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건축가는 다름 아닌 승려들이었다. 물론 신라시대 불국사와 같이 국가적인 사찰은 재상 김대성이 직접 관여할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특히 조선조와 같이 불교가 탄압받고 재정이 궁핍했을 때는 승단 자체 내에서 가람을 설계하고 시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찰건축의 설계에는 승려들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스레 불교적인 세계관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이란 어차피 건축가의 인격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사찰건축이 승려들의 생각 -궁극적으로는 승가에서 갈고 닦은 교리와 불교적 깨달음들이 표출됨은 당연한 현상이다.
모든 사찰은 일정한 경계를 기준으로 속세와 구별된다. 그 경계는 담장과 같은 인공물일 수도 있고, 개울이나 능선과 같은 자연물일 수도 있다. 경계의 가운데에는 천왕문과 같은 산문이 있어서 경외와 경내, 속세와 성계를 구획한다. 천왕문이나 금강문 등을 사찰의 경계로 삼는 것은 불교적인 세계관이 근거한다. 우선 천왕문의 사천왕이나 금강문의 금강역사 등은 불법을 외호하는 강력한 존재들로 가람 전체의 수문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대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주는 10개의 존재들로 구성된다고 했다. 가장 아래의 지옥부터 가장 위의 부처의 세계까지. 인간은 아래부터 5번째 존재이고, 사천왕이나 금강역사 등 천인들은 인간 위인 6번째 존재들이다. 그 다음이 성문-연각-보살-부처들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난 깨달은 존재들이고, 가람이란 다름 아닌 이들 4 성계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세계다.
깨달음의 세계를 형상화한 가람 내부는 당연히 부처를 모신 금당이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를 주불전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대웅전이나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등이 된다. 대승불교가 형성되면서 석가불에서 시작하여 아미타불 약사불 등 중요한 부처들이 개념화되더니 급기야는 천불 삼천불 신앙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부처님들은 모두 소중하여 한 건물 안에 같이 모실 수도 없고, 이론적으로는 같은 가람 안에 여러 부처가 있기도 어려웠다. 특히 대승계열의 여러 종파들은 서로 다른 부처를 주된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정토계에서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천태계열에서는 석가불을 모신 대웅전을, 유가계에서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나 용화전을 각기 주불전으로 삼았다. 비록 종파적으로 서로 다른 신앙체계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불교의 가장 큰 특성은 원융과 화합이다. 서로 다른 종파끼리 통합 교유하기도 하고, 다른 종파의 신앙을 습합하기도 하여 조선조의 통불교적 상황에 오면 거의 모든 사찰의 종파적 특징이 없어져 버리는 경향을 띄기도 했다.
어쨌든 하나의 금당이 결정되면, 주불전 좌우 뒤편으로 보살이나 성문들을 모신 부불전들이 배열되기 시작한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 부처의 16제자들을 모신 나한전 혹은 응진전,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모신 명부전 등 수많은 전각들이 부불전으로 자리잡는다. 이들을 보살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살전군 뒤쪽으로는 보다 작고 위계가 떨어지는 전각들 – 예를 들어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들이 자리잡는다.
가람의 가장 뒤쪽, 다시 말하면 가람 뒤산 바로 밑에 자리잡은 이 전각들은 신앙적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독성이란 중국 천태산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독성존자를, 칠성각은 도교신인 북두칠성과 북극성신을, 산신각은 우리나라 전래의 산신신앙을 불교화하여 수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 전각은 일종의 신중각으로서 불교 외의 토착 신앙을 불교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불경에도 나온다. “그 지역의 신을 존중하라”고. 유학이 승하던 조선시대 서산대사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설까지 주장한 적이 있다. 실제로 밀양 표충사에는 유교의 서원건물을 옮겨와 사명대사의 조사전으로 쓰기까지 했다. 불교의 포용력과 습합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현대 불교가 더욱 포용력을 발휘한다면, 기독교 신앙까지 가람 안에 습합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먼 훗날 불교사찰 안에 예수각이나 마리아각이 세워졌을 때, 불교 본연의 원융함을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전각들의 성격 뿐 아니라 가람 전체의 구성은 종파에 따라, 신앙체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엄종 계통의 사찰에는 마당 정중앙에 탑 한기를 배치하는 이른바 일탑식 가람형식이 유독히도 많이 존재한다. 이를 두고 화엄사상의 중심성 개념을 건축화한 것이라고도 해석한다. 정토종은 정토종대로, 천태종은 천태종대로 나름대로의 독특한 건축형식이 있었으리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불교에는 아직도 ‘밀교계 건축’ ‘선종계 건축’ ‘본원사계 건축’ 등의 형식을 따라 가람을 구성하기도 한다. 모두 소속 종파의 교리적 배경과 연관되는 건축형식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사찰은 단순한 예불처나 수행처가 아니라 그 자체가 불교의 근원적인 우주관과 교리를 표현하고 있는 거대하고 입체적인 만다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교리적 틀을 일거에 부정하는 사상이 불교 안에 있으니 바로 선(禪)이다. 선불교에서는 교(敎)로 표상되는 일체의 논리와 지식을 버리고 직관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지옥과 보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종파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교리를 가람 구성에 표현하려고하는 인간적 노력은 하찮은 비본질적 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선불교에는 일정한 건축형식을 가질 수 없다. 선불교 고유의 형식을 만드는 순간 선은 선이 아니라 교로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엄이던 정토던 무엇잉던지 받아들일 수도 있도 그 모든 형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선불교라 하더라도 재가신도들의 예불공간이 있어야하고, 불교 전래의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선불교 건축의 본질은 없음(無)과 공허함(空)이라 할 수 있다. 건축적으로 말한다면 구조체가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또한 일체의 도상이나 장식이 없는 미니멀한 형상과 공간을 의미한다. 이런 공간은 바로 승방건축에서 잘 스며있다. 선암사나 송광사의 승방들은 일체의 불필요한 장치들을 제거한 순수한 공간 그 자체이며, 건축적 선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의 기치를 들고 있고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현대 조계종의 현대식 사찰들이 생각해보아야할 근본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