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경계 -통로 -문
‘영역’은 ‘경계’를 가져야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있다. 대궐의 육중한 담장은 곧바로 대궐 영역의 경계가 된다. 서울 성곽은 옛 한양의 안과 밖을 구획하는 경계였다. 천둥산 박달재는 제천과 충주의 경계가 되고, 섬진강은 전남과 경남의 경계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경계도 있다. 동해의 한일 국경선은 지도상에 그려졌을 뿐 바다 위에 어떤 표시도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경계보다도 더 명확하고 엄격하여, 가상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었을 땐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찰의 안은 곧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며 불국토를 재현한 곳이다. 그 바깥은 가없는 고통의 바다이며 끝없이 윤회하는 무명의 세상이다. 사찰의 경계는 담장과 같은 건축물일 수도 있고 산이나 냇물과 같은 자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실상은 아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아니하든, 그 경계는 해탈과 미망을 가르는, 어느 경계보다 절대적인 경계가 된다.
안과 밖은 분리되면서도 서로 통해야만 서로 존재의 의미가 있다. 미망의 중생들을 해탈의 길로 이끄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며, 사찰 바깥에서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바로 그 종교적 상징이 된다. 경계는 둘러치는 것이고 통로는 경계를 뚫고 안과 밖을 연결한다. 바로 그 지점 -경계와 통로가 만나는 점에 ‘문’이 생긴다.
영역의 안을 개방하기 싫은 경계가 있다. 예를 들어 전기 충격장치까지 설치한 교도소의 높은 담,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운 중세 성곽의 성벽, 사냥개를 풀어 감시하는 범죄집단 우두머리의 아지트…… 여기에 설치되는 문은 대단히 견고하고, 내부자에게만 출입을 허용할 뿐 외부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닫혀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시설물들의 문은 “들어오지 말라”는 문이다. 회사, 학교, 관공서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기관장이 아닌, 바로 문은 지키기는 수위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문’이란 원래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등용문’, ‘취업문’, ‘좁은 문’, ‘학교 동문’ 등의 어법이 생기지 않았는가.
겹쳐져 열린 문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안으로 들어오라”고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문도 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늘 열려있는 문. 그건 바로 한국 불교 사찰의 문들이다. 우리 절의 문들은 아예 문짝을 달지 않는다. 그러니 구조적으로 닫는 것이 불가능한 문이다. 늘 열어둘 문을 왜 만드는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한 절에 3~4개 씩 겹쳐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절의 문들이 가진 수수께끼다.
문이 여러 개 겹쳐졌다는 것은 경계가 여러 겹이라는 말이 된다. 중국 고대 예법에 황제가 사는 황궁은 아홉 겹의 성벽을 쳐야하고 당연히 아홉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구중궁궐’이라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찰에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해탈문, 불이문 등 여러 문들이 있고, 한 사찰은 그 가운데 2~4개의 문을 설치하게 된다. 구중궁궐의 문들은 황제나 임금의 신변 보안을 위해 철저하게 닫힌 문들이지만, 사찰의 문들은 모두 열린 문들이다.
사찰의 내부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른 부처-보살-연각-성문들의 거룩한 세상이다. 게다가 이 성소를 호위할 신중(금강역사, 사천왕 따위 신들의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여러 겹의 보이지 않는 경계로 둘러싸인 곳이다. 따라서 여러 겹의 문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이 문들은 출입에 장애가 되면 안 되고 오히려 원활한 출입을 유도해야하는 이중성을 띠게 된다.
열린 문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건축적으로 이런 문들은 외부의 관심을 내부 출입으로 유도하는 장치가 된다. 특히 여러 겹의 문들이 겹쳐지면 더욱 확실한 동선을 유도한다. 합천 해인사의 진입부는 이런 겹침의 현상을 잘 활용한 공간이다. 산길을 돌아들어 일주문 앞에 서면, 일주문의 프레임을 통해 저 멀리 천왕문이 겹쳐지며, 그 사이의 외길 양 편으로 높은 측백나무들이 열 지어 서서 수목의 복도를 이룬다. 꽤 긴 거리이지만 사람들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가득한 호기심으로 천왕문으로 오른다. 천왕문에 서면 다시 한 단 위로 불이문이 보이고, 자연스레 계단에 올라 불이문으로 향하게 된다.
하기야, 거룩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단숨에 통과한다면 어떤 깨달음이 남을까? 차곡차곡 쌓여진 깨달음이 진정한 자유를 주듯이, 문들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구도의 원리가 아닐까?
일주문(一柱門)
한 쌍의 기둥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가장 간단한 구조의 문. 옆에서 보면 하나의 기둥 위에 지붕을 만든 것으로 보여 일주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첫 문이며, 보통 ‘OO산OO사’라는 현판을 달아 큰 문패의 역할도 한다. 보통 일주문이 놓이는 곳부터 절의 경계라 할 수 있다. 일주문 밖이 속계이며 문 안은 성스러운 곳인데, 이 문을 들어설 때 “하나의 마음에 귀의한다”는 교리적 의미를 가진다.
한 쌍의 기둥만으로 구조를 이루는 원초적인 문은 고대 세계의 공통된 형식이었다. 최초의 불교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인도의 스투파 주변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방에 문을 세웠다. 이 스투파의 사방문은 한 쌍의 돌기둥 위로 세 단의 돌판을 가로로 걸고 그 위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비롯한 서사적 이야기들을 조각하였다.
또한, 오래 전부터 중국에는 ‘파이팡(牌坊)’이라 하는 일주문 형식의 문들이 있었다. 동네 입구나 중요한 묘지와 사당 앞에 세워 성스러운 장소의 입구임을 상징하는 문이다. 아마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인도의 불교건축물들도 소개가 되었을 것이고, 스투파의 문 모습을 가장 닮은 중국 고유의 파이팡을 사찰의 입구에 세우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 파이팡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문으로는 ‘홍살문’을 들 수 있다. 이는 왕릉이나 종묘, 향교 등 제사를 지내는 유교적 시설물 앞에 세웠던 문으로, 불교에서는 이와 차별하여 좀 더 목조건물에 가까운 형태로 일주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도 이러한 형식의 문이 있는데, ‘도리이(鳥居)’라는 문으로 주로 신사의 입구에 세워 역시 성스러운 장소를 상징한다. 고대 아시아권에 나타난 이 문들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면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의 입구를 상징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일주문은 그 한국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일주문은 한 칸 크기의 단독적인 형태를 갖지만, 부산 범어사의 일주문은 4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워 3칸의 문이 연속된 독특한 일주문이다. 긴 돌기둥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긴 기와지붕을 얹어서, 마치 중국의 파이팡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금강문(金剛門)과 천왕문(天王門)
사찰 안은 보살, 연각, 성문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부처님이 설법을 하는 장면을 재현한 곳이다. 이들은 모두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분들로서 사찰 바깥의 윤회를 하는 세상과는 철저하게 구별된다. 이 설법의 성소를 호위하기 위한 특별한 존재들이 있으니, 이들은 곧 금강역사나 사천왕들로서 사찰에 들어와 방해하려는 많은 악귀와 잡인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금강역사나 사천왕들은 신중계에 속하는 천신으로서 아직 해탈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에 비하면 거의 무한한 수명과 능력을 갖고 있으며, 특별히 부처님을 호위하겠다는 임무를 자청하여 사찰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하늘은 33겹의 하늘로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한 겹인 사천왕천을 4명의 천왕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사천왕은 사천왕천의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는 4명의 천왕, 즉,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지칭한다. 이들은 각기 손에 비파, 칼, 탑, 창 등 고유한 무기를 든 장수의 모습으로 조각했다. 천왕들은 사찰의 문을 지키는 호위 수문신이 되어 천왕문에 봉안한다. 4명의 천왕을 문의 양 쪽에 두 명씩 봉안해야하기 때문에 천왕문의 두께는 보통 2칸이 된다. 따라서 보통의 천왕문은 3*2칸의 규모로 지어진다.
금강역사는 인왕역사라고도 하며, 원래 인도 전래의 신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해 사찰이나 탑의 입구를 호위하는 수문신이 되었다. 용맹한 얼굴과 근육질의 몸매로 무예를 하는 포즈를 취한다. 보통 두 명이 한 쌍을 이루는데, 한 명은 입을 벌리고 다른 한 명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은 첫 자가 ‘아’이고 끝 자가 ‘훔’이다. 두 역사들은 ‘아’와 ‘훔’, 유럽식으로 표현하면 ‘알파’와 ‘오메가’를 외치고 있어 진리의 시종을 전한다고 한다. 금강문 또는 인왕문은 보통 3칸으로 구성하여 가운데 칸은 통행을, 양 옆 칸에 각 1구씩 금강역사상을 봉안한다.
신중상의 크기가 커질 경우에는 문의 높이가 높아져야하고, 그 비례에 맞추어 넓이도 넓어져야 한다. 보은 법주사 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크기로 현존 천왕문 가운데 가장 높고 넓은 사례다. 물론 통로는 가운데 한 칸 뿐이다. 맞배지붕을 한 큰 규모의 외형은 매우 당당하여 뒤편의 팔상전과 조화를 이루고, 가운데 칸으로 통과하며 합장 배례하게 되는 천왕상들 역시 크고 출중하여, 진실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두 문이 동시에 세워질 경우, 위계가 낮은 금강문을 앞쪽에, 상대적 위계가 높은 천왕문을 안쪽에 건설한다.
해탈문(解脫門)과 불이문(不二門)
불교의 지상 목표는 해탈이며, 해탈문은 바로 번뇌와 해탈의 세계를 가로 지르는 경계에 세워진다. 이미 지나온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아직 해탈의 세계에 이른 것은 아니고 단지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해탈문 안은 각종 불전과 법당들, 승방들이 들어서 완전하고 영원한 자유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해탈문의 모습은 거창하지 않다. 해탈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가 아니고, 요란한 의복과 무기로 치장한 신중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이기에 어떤 표상이나 상징물도 봉안하지 않는다. 서산 개심사 해탈문은 누각 강당 한 쪽 옆 모퉁이에 한 칸짜리 작은 대문의 모습으로 다소곳하다. 해탈문은 윤회의 경계를 넘는다는 위치적 사실이 중요할 뿐, 문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큰 사찰의 경우에도 3칸 규모를 넘지 않는다.
문 자체로서 비교적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불이문이다. 불이(不二)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없음과 있음이 둘이 아니고, 공과 색이 둘이 아니다”라는 불교의 근원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불이문과 해탈문을 겹쳐 세운 절은 흔치않다. 대부분 두 문 가운데 하나의 문을 세우며, 둘 다 윤회와 해탈의 경계에 세운다는 점에서 교리적 의미는 같다. 단지 불이문을 지나면서, 불이의 깊은 뜻을 새기라는 교훈적 의미가 강하다. 그런 점에서 불이문은 문의 이름인 동시에 ‘불이법문’이라는 설법을 의미하기도 한다.
양산 통도사 불이문은 현존 사례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3칸의 구성이며, 좁은 양 옆 칸에는 판문을 달았고, 넓은 가운데 칸은 개방하여 통행로로 삼았다. 천왕문이나 해탈문들이 보통 맞배지붕의 소박한 모습인데 비해, 이 문은 화려한 팔작지붕을 가졌고 내부 공간도 특이하다. 대들보에 해당하는 부재를 호랑이와 코끼리 모습으로 조각하여 받혀서, 불이문이나 해탈문으로 드물게 장식적인 모습을 취했다.
웬만큼 규모를 가진 산사들은 진입로에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세워 그 진입 축을 선명하게 강조한다. 교리적 의미를 떠나서, 긴 산길을 걸어온 방문객이나 예불자들에게 지루함을 덜어주고 종교적 평안을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차량 출입이 일반화된 요즈음, 큰 사찰에는 주차장 입구에 산문(山門)이라는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대형 일주문을 설치하기도 한다. 차량 예불시대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문은 종교적 진리의 상징일 뿐이다. 선승들은 선의 깨달음을 “문이 없는 문, 즉 무문관(無門關)”이라 했다. 어떤 경계를 넘어 진리의 깊은 뜻을 깨우치려면 반드시 열고 들어 가야하는 문들. 사찰에는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수없이 많은 문들이 겹쳐있는 것이다.
희망사진
2. 해인사 일주문 -천왕문 사이의 길
3. 인도 산치 스투파의 정문 조각들
4. 중국의 패방 -우리 홍살문 -일본의 도리이
5. 범어사 일주문
6. 법주사 천왕문
7. 사천왕상
8. 금산사 금강문
9. 개심사 해탈문
10. 통도사 불이문/ 외관과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