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잡기 – 건축의 절반
너무나도 유명한 안동 하회마을에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산을 넘으면, 흰 백사장과 푸른 소나무 숲 뒤로 병산서원이 홀연히 나타난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가문이 일군 씨족마을이며, 이 가문의 영웅은 임진왜란 때 전쟁수상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다. 병산서원은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일종의 사립대학이며 동시에 유교의 성전이다. 하회와 병산과의 사이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적인 이야기들은 생략하겠지만 이 역사적 장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간과할 수 없다. (자세한 연구는 울산대 건축학과에서 발간한 <병산서원 – 건축적 이해>를 참고하실 것).
한국의 뛰어난 고전건축은 지형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전제되어 있다. 좋은 터를 잡는 작업 자체가 좋은 건축을 벌써 반 쯤 이룬 것이 된다. 병산서원의 터는 경승 중의 경승이다. 풍수지리적인 해석이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서원의 누각에 올라 맑은 눈으로 바라다보자. 깍아 지른 듯 우뚝 선 앞의 병풍 같은 산(병산)을 끼고 평면적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백사장. 서원에 딸린 작은 마을만 있어 인적이 드문 환경 속에 서원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터는 주거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앞의 병산이 너무 높고 급해서 강물을 빨리 흐르게 함으로써 소위 “밀개형”의 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살림집을 지으면 재물이 쌓일 틈이 없다. 그러나 빨리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하는 교육시설로는 안성맞춤의 터가 된다. 대개 뛰어난 서원들이 위치하는 곳의 지형은 공통성이 많다. 우선 인적이 드믄 곳. 학문과 수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대단히 감탄스러운 경치를 가진 곳. 지루한 유학의 경전들, 규범에 꽉 짜인 학교생활에서 틈틈히 여유를 찾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자연만으로 좋은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지형과 자연 가운데 무엇을 취하고, 또 어떤 방법으로 건축을 형상화 시킨 것인가? 가 고전적 가치를 지닌 건축들에서 배울 바이다.
‘건축’의 재정의 – 부분과 전체의 문제
병산서원은 철저하게 내부 중심적인 건축이다. 쉽게 말하면 밖으로 드러나는 인위적인 외관이나 자연 속의 형상보다는, 내부의 공간과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관들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여기서 ‘건축’ 혹은 ‘내부와 외부’에 대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한국의 ‘건축’이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한국건축에서 건물이란 방과 같이 무성격한 구성 단위이며 부분일 뿐이다. 예를 들어 병산서원의 강당 건물은 규모나 형태나 공간구성면에서 다른 서원들과, 더 나아가 불교사원이나 양반집의 사랑채와 다를 바가 없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개성은 건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과 건물들의 집합의 방법 – 바로 이것이 한국의 ‘건축’이며, 건물이라는 부분들이 모인 전체만이 병산서원에 건축적 성격을 부여한다. 따라서 건축의 외부란 서원의 담장과 대문 밖의 환경을 말하는 것이며, 내부란 실내공간이 아닌 서원 영역 안의 모든 실내와 실외 공간의 집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들을 부정한다면 한국건축의 특성과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
바깥에서 서원을 바라본다면 전면을 길게 가로막고 있는 7칸의 만대루 만이 눈에 들어올 뿐 뒤편의 건물군은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때문에 서원건축의 올바른 감상법은 바깥에서 건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의 환경을 투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원건축의 외형은 전부가 들어나지 않는다. 중요 건물을 시각적 종점으로 설정하고 끊임없이 시선을 유도하는 불교건축이나 궁궐건축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교사원이나 궁궐건축은 진입하는 입구에서부터 건물들이 계속 중첩되는 장면들을 만나게 되고 최종적인 목표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대중적인 개방성 혹은 가시적인 권위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 건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면 서원건축은 대중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으며, 소수의 선택된 유학자들만이 건축의 주인이다. 그들은 내부에 소우주를 경영했다. 그 닫혀진 소우주 속에서 외부의 환경을 어떻게 끌어들이는가가 서원건축을 구성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의심스러우면 실험을 해 보자. 외부에서부터 진입축을 따라 내부로 진입하면서 대하는 장면들을 분석해보자. 대문, 만대루, 강당, 사당 등의 독립된 건물만이 장면화될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당에서부터 출발하여 되돌아 나오며 만나는 장면들은 앞건물과 뒷건물이, 건물군과 외부의 자연환경이 어울어지는 중첩적 장면들로 연속된다. 병산서원의 구조는 전적으로 내면적이며 외부투시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병산서원의 개개 건물은 그다지 우수한 것이 아니다. 강당과 사당은 192,30년대에 중건된 것으로, 오래된 건물이 갖는 고졸함이나 공예적인 치밀함이 없다. 탁월한 개념으로 구성된 만대루 역시도 구조적인 기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물며 다른 건물들이야 평가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부분의 평범함들이, 기술의 미숙함들이 전체로서의 건축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의 정의를 부분들의 집합성에 둔다면 건물이란 단위이며 디테일이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의 전체 배치는 중심축에서 벗어난 사당 영역의 위치로 인해 비대칭적이다. 유교적 규범에 충실한 서원건축 치고는 매우 이례적인 구성이다. 반면 부분영역들의 구성은 엄격한 대칭을 이룬다. 강당 영역, 사당 영역, 서어비스 부분인 주소영역, 심지어 장판각과 전사청 영역까지 모든 부분들은 대칭 구조를 갖는다. 부분적 대칭과 전체적 비대칭성의 절묘한 조화. 이 뛰어난 구성에 더불어 각 부분간의 자연스러운 연결과 분절, 그리고 지형의 높이차를 경탄할 만큼 완벽히 흡수하고 있는 수직적 구성. 이러한 전체성이 병산서원의 건축적 실체인 것이다.
외부환경 끌어안기
7칸의 기다랗고 텅 빈 만대루. 외부의 관찰만으로는 이 누각의 존재의의를 알 수가 없다. 왜 이곳에 이러한 누각이 서야 했는가는 강당 대청에 앉아 -바로 이 자리는 한세기 전까지 서원의 원장들이 앉았던 자리이다 – 밖을 내다보아야만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서원 맞은 편에 전개되는 백사장과 강과 절벽의 경승은 만대루의 구조 프레임에 의해 분할된다. 만대루는 건물이 아니라 자연을 분할하여 화면에 담는 7폭 병풍이다. 병풍의 끝은 인식되지 않는다. 동재와 서재 두 건물의 끝을 덮고도 남을 만큼 길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7칸의 누각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규모를 알 수 없는 무한한 시각의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만대루의 높이는 매우 계산적으로 설정되었다. 아래층 피로티로는 대문과 사람들의 출입이 보인다. 2층 마루와 처마선 사이로는 강물의 흐름이 보인다. 지붕 위로는 당연히 병산의 절벽이 보인다. 만대루의 층고와 높이는 인간-강-산이라는 외부 환경을 3단으로 정확히 분할하도록 조절되어 있다. 그만한 길이와 그만한 높이를 가지고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건물들의 창호는 외부로 통하는 시각적 통로이다. 병산서원의 창호들은 뚜렷한 시각적 목적을 가지고 계획되었다. 내부로 향하는 창호들은 유생들의 학습과 생활, 지원시설의 활동 등을 감시하기 위한 기능적인 목적으로 계획되었지만, 외부로 향하는 창호들의 위치와 형태는 묘하다. 서재 뒷면과 강당 서쪽벽에는 높은 위치에 기다란 들창들이 설치되었다. 좌식의 실내생활에는 맞지 앉는 창호의 구성이다. 방안에서는 일어서야만 들창에 닿을 수 있고, 들창이란 열고 닫음에 그다지 편리한 것도 아니다. 외부의 관찰로는 이 들창들의 비밀을 풀 수가 없다. 역시 방 안에 들어가 들창을 들어올리고 무엇이 보이는가를 보아야한다. 모든 들창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타나는 것은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이다. 이 산은 붓 모양 (文筆峰)으로 생겨 학자들이 애호하는 산형이다. 연이어 있는 다른 산들이나, 가깝게 보이는 마을과 백사장의 근경을 삭제할 수 있는 만큼의 폭과 두께와 높이를 가지고 설치되었다. 만대루가 외부 경관의 병풍틀이라면, 이 들창들은 경관의 액자틀이다. 입면의 모양새를 위해 창을 만드는 인습 속에서 병산서원의 건물과 구성을 이해하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노력인가? 한국건축을 고전으로 받아 들이려면 ‘건축’이라는 개념을,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환경’과 ‘건조물’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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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1>.
앞산 절벽에서 본 병산서원의 전경 : 매우 짜임새가 있는 구도임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장면은 날아다니는 신선만이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설명을 위한 참고 자료일 뿐 현실의 장면은 아니다. 건축은 신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으로 본다면 서원은 강당영역 (아래 왼쪽) – 사당영역 (가운데 위쪽) – 서어비스영역 (아래 오른쪽)의 3영역이 서로 고립된 점적인 집합으로 보이지만, 실재로는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체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전체의 구성은 매우 비대칭적인 것으로 읽혀지기 쉬우나, 인간은 전체보다는 부분 부분을 체험하며, 그 부분들은 매우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역시 신선의 눈에도 강당영역 전면을 가로지르고 있는 만대루의 형태가 눈에 띨 수 밖에 없다. 이 사람들은 왜 저렇게 이상한 건물을 만들었을까? 또 강당 앞 좌우의 건물들 (동재와 서재)은 평행으로 배열되지 않고 앞이 좁아지도록 비틀어져 있다. 왜 건물들을 비틀어 놓았을까? 기술이 없어서일까? 무관심일까? 신선의 눈에는 모든 것이 궁금하게 보인다.
(2-1. 앞에서의 전경) + (2-2. 뒤에서의 전경)
지나다니는 외부인들도 병산서원이 어떤 건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서원 앞을 길게 막고 있는 7칸의 만대루 때문에 내부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 어떤 공간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누각만이 보일 뿐이다. 서원은 뒤 나즈막한 화산의 능선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 이 건물이 만약 불교 사찰이었다면, 이러한 외부적 폐쇄성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뒤 편의 중심이 되는 주건물들이 두드러져 참배객을 깊숙히 유인했을 것이다. 같은 경사지를 다른 방법으로 이용한 것이다. 병산서원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건축이 아니다.
반면, 서원 내부에서의 경관은 매우 중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건물과 건물이 중첩되어 지붕선의 실루엩들이 집합되며, 그너머로 앞의 강과 산이 어울어진다. 병산서원의 외관은 매우 폐쇄적이지만 내부에서의 경관은 개방되어 있고, 건물과 건물을,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다. 병산서원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건축이다.
3. 만대루에서 본 강당
한국건축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수법이지만, 누각의 지붕과 난간으로 트리밍된 틀 속으로 강당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유쾌하다. 강당과 누각은 별개의 건물이 아니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건축에서 건물은 중성적인 방의 성격을 갖는다. 건물과 건물의 관계에서만이 고유한 성격을 부여받는다.
또 불교사찰과 비교한다면, 뒤산과의 관계 역시 대조적이다. 사찰의 대웅전 뒤 산은 항상 노출되어 건물과 일체를 이룬다. 서원에서는 강당을 시각적으로 앞으로 끌어 당겨 뒤 산을 은폐한다. 자연적인 초월성 보다는 인륜과 학문의 힘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만큼 불교와 유교의 세계관은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4. 강당인 입교당의 모습. + 5.서재의 모습
입교당 건물은 1921년 크게 고쳐 보수하였고, 일제기의 기술을 반영하듯 그다지 정교하지도, 감탄할 만큼 대범하지도 않다. 그러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적정한 비례와 자체적인 완결성을 취하고 있어 매우 안정되어 있다. 평범해 보이는 파싸드의 구성에는 강력한 의도가 숨어있다. 방-대청-방으로 이루어지는 몸체의 구성은 實-虛-實로 나타낼 수 있다. 반면 기단부는 양 편에 큰 개구부 (아궁이)를 두고 가운데에 두개의 계단을 돌출시켰다. 기단부의 구성은 虛-實-虛로 나타낼 수 있다. 허체(void)와 실체(solid)가 수평적으로 교차 반복하는 구성은 다시 수직적으로도 교차 반복한다. 물론 방 아래에 아궁이를 두기 때문이고, 대청에는 아궁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능 때문에 생겨난 우연한 구성이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아궁이를 이처럼 전면에, 그것도 과장된 크기로 표현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계단의 표현적 괴체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허와 실의 집합이라는 구성적 단위를 유추할 수 있다. 허와 실이 결합되어야만 하나의 완결된 구성 단위를 이룬다. 방이 있으면 마루가 있어야 하고, 건물이 있으면 마당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이며, 근본적으로는 일체화된 요소들이다.
작은 건물 서재에서도 허와 실의 집합적 단위는 여실히 드러난다. 작고 비경제적인 대청의 존재.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이 집의 형태는 매우 답답하게 보일 것이고, 출입 동선에 큰 무리가 따르게 된다. 그리고 대청이 없다면 좁은 방의 내부 공간은 더욱 좁게 느껴질 것이다.
6. 만대루의 내부 + 7. + 8.
서원에서 가장 큰 건물. 그러나 텅 비어있다. 기둥과 지붕과 바닥만 있는 아주 아주 비기능적인 건물이다. 겨울에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건물. 강당 대청에 앉아 앞 마당과 앞산을 바라볼 때만이 이 건물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 만대루는 자연을 담는 병풍이다. 기둥과 바닥과 지붕으로 이루어지는 프레임이 액자 틀과 같다면, 7폭 연속된 그림은 병풍이 되며, 그래서 앞산 (屛風山)에 걸맞는 건축적 장치가 되는 것이다. 만대루의 7칸이라는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서재 사이가 더욱 넓었다면 9칸도, 11칸도 되었을 것이다. 마당을 덮겠다는 의도, 그래서 무한한 길이 속에 자신의 존재를 비물질화 시키고 대상이 되는 자연의 경관만을 남기겠다는 의도가 여실하다.
만대루의 높이는 어떻게 정해졌는가? 역시 강당 대청에 앉아 자세히 바라다 보라. 만대루 2층 바닥과 지붕 사이로 멀리 강가의 백사장과 낙동강의 흐름이 들어온다. 일체 다른 경관은 삭제되어 있다. 지붕 위를 쳐다보라. 우뚝 가로막은 산의 형상만이 보인다. 아래 층을 보라. 대문이 들어오고 그 속을 통과하는 사람의 행위가 포착된다. 만대루는 수직적으로 사람과 강과 산의 존재를 독자화 시키도록 위치와 높이를 정한 것이다. 이제야 알겠는가? 만대루의 존재 이유를, 그리고 그것의 역할을. 만대루의 형태와 규모와 위치와 칫수는 외관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의 경관을 위한 순수한 틀로서만 존재한다.
9. + 10.
방안에 두 개의 창이 나란히 있다. 왼쪽의 문같이 생긴 것은 분명한 창이다. 흔히 한국건축에는 창과 문의 구별이 없어 창호라 한다고 하는데, 매우 그릇된 상식이다. 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다. 이처럼 높은 턱을 가진 곳으로 출입할 수 있는가? 방안에서 앉아 생활하는 소위 좌식 생활의 습성 때문에 창턱이 낮아졌을 뿐이다. 앉아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문의 크기와 비슷해 졌을 뿐이다. 그런데 옆 벽의 들창은 왜 이리 높은가? 그리고 왜 옆으로 길쭉한가? 입면 효과 때문인가? 좌식 생활에는 전혀 맞지 않는 높이와 형태를 가진 창이다. 여러 궁금증은 일어서서 창을 들고 밖을 쳐다 보아야만 풀릴 수 있다. 멀리 아스라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정교한 사진틀이다. 창을 높게 냄으로써 근경은 삭제하고 원경만을 취한 놀라운 발상이다. 저 산은 문필봉 (文筆峰)이다. 붓 모양을 닮은 산을 쳐다보면 문장 실력이 늘게되고 학문이 깊어진다. 이런 주술적인 내용 말고도, 학문에 지친 심신을 일으켜 가끔 저 잘생긴 산을 쳐다본다면 얼마나 청량해질까. 이러한 비일상적인 자연의 체험. 이것이 이 들창의 존재 이유이다. 이 들창은 건축의 부분적 요소라기 보다는 엄청난 주제를 담고 있는 큰 그릇이다.
11.+ 12.
동재와 서재는 옛스런 모습의 창문을 가지고 있다. <사진11>의 살창은 전면에 나 있는 것으로 하인방 부재를 벽속에 감추어 상인방에 창틀이 매달려 있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창살의 듬성한 비례가 묵직한 두께의 창틀과 잘 어울린다. <사진12>은 <사진10>과 같은 들창의 외관이다. 상인방과 하인방 사이에 창얼굴을 대고 그 사이 적당한 높이에 창틀을 달았다. 외관의 세련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이 창은 건물의 뒷면, 담장 사이 사람의 통행이 없는 곳에 설치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방안에 서서 창을 통해 쳐다보는 산의 모습만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고풍스러움이란 우연히 얻어진 세월의 훈장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과 효과적 수법이 빚어낸 의도된 결과이다.
13.+14.
병산서원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서재이다. 서재 큰방에는 소위 영쌍창이 달려 있다. 영쌍창이란 두짝으로 구성된 창으로서 가운데에 문설주가 설치된 창이다. 두짝 문이 견고하게 잠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알려졌고, 18세기 이전에만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기능과 역사를 차치하고라도, 이 유형의 창은 상이한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닫혀있을 때는 독립된 두개의 창이 나란히 달려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가운데 설주가 두꺼워 마치 가는 벽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열어 젖히면 전혀 다른 모습의 경관이 만들어진다. 경관 프레임의 가운데를 가르는 묘한 구성이다. 서재에서 영쌍창을 통해 본 맞은편 동재의 모습. 내부 마당의 경관이란 이처럼 대칭적이어서 자칮 지루해지기 쉽다. 영쌍창의 트리밍과 프레이밍 기법은 이 지루함을 흥미로 바꾸어준다.
15. + 16. + 17.
강당영역의 마당은 매우 인간적인 스케일이다. 작은 동서재가 강당 좌우를 호위하며 그 앞을 긴 만대루가 막고 있다. 아담하면서도 꽉 짜인 구성. 그 사이로 터진 다음 영역으로의 통로들. 동재는 서재와 평행으로 놓이지 않고 앞쪽이 좁게 틀어져 놓여있다. 그럼으로써 만대루의 막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동시에 강당 쪽과 만나는 부분은 벌어지게 된다. <사진16>. 사당 앞에 마당이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동선과 시선을 유도하는 효과를 거둔다. 이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어긋남이다. 사당이 서원 전체의 중심축상에 놓이지 않고 강당 동쪽에 놓임으로써 병산서원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비대칭적이며 유기적인 구성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자연히 강당 동쪽벽과 사당문 앞에 배례와 의식을 위한 마당이 설정된다. 우연을 가장한 또 하나의 계산을 만난다. 후기 서원들의 매너리즘과 형식적인 구성과는 다른 건강함과 긴장과 유기적 자연성이 곳곳에 스며있다.
18.+ 19.
전사청에 이르는 중문 <사진18>과 서원 소속 노비들의 서어비스부인 주소에 이르는 중문 <사진19>이다. 앞의 것은 4기둥이 있어 한칸을 이루는 일칸문이고, 뒤의 것은 두기둥만으로 지붕을 받치는 일각문이다. 전사청은 제사용 음식을 다듬고 보관하여 제사상에 올리는 중요한 곳이다. 같은 편문이라도 담겨진 기능과 신분적 위계에 따라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
20.
서원 정면, 대문 앞에 설치된 측간. 이처럼 아름답고 해학적인 화장실을 본 적이 있는가? 70년대 서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수와 정비와 복원을 핑계로 20세기 한국인들이 과거 유적에 손을 대면 댈수록 유적을 망가뜨린다는 누군가의 지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측간은 20세기 최고의 작품이다. 병산서원의 우수함은 과거에만 그치지 않는다. 서원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좁은 농로 뿐이다. 외부 관광객들이 접근하기에 쉽지가 않다. 서원 마을에는 위락 편의시설이란 전혀없다. 요란하지 않게, 관광지화를 거부한 정비 작업의 의도였다. 서원의 장소성과 은둔성을 보존하려한 후대의 노력에서 고전 보존의 한 모범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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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께>>
추가해야할 사진의 앵글
<사진1> 앞산 절벽에서 찍은 서원의 전경
<사진2-2>. 사진은 사당 문 앞에 서서 강쪽을 향하여 지붕들이 겹쳐지도록 촬영할 것.
도면 리스트
*동봉한 보고서에서 <그림-1>은 16쪽의 (그림9) / <그림-2>는 17쪽의 (그림11)/
<그림-3>은 20쪽의 (그림12)/ <그림-4>는 27쪽의 (그림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