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새로운 예술’이며, 21세기는 문화예술의 세기라 한다. 새로운 예술은 기존의 고정된 예술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체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예술 교육계는 19세기에 정착된 낡은 틀과 내용을 고수하고 있다. 예술 활동은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며, 예술의 틀과 내용은 사회 속에서 변화되고 전개되는 역사적 존재다.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예술, 문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예술가를 키워내는 교육이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예술계를 지원하는 학생들의 재능과 적성이 점점 낮아지는 현상은 한국 예술교육의 몰락을 경고하는 빨간등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예술계를 외면하고, 학부모들은 자녀의 예술계 진학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간혹 그러한 인재와 그를 적극 후원하는 학부모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 대부분은 조기 해외유학을 꿈꾸고 있다. 게다가 교육시장의 국제적 개방이 곧 현실화되면 대다수 국내 예술계 대학은 설 땅이 없어질 것 위험에 처해있다. 법학 의학계열이나 이공계열은 물론이고 연예계나 스포츠계까지도 우수한 청소년 인재들이 몰리고 있는 현상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예술 교육계의 최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내대학의 예술계열은 음대와 미대를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다. 음대와 미대가 동시에 개설되어 있는 대학은 몇 되지 않고, 대부분 예술대학 또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존재한다. 그나마 음미대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무용계열은 학과 차원에서 개설되거나, 아니면 체육학과 내의 한 전공으로 자리한다. 연극이나 영상계열 역시 비슷한 형편이다. 이러한 편제는 일반 종합대학교의 구색 갖추기용이거나, 한 분야의 특성화를 통한 대학 이미지 제고용에 불과하다. 아니면, 입시 때마다 수천명의 지원자가 몰려 신문을 장식하는 특정대학 특정학과와 같이 대학 선전용 또는 주요 수입원의 역할을 할뿐이다.
이처럼 고립 분산된 대학편제로는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의 내부적 교육만 가능할 뿐, 장르와 장르 사이의 통합교육이나 협력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 오로지 한 분야에 집중된 기능적 실기교육, 또는 교양적 수준의 이론교육만이 가능할 뿐이다. 현대 예술교육의 목표는 창작을 할 수 있는 예술가를 양성하는 길이다. 그러나 한 분야의 집중된 실기교육만으로는 급변하는 예술 문화환경을 주도할 창조적 예술가를 양성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교육이나마 제대로 시행하기에는 험난한 제도적 현실적 장벽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기존의 고등교육법은 인문계나 이공계 대학, 그나마 미군정 때 정착된 미국의 주립대학을 모델로 제정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 주립대학은 교양있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대중교육 기관이었다.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 교육에는 맞지 않는 틀이었다. 예를 들어 교육 연한을 4년으로 못박아 3년제 혹은 5년제 등 다양한 체제 운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일반계열 위주로 편성된 교양과정은 예술교육에 적합한 예술교양과정의 운영을 불가능하게 한다. 교육법 어디에도 예술교육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배려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교육부 또는 일반 교육계의 이러한 인식은 대학 운영에서 더욱 큰 현실적 장애로 나타난다. 일부 대학에서는 교과목을 이론-실험실습 과목으로만 구분하기 때문에 예술계 실기과목2-3시간 교육시수를 1시간으로 계산하는 등 철저하게 이공계의 기준을 따르고 있다. 또한 투자에 인색한 일부 사학에서는 최소 기준에 훨씬 못미치는 전임교수와 시설 기자재로 수백명의 학생들을 상대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10배가량 늘어난 전국의 영화관련 학과, 특히 지방대학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연기 학원인지 대학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열악한 교육환경과 제도적 조건 속에서 정상적인 예술교육을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이며,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간판 따는 곳 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제도와 여건은 최소의 교육 조건일 뿐이며, 예술교육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예술계와 교육자들의 안이한 인식과 풍토에 있다. 필자의 전공인 건축교육 역시, 일반 예술계 교육과 유사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때문에 건축계에서는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제시되며, 조금씩이나마 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예술계에서는 그 최소한의 자기비판과 개선노력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교육수요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합리적인 대안의 모색없이 20세기를 마감하고 말았다. 이 점이 예술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자신들의 장르와 전문 영역만을 고집하고, 그도 모자라서 대학 간의 파벌을 조성하고, 한 학과 내에서도 분파를 형성한다. 학생들을 독립된 교육의 주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몇몇 교수들이 이끄는 패밀리의 말단 조직원쯤으로 여기는 풍조도 있다. 어느 대학 무용과의 경우, 특정 교수의 무용단에 참여하지 않으면 무용계에서 매장당하고 만다는 풍문도 들린다.
실기교수는 예술이론을 쓸데없는 요식 과정쯤으로 치부하고, 이론교수는 실기나 창작과는 무관한 장식적 비평에 머무른다. 어떤 분야의 현대예술이건 이론적 근거없는 창작이 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실기와 이론 사이의 괴리는 더 커져만 간다. 예술 창작의 양 날개여야할 실기와 이론이 서로 배타적인 교육 현장에서 국제적 수준의 창작을 기대한다는 것이 망상이다.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타 장르와는 무관하고, 이론과 실기가 분리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입시 레슨 시장밖에 더 있겠는가? 사회적 여건을 탓하기 전에 교육의 주체들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유명대학 예술계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특정 라인의 레슨을 받아야하고, 다시 졸업해서는 레슨 시장의 공급자가 된다. 이 폐쇄된 순환 과정 속에서 제자들 역시 분파주의를 당연시 하게 되고, 예비 지망생들의 레슨 시장을 통해 파벌은 확대 재생산된다. 매년 입시철이면 연례행사와 같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예능계 입시비리는 이 폐쇄된 시장, 분파주의적 순환구조에서 늘 준비되어 있는 모순이요, 비리일 뿐이다.
우선 예술교육계는 제도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예술교육 관련법을 제정하든가 최소한 고등교육법에 예술교육 특별 조항이라도 신설해야 한다. 사립대학은 재단에 대해 정당한 투자와 배려를 요구해야 하고, 개별 대학의 힘으로 부친다면 전국의 모든 대학이 연대하여 추진해야 한다. 또한 당장이라도 예술교육의 현단계를 진단하고 창조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대학, 다른 장르의 구성원들이 서로 포용하고 합심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분파주의의 구조 속에서는 불가능한 희망들이다. 분파주의의 근저에는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소아적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분파주의 속에서는 건강한 자기비판도 공동의 합리적 대안모색도 불가능하다. 작년 말 국립예술대학교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예술계의 갈등과 대립의 심연에는 이 가공할 분파주의가 꿈틀대고 있었다고 본다.
정보통신 사회가 도래하여 전통적 예술의 형식은 도전을 받고 있다. 현재와 같이 고답적인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고집하는 한, 예술의 수용자인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무역장벽이 제거되고, 모든 분야가 자유경쟁 체제로 전환되는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우리의 예술교육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제는 소비적인 집안 싸움에 집착하지 말고, 사회와 세계의 도전 앞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다.
21세기를 맞아 예술교육의 일대 변혁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개혁의 방향은 통합적이어야 한다. 장르와 장르 사이, 이론과 실기 사이, 전통과 첨단 사이, 대중과 고급예술 사이에 존재해 왔던 낡은 장벽을 철거하여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을 창조해야 한다. 모든 개혁과 변화는 역시 사람이 주도한다.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주체들이 변화해야한다. 분파주의, 그리고 그 확대판인 집단 이기주의를 청산하고 공동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