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항상 신선하다. 직접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발랄함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고, 비록 낯선 젊음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열정과 고민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건축을 매개로 만나는 집단에서는 기성 건축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미덕과 가치를 발견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에 젊은이들과의 여행을 즐겨해 왔다.
그러나 최근 접했던 여행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들은 희망보다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고 장래를 비관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이럴진대, 다른 대다수 젊은 건축인들의 방황과 좌절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면 더더욱 우울해진다.
그들의 고민과 불안은 두 가지다. 건축에 대한 열정은 누구 못지 않은데, 현실적인 상황은 매우 열악해서 의욕을 꺽는다는 것이다. 설계로 돈벌기는 포기하라는 자조가 실제임을 알기 시작하면서 좌절은 증폭된다.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급, 사회에서 고립된 설계환경, 부정과 부패의 고리 속에서 진행되는 생존경쟁 등이 그들을 좌절케 한다. 그나마 대부분은 그런 열악한 직장마저 잡지 못해 백수로 떠돌다가 전업하거나, 사정이 좀 나으면 정처없는 추방성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설계시장이 점점 냉혹한 적자생존의 정글로 변해가고 있는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이들의 경제적 고통도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건축계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 영역을 넓히고, 공정 경쟁을 통해 정당한 보수를 확보하지 않는 한, 작업 환경은 개선될 여지가 없다. 개인의 열정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고쳐지지도 않는 구조적 모순들이다. 이러한 19세기적 문제는 19세기적 해법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단결하라, 쟁취하라, 그 전에 인내하라.
더욱 근본적인 불안은 과연 자신이 건축가로서 재능이 있는가, 어려운 여건을 참고 이겨내면 언젠가 뛰어난 건축가로서 꽃필 날이 올 것인가? 라는 존재론적 고민이다. 개인의 창의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20세기 심리학계의 최대 쟁점이었다. 천재적 재능이란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교육과 훈련을 통해 키워질 수 있는 것인가? 설계 과정 속에서 누구나 겪는 갈등들이다. 반짝이는 영감이 어느 날 갑자기 근원도 없이 솟아나 훌륭한 작품을 창조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최근 심리학계는 장기간의 과학적 관찰을 통해 창의성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팔라디오나 꼬르뷔제 같은 극소수 천재들의 선천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 대부분은 적지 않은 창의적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잠재력만 발현해도 현실세계에서는 충분히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근대까지의 천재란 일반영역 전반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이들을 의미했지만, 최근 가드너(H. Gardner)등의 연구에 의하면, 특정 영역의 우수자가 다른 영역에서도 반드시 우수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특수 영역에 능력을 가진 자가 그 특수 영역에 종사할 때 창의성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선택한 진로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길인가?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이른바 적성이란 자신이 흥미를 느끼고 집착하는 분야이고, 거꾸로 그 분야에 대한 창의적 잠재력이 없다면 그러한 흥미를 지속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지적 도전과 모험심, 끈기와 호기심, 개방적인 열정과 몰두, 모호함에 대한 인내, 광범위한 흥미, 아이디어 즐기기 등이 바로 자신의 적성과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항목들이다. 만약 숱한 날밤 세우기와 경제적 쪼들림에도 불구하고 설계와 건축에 대한 이러한 태도들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적성에 맞고 창의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니 확신을 가져도 좋다.
또 다른 교육 심리학자 헤이스(J. R. Hayes)의 연구는 매우 의미심장한, 동시에 고통스러운 복음을 전한다. 그는 음악분야에서 창의적 업적을 남긴 고전 작곡가들의 예를 들면서, 그들이 명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시기는 적어도 10년 이상을 작곡 활동에 몰두한 이후였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를 건축으로 번역한다면, 모든 건축에서 기술과 지식의 축적은 중요한 요소이고, 건축가로서 성공하려면 건축을 실현하는 도구와 기법, 추진력, 이론적 지식들을 습득하고 숙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숙달을 위해서는 선언적 지식과 과정적 지식이 모두 필요한데, 그런 지식들을 습득하려면 장기간에 걸친 공부와 연습, 그리고 시행착오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년 이상의 끈기있는 수련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각과 결단, 정열과 확신이라는 내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결론을 맺는다.
요약하면 이렇다. 경제적 결핍과 사회적 열등감 때문에 견딜 수 없으면 건축에 대한 창의성이 부족하고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온갖 현실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건축은 곧 자신의 길이고, 창의적 능력도 충분하다는 보증이다. 그리고 젊은 날의 고생을 수련의 과정이라 여기고 10여 년을 투자하라. 결과는 40대에 나타난다. 방황하는 젊은 시절에 원했던 건축의 꽃을 피우고 인생의 과실을 맺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