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2.08.07.
출처
통도사 잡지
분류
건축문화유산

1600여년에 걸쳐 전개된 한국불교의 역사가 복잡한 만큼,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가람들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연과 건축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3면을 정면으로 하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건물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3노전제로 운영되는 통도사의 복잡한 배치형식을 어느 절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통도사는 통도사일 뿐이듯이, 다른 절들도 역시 다양한 건축적 개성들을 가지고 있다. 100roml 사찰이 있으면 100개의 건축형식이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의 연기설에서 말하듯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고, 건축의 형식들이 다르다면, 그 다른 이유와 필연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전북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유명한 모악산 금산사에서 불과 4km도 안 떨어져 있는 곳에 귀신사 혹은 국신사라 부르는 작은 가람이 있다. 금산사의 유명세에 가려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신라시대 ‘화엄십찰’의 하나로 창건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화엄교학의 터전을 연 이후 그의 제자들은 전국에 퍼져서 수많은 화엄사찰들을 건립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10개의 사찰을 ‘화엄십찰’이라 이름이 붙여졌고, 화엄사 부석사 해인사 갑사 범어사 불국사 등 지금도 대단한 가람들이며, 현재는 거대한 절터만 남아있는 서산의 보원사가 포함되어 있다. 귀신사가 이러한 쟁쟁한 사찰들과 함께 화엄십찰의 하나였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화엄십찰이라 이름붙은 사찰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그 지리적 위치들이다. 통일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는 물론 경주를 중심으로한 일대 지역이었다. 공통적으로 화엄십찰에 속하는 사찰들은 중심지역을 벗어난 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부석사는 옛 고구려와의 경계지역에, 해인사와 화엄사는 옛 백제와의 경계에, 불국사와 범어사는 왜(일본)과의 경계지에, 그리고 갑사 보원사 귀신사 등은 아예 백제 고토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명칭은 화엄십찰이지만, 실제로 수용한 신앙은 화엄이 아닌 아미타신앙(부석사), 정토신앙(불국사), 미륵신앙(범어사) 등으로 범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통일 전쟁까지 신라사회를 이끌었던 신앙은 원광법사나 자장율사로 대표되는 계율학이었다. 통조사의 개산조인 자장율사는 계율을 세움으로써 신라사회를 강력한 왕실국가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계율의 실천을 위해 통도사 계단을 설치하고,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일사불란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자장이 주창한 계율사상은 분단시대 신라의 중요한 국가적 신앙적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세나라의 통일이 된 이후에 국가적 과제는 분열되었던 민족문화를 하나로 합칠 수 있는 통합적 사상이었고, 모든 불교를 포용하는 화엄학이야 말로 통합의 불교로서 신라의 국가적 신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화엄불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분열의 갈등이 가장 심했던 옛 고구려나 백제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포교활동을 벌였고, 그 가운데 지역적 핵심 가람들이 후일 화엄십찰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 백제 왜와의 경계에 중심 사찰들을 세움으로써 신라 정부의 보위에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통합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복속되었지만, 여전히 옛 백제민들은 정서적 사상적으로 신라를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모악산 일대에는 미래불 신앙이 신라정부에 대한 비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다분했다. 귀신사는 이러한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세워지게 되었다.
지역적 반발이 심했던 만큼, 귀신사 창건은 신라 정부나 의상계 화엄종에서 직접 간여하게 된다. 재원도 경주에서 조달하고, 건축가들도 경주신라의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사상적 배경 뿐 아니라, 건축과 기술마저도 신라의 문화를 고스란히 백제 땅에 재현한 결과가 되었다. 과거에는 신라계와 백제계 건축에 차이가 있었으니, 신라계 건축은 하늘로 솟는듯한 수직적인 형상이요, 백제계 건축은 대지에 밀착되는 것 같은 수평적인 모습이었다. 아마도 두 지방의 지형적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귀신사 건물들은 임진란 이후의 것들이지만, 가람배치법이나 건물의 칸살잡이에는 신라적인 속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을 뒷산의 경사지에 자리잡아 두 단의 높은 석축을 쌓아 터를 닦았다. 아랫단에는 대적광전이, 윗단에는 이른바 백제계 석탑의 모습이 다분한 석탑이 세워져 있다. 아마 윗단에도 가람의 한 영역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입구에서 대적광전이 있는 주영역으로 진입하려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경사지를 단계적으로 이용하는 진입법과 대지조성법은 철저하게 신라적인 양상을 보인다. 금산사에 보았던 평지성과는 대조적인 수직성이 강한 방법이다.
대적광전 (보물 826호)은 크지 않은 규모지만 5×3칸의 칸살을 갖는다. 내부에도 두줄의 고주를 세워서 내부공간이 수직적이며 답답한 감을 준다. 기둥 간격은 매우 좁아서 한칸에 문 2짝을 겨우 달 수 있는 크기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불전이라면 전면 3칸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를 5칸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다. 따라서 전체 건물은 좁고 높은 수직적 형상을 가진다. 마치 경북의 송림사 대웅전을 축소한 것 같은 모습으로, 건물만 놓고 본다면, 영낙없는 신라계 건물이다.
그러나 귀신사를 창건했던 정치적 목적은 실패하고 말았다. 신라에 대한 이 지역의 반감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화엄신앙에 대한 미륵신앙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얼마 후에 중창된 진표율사의 금산사에 이 지역 사상계의 주도권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신사의 건축적 전통은 계속 이어져서, 조선 후기에 중창된 대적광전에서도 수직적 구성의 신라계 흔적이 반영되었다. 이미 조성된 가람의 틀과 입지와 터에 맞추어야 했던,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던 결과일 것이다. 귀신사 가람의 배치법에서, 남겨진 건물의 구성원리에서 천년전의 치열했던 사회적 갈등을 읽을 수 있으니, 건축은 시대의 흔적을 간직하는 증표요 그릇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