적, 혹은 도적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은 도적굴을 그들의 유토피아로 그리고 있다. <홍길동전>의 율도국, <수호지>의 양산박, <로빈 훗>의 샤우드 숲 등은 일종의 해방구이고 자치구로 묘사된다. 작가들은 그들의 이상향을 작품 속에서 설계한다. <임꺽정>의 해방구는 역시 청석골이며, 여타의 건축 묘사가 기존 건축물의 ‘재현적 인용’이라 한다면, 청석골은 홍명희가 스스로 창작 -설계한 건축적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청석골 전체의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부분에 산재하는 묘사를 모아 본다면, 첩첩 산중의 깊은 골짜기에 은밀하게 자리 잡았고, 가운데에는 두목들이 모여 의논하는 ‘도회청’이 있으며, 그 주위로 30~40여 채의 초막들을 짓고 도적들이 기거했다. 개개의 살림집도 삼 칸 정도로 작고 ‘소박한 건축’으로 설계했다.
소흥이가 광복산서 청석골로 온 뒤에 초막 한 채를 조금 변작하여 가지고 딴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집 밖에 울도 두르고 방 앞에 퇴도 놓았으나 원래가 초막이라 일자집 삼간뿐이었다. (9권 81쪽)
오가의 집은 사랑채를 새로 세워 산채에서는 가장 큰 집이 아닐까 한다. 사랑채 만해도 3칸 퇴집의 규모였다.
오가의 집에 전에 없던 사랑채를 새로 세웠는데 사랑방은 간 반통 이 간이요, 방 앞에 반 간 너비 퇴가 있고 방머리에 아늑한 구들까지 있었다. (5권 118쪽)
산채에서 유일한 공공건축이라 할 수 있는 도회청 역시 시골 들판 한 가운데 서있는 ‘모정’ 같이 간단한 구조였다. 그러나 꺽정이 패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복잡해져 두목만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가 되자 대대적으로 증축을 한 것 같다. 그러나 기둥과 지붕만 세우고 벽면은 뚫려있는 개방형 누각이라 할 수 있다. 두목들의 의논을 주변 졸개들이 볼 수 있도록 고려해서 설계한 ‘투명한’ 건축의 표본이다.
모정 같던 도회청을 그 동안 좀 변작하여 뒤와 좌우는 벽을 치고 전면은 양쪽에 난간을 드리었었다. 난간 중간은 오르내리는 층계인데 층계 위만 틔우고 난간 밖은 양쪽 다 휘장을 치고 대장 앉는 주홍칠한 큰 교의 하나만 남기고 그 외의 다른 교의는 다 치워 버리고 대청 안에 멍석을 들여깔고 멍석 위에 등메를 덧깔고 층계에서 ……. (9권 91쪽)
<임꺽정> 전권을 통해 묘사된 건축의 양이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고, 건축은 단지 배경과 상황으로만 다루어져 기대했던 ‘건축적 소설’이 되지 못했다. 또한 묘사된 도시와 건축의 형상이 소설의 무대인 16세기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쓴 20세기 초의 모습을 대입한 것이다. 특히 민중소설을 지향하면서 민중의 살림집인 민가들을 충실히 그려내지 못했고, 전국을 무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지역 곳곳의 민가들을 소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쉬움은 건축인인 필자의 시각일 뿐이다. 홍명희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건축은 ‘소박하고 투명한’ 건축이다. 그는 그의 이상적 건축을 청석골에서 설계했다. 하기야 민중의 건축에서 장엄한 미학적 감동이나 예술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건축이란 비바람을 가리고, 크고 작은 격차가 없으며, 비밀스런 음모나 작당이 없이 구성원 모두에게 공개된 곳이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홍명희가 꿈꾸던 민중의 건축일지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