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줍잖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상건축의 편집주간을 맡은 지 3년, 책머리에 에디토리알을 쓴지도 그만한 횟수가 지났다. 어떤 호에는 시사적인 내용이, 때로는 원론적인 내용이, 그리고 간혹 개인적이고도 낭만적인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달걸이를 하듯 적지 않은 고통 끝에 내놓은 것들이어서 모아 놓고 보면 그때 그때의 사연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항상 궁금한 것은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주변의 반응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잘 아는 그들은 내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어있는 나를 읽기 때문에 늘 이해하고 동조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가 제거된 글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의 반응이 중요하다. 이들의 반응은 주로 인테넷을 통해 감지된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나 문체를 시비하는 이메일을 내게 직접 보내는 이들은 전혀 없었다. 대개 내용과 관련된 싸이트에 올라온 의견을 누군가가 접속하고 알려준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응은 나와 일대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내 글을,때로는 나를 비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우리 건축계의 지적 편향성을 다룬 글에서 유학 희망자들이 소위 미국의 최고대학에만 편중되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우연히 건축 유학 관련 싸이트에서 발견한 글에서 “무얼 가지고 최고라고 하느냐? 당신도 최고대학을 나온 주제에 최고를 찾아가려는 유학생들의 부푼 꿈을 짓밟을 수 있느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류의 글에는 늘 “어떻게 그런 이가 교수를 할 수 있느냐?” 따위의 공격도 따른다. 하나하나 변명할 이유는 없지만, 글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공격에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시사적인 문제에는 더욱 반응이 민감하다. ‘천년의 문 취소 사태’나 ‘2001년 건축대전 시비’에서는 어설픈 양비론을 비판하면서 어느 한쪽의 의견에 찬성했다. 찬성을 받은 쪽에서는 내 글을 자신들의 선전문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반대를 받을 쪽에서는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천년의 문 사업 자체를 반대했던 필자의 태도를 “문화부 산하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한 문화부의 하수인 김봉렬의 작태”라는 황당한 비난도 있었다. 또 건축대전 시비에서는 자칭 해당학교 학생으로부터 “괜찮은 학자인줄 알았더니 경망스럽고 한심한 X”이라는 욕설도 들었다. 필자도 감정이 있는 이상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내 글을 읽어주니 다행이다 정도로 넘어간다.
물론 우호적인 반응도 많고, 이런 반응을 접하면 우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새건축사협회 문제로 젊은 층의 방관을 비판했더니, 그 비판에 분발하여 젊은 건축가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늘었다는 말에는 일종의 동지애를 갖게된다. 가짜 석굴암 계획에 대한 강한 성토 때문에 학계 선배들로부터 야단을 맞았지만, 또 다른 선후배들로는 대단한 격려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이나 칭찬은 결국 독자 자신들의 희망을 투여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내 글이란 자신들의 의견을 정당화할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보람을 느낀 적도 있다. 한 잘 생긴 청년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한국에서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건축학교에 유학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늘 유럽 유학 희망들에게 스페인행을 권해왔던 터에 건축 최초의 스페인 유학생을 만나 너무 반가왔다. 특히 왜 나를 찾아왔느냐?는 대답에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저기 쓴 글을 보고 – 이상건축 에디토리알 유학편에도 같은 주장이 실려있다 – 스페인 유학을 결심했으며, 실제로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해보니 내 충고가 너무 고마워서 잠깐 귀국 길에 인사하러 왔단다. 나의 글이 알지 못하는 젊은이의 귀한 인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기쁨이었다.
건축계는 수많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설계실무, 시공, 공무원, 학계 등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신분, 다양한 연령들이 서로 갈등하고 뒤섞이고 화합하면서 건축계가 유지되고 있다. 그 수많은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더 이상의 콩가루 집안은 없을 듯 하지만, 그 모두는 각자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는 있다. 다양성의 이해가 복잡계의 활성화를 위한 첫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만이 최선이고, 나의 글이 보편성과 대표성을 가진 공식적인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비난이나 칭찬도 수용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면, 그 어떤 반응도 믿고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주체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만으로 복잡계는 발전하지 않는다.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갈 때, 이른바 협동효과, 공명효과가 일어나 전체의 발전을 촉진시킨다. 자신의 삶에는 최선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무에는 나태하고 게으르면서 남의 삶과 생각을 비난해봐야 자신 뿐 아니라, 건축계 전체의 손해만 가져올 뿐이다.
이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상건축 에디토리알 집필을 마치려 한다. 그 동안 읽어주신 소수의 독자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어느 분이 이 페이지를 계속하실지 모르지만, 한편의 평론으로인해 비판과 질타가 난무한다면, 그것이 바로 복잡계 글쓰기의 최고 반응이라 여기고 분발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