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8.11.09.
출처
건축학회
분류
건축비평

문화와 소비 사이에서 – 미술회관, JS빌딩, 문화공간

대학로의 건축사
동숭동의 대학로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전신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이 있던 장소다. 지금도 남아있는 문예진흥원 청사는 최초의 근대적인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경성제대 본관으로 당시의 건축적 흔적이다. 1970년대 중반, 서울문리대가 관악산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대학부지는 단독 주택지로 쪼개져 분양되었고, 본관을 포함한 중심지역만 공공문화지역으로 지정되어 현재의 ‘마로니에 광장’이 되었다. 문예진흥원 청사와 미술회관 문예극장의 3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공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머지 지역은 모두 개별 자본의 처분에 맡겨진 채, 불과 20년 동안 급속하게 변화되는 건축물들의 진열장이 되어왔다. 이 지역의 역사적 장소성이나 지리적 위치에 비해서 심할 정도로 공공성이 약화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마로니에 광장에 세워진 두 개의 건물만해도 건축가 김수근의 건축 외적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 척박한 환경이었다.
70년대 말에 ‘문화예술’의 장소로 시작한 이 지역은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대중문화’의 장소로, 그리고 ‘소비와 상업’의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건축물의 변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70년대 말까지는 원래의 조성목적에 충실하게 상류층의 단독주택들이 도시조직을 이룬 가운데, 문예진흥원의 세 건물 외에는 아키반 사옥 (김석철 작)이나 토탈디자인사옥 (문신규 작) 정도가 예외였을 정도였다. 대학로변에는 김수근의 샘터사옥과 해외개발공사가 자리잡아, 김수근 풍의 붉은 벽돌집이 아니면 이 지역에 입주할 자격이 없는 듯했다. 예의 토탈사옥이나 오감도 등이 충실히 재료의 규범을 따랐고, 아예 전돌사라는 벽돌회사 건물이 자리잡았을 정도다.
80년대 들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대학없는 대학로에는 대학생들이 모여 들었고, 차없는 날을 정한 이 도로에 10대 청소년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동의 국립극장을 잃어버리고 갈곳을 찾아 시내를 전전하던 군소 연극단들이 대학로의 문예소극장을 중심으로 둥지를 틀기 시작하니, 뚜레박소극장 등 근린생활시설의 지하실을 이용한 소극장들이 생겨났다. 단독주택들이 들어설 자리는 이미 청소년 상대의 파스타집이 있는 상가건물이 점거했고, 기존의 단독주택들도 10년도 채 안돼 헐리거나 용도를 바꾸어 장년층을 상대로한 음식점이 되었다. 프랑스 바로크시대의 주택풍인 뚜레박빌딩 (김기석 작)을 비롯하여, 지금은 철거됐지만 대칭적 구성과 포스트 모던류의 원형 페디먼트가 화제됐던 두손빌딩 (김석철 작), 붉은 벽돌 일색의 이 동네에 최초의 본격적인 반기를 든 JS빌딩 (조건영 작), 그리고 대중문화의 전당이기를 자처한 동숭아트쎈타 (간삼건축 작)가 동네 깊숙히 자리잡았다.
90년대 동숭동은 본격적인 소비공간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압구정동이 오렌지족 나라라면, 동숭동은 금귤족의 동네였다. 마로니에 광장은 아이돌스타를 꿈꾸는 10대들의 야외공연장이 되었고, 소극장 운동의 메카였던 옛 주택가는 포르노연극의 논쟁장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문예극장과 미술회관, 동숭아트쎈타들은 중고급문화를 고수하고 있다. 모든 가벼움과 무거움, 대중과 순수, 소년과 장년이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화해하는 특수 지역으로 자리매김됐다. 현재 대학로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다. 90년대의 건축물들도 그렇다. 마법의 성이나 LA 퍼브가 등장했는가 하면, 텍사스 고속도로변의 까페 또는 지중해 연안의 민속적 레스토랑이 선보이기도 한다. 간판으로서의 건물군들은 상업시설이라는 용도면에서, 그리고 키치와 팝건축이라는 현대적 경향으로 이 동네의 경관을 당당히 이루고 있다. 반면, 건축적 아우성과 가벼움을 비판하는 듯, 당대의 건축가들은 곳곳에 묵시록과 같은 작품들을 심어놓았다. 메타사옥 (이종호 작), 무애빌딩 (정기용 작), 문화공간 (승효상 작)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건축적 다독을 통해 동숭동의 건축문화사를 읽는 것은 피상적인 전체 줄거리를 파악할 뿐이다. 하나의 건축물이 지역 환경을 만들 수 있는가, 혹은 건축이 먼저인가 아니면 경제적 여건과 문화적 성향이 건축을 지시하는가 등의 중요한 문제는 몇 텍스트를 정독하고 분석함으로써만 해답을 얻을 수 있다. 3개의 건물을 선택한다. 70년대 말의 미술회관, 80년대의 JS빌딩, 그리고 90년대의 문화공간 빌딩이다.

미술회관 – 환경조성자의 역할
김수근의 건축을 말할 때 70년대는 커다란 전환점이다. 60년대의 노출 콘크리트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표현 재료로 벽돌을 선택하여 많은 조형적 실험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공간사옥을 시작으로 서울 사파리 클럽, 서울대 예술대학, 덕성여대, 마산성당, 경동교회, 심지어는 고층 오피스 건물인 한양사옥까지도 벽돌치장으로 감쌌다. 이들 변화를 단지 벽돌이라는 재료의 변화에만 한정해 바라볼 수는 없다. 근대건축의 모뉴멘탈리즘과 부르탈리즘을 극복하고 좀더 인간적인 스케일로 다가가기 위한 시도였고, 노출 콘크리트의 조소적 표현성을 탈피하여 본연적인 내부공간을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가 동숭동에 세운 4개의 벽돌건물들 – 미술회관과 문예극장, 샘터사옥, 해외개발공사 들은 비록 개인적 취향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혜화동 성당 (이희태)나 성베다교회 등과도 잘 어울리는 전통적인 재료요 형태였다. 그보다도 이제는 사라져버린 대학 캠퍼스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연상을 일으키기에 벽돌은 최상의 재료였다.
애초부터 전지역을 단독주택지로 분양하려던 계획은 문화계의 주장에 따라 수정되어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일부분에 대학문화의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로서가 아니라 문화애호가로서 김수근의 역할이 지대했다. 마로니에 공원 주변에 3필지를 가지고 있던 그는 그 땅들을 흔쾌히 기부함으로써 이 장소를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예술의 전당과는 달리 정부나 행정기관의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진흥원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관주도로 이루어졌다. 어찌보면 주거전용지역 안에 순수 예술시설을 삽입하려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가장 먼저 건설된 미술회관은 이 지역의 환경조성자로서 역할을 해야했다. 공원의 공간을 형성하기 위해 기다란 붉은 벽을 세운다.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문예진흥원 사무실동과 전시동, 2동의 건물을 상부에서 브릿지로 연결하고 그 하부를 뚫어냄으로써 중첩하는 두면의 벽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벽은 뒷산의 낙산시민아파트의 경관을 가리기도 하고, 뒷길에 붙어 지어졌던 단독주택들과 공원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격자형의 창문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변화와 통일성을 동시에 얻는 데도 성공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연결부 하부의 뚫려진 부분이 뒷길로 통하지 못하고 차단되어 결국 1층 화장실로 가는 안내벽으로 전락한 점이다.
현재도 미술회관이 없는 마로니에 공원은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미술회관의 전면 벽이 이 외부공간을 형성하는 힘은 대단하다. 공원의 동쪽면 전체를 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압적이지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면들을 적절히 분절 중첩시키고, 중성적인 개구부의 형태나 돌출된 벽돌 줄들의 중성적 장식들이 이른바 인간적인 척도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 공간들에는 상반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아래 위 2개층으로 구성된 전시장 사이에는 아무런 연계성이 없고, 전시장 내부의 빛의 변화나 공간적 다양성도 없다. 미술 전시장에 필수적인 라운지나 모임의 장소도 없다. 단지 60여평의 사각 창고와 같은 전시홀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외벽의 건축적 가치에 반하는 내부공간의 방기 현상은 연이어 세워진 문예극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대 시설이 불충분한 대극장은 연극 음악 어느 한 장르에도 적합치 못한 어정쩡한 공연장이 되어 버렸고, 어둡고 답답한 로비공간은 대극장이라는 명칭이 과장될 정도다. 김수근의 두 작품은 오로지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외부공간을 조성하는데만 성공했다. 자칫 도심 속의 주거지역으로 조성될 뻔한 이 지역에 문화와 예술, 만남과 자유의 불씨를 지피는데 성공한 두 건물 – 정확하게는 두 벽면을 바라보면서 건축적 요소가 장소를 만들 수 있다는 위력을 실감한다. 그러나 공원과 건물의 관계는 차단적이다. 문예극장의 로비가 공원으로 개방되지 않음으로써, 애초에 의도한 ‘광장’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내부공간의 지원이 없는 광장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두 건물의 벽면을 경계로 내부에서는 순수예술이, 외부에서는 대중예술과 소비문화가 공존하는 혼성적 장소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JS빌딩 – 건축적 상품
미술회관 이후에 이 지역의 건축들은 알게 모르게 김수근의 단편들을 닮아갔다. 그것도 환경 전체에 대한 생각보다는 벽돌이라는 재료와 장식적 재주만을 답습했다. 최초의 반기는 두손빌딩이었다. 흰 본타일로 마감하고, 좌우 대칭적 입면 중앙에 반원형 페디먼트를 이고 있었던 이 건물은 대학로의 획일적 색채와 재료에 대한 거부였고, 드디어 예술연하던 이 지역에 본격적인 소비시설이 상륙했다는 신호였다.
미술회관과 문예극장이 섰지만, 배후의 문화생산기지가 없는 문화란 겉치레 예술애호가들, 딜레땅뜨들의 모임터가 될 뿐이다. 깊이있는 예술의 생산과 감상 대신, 딜레땅뜨들은 일상적 소비의 담당자들이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주택들은 속속 식당과 카페 등 가벼운 소비시설로 용도를 변경했고, 더 이상 이 지역은 주거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비는 문화를 낳는다. 다국적 패션과 오렌지족의 나라 압구정동의 뒤안에는 화랑가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신촌과 홍대앞의 피카소거리는 젊은 층의 신흥 소비지로 지탄을 받았지만, 그 철없는 소비지에서 이미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기수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대학로가 소비지역으로 바뀌면서, 서울 시내를 떠돌던 소극장 팀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그들의 연극이란 문예극장에 올려질 수 없는 영세하고 대중적인 공연이었다. 순수예술을 향유하려 애를 썼던 딜레땅뜨들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예술에 몰입하게 되었다. 예술적 평가와는 별개로, 80년대 대학로는 대중적 연극과 라이브 컨서트의 메카가 되었다. 소비는 대중예술을 낳고, 대중예술은 소비시장을 더욱 확산시켰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의 초기에 조건영은 JS빌딩을 설계했다. 대학로의 전면 코너에 세워진 이 건물은 마치 ‘대학로의 소비전용지역화 선포 기념물’을 보는 듯 하다. 건축가 스스로 이 건물을 ‘상품’이라 규정지을 정도였다. 예리한 삼각형의 계단탑이 하늘을 찌르고, 놏루도니 철골조의 구조틀과 투명한 유리벽들의 날카롭고 기하학적인 건축이다. 장중하고 엄숙하며, 수공예적인 기존의 붉은 벽돌집들과는 전혀 다른 건물이었다. 재료와 구조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집들이 기성문화를 상징하고 순수문화를 고집하는 것이라면, JS빌딩은 신세대의 소비행위를 수용하고 상업문화를 옹호하는 건축이다. 두터운 벽으로 맊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는 벽돌집과는 달리, 이 건물은 내부의 먹고 마시는 행위가 바깥 대학로에 그대로 노출되고, 그럼으로써 외부의 잠재적 소비자들을 안으로 유인한다. 이 집이 무엇을 하는 집인지가 금방 읽혀지는 건물 자체가 간판인 셈이지만, 조급한 상점들은 또 다시 외벽에 간판들을 닥지닥지 붙여 나갔다.
조건영은 간판이 필요없는 건물, 상업적 시설로서의 최고 상품을 의도했다. 여기에는 다분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존재한 장벽, 소비문화 자체에 대한 옹호 또는 부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깔려있다. 그는 포장하는 건물, 위장하는 건축을 혐오하는 것 같다. 이미 상업화되어 가고 있는 동숭동의 공연들이 순수예술로 포장되고 있는 위선들, 또는 순수예술 자체가 동숭동의 대중들과 유리된 채 겉돌고 있는 괴리들, 소비와 유흥을 마음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억압적 분위기들 모두가 조건영에게는 비정상적인 문화상들이다. 이런 점에서 JS빌딩은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소비와 유흥이 이른바 순수예술에 못지 않는 중요한 현대 문화임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상업건축들의 상업성이란 대중성 일회성 유행성을 내용으로 한다. JS빌딩도 얼핏 본다면 대중적이고 일회적이며 유행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극히 엘리트적이고 실험적이다. 또한 대학로의 또 다른 건축적 유행을 일으킨 선도적이며 조작적인 건축이다. 성공한 대중음악의 작곡자나 가수들은 절대 대중이 아니다. 그들은 고도로 계산된 조작 속에서 자신들의 음악이 가질 수 있는 대중화의 성공 여부를 가름한다. 또한 대중적 유행을 생산하고 조장한다. JS빌딩의 대중성 상업성에는 이중의 야유와 비판이 숨겨져 있다. 하나는 위선적인 순수건축들에 대한 야유며, 다른 하나는 예상할 수 있는 상업적 건축들의 포장과 저질성에 대한 비판이다.

문화공간 – 비판과 애정의 침묵
JS빌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선도적인 건축이다. 90년대 수없이 세워진 이 지역의 상업건들은 부끄러워 하거나 주눅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상업성을 당당히 자랑하고 건축 자체로서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그 자신감을 심어준 최초의 건축은 JS빌딩으로 기록될 것이다. 지나친 자신감들은 중세 유럽의 고성부터 지중해의 낭만, 미국 서부의 경박함, 껍데기 디컨스트럭션의 위장 첨단까지 온갖 문화의 파편들을 이 지역에 재현해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
이제 대학로의 문화를 주도하는 것은 순수예술이 아닌 대중 소비문화이고, 막대한 소비문화 때문에 소수의 순수예술도 숨쉴수 있다. 미술회관과 문예극장이 90년대의 상업건축을 양산했지만, 거꾸로 이들 상업건축들이 미술회관의 존재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역전된 관계다. 대학로의 거대한 소비구조는 문화의 소비, 예술의 소비까지 감싸안을 정도로 성장해 버렸다. 90년대 대학로의 상업자본은 문화와 예술이 소비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을 직시했다. 더 이상 문화와 소비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족적임을 인정하고 절충하기 시작했다.
승효상의 문화공간은 건물 이름부터 역설적이다. 문화의 거리, 예술의 동네에 새삼스럽게 무슨 ‘문화’공간인가? 이 건물이 보는 동숭동이란 문화의 껍데기와 쓰레기로 가득한 곳이며, 진정한 문화를 키우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80년대의 JS빌딩의 5층 모두가 상업시설인 반면, 이 건물은 지하의 극장과 1층의 까페, 상부의 화랑 등 매우 복합적인 기능으로 설계됐다. 문화와 소비, 예술과 상업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의 융합을 암시하는 구성이다. 비단 이 건물 뿐 아니라 90년대에 탄생한 많은 건물들의 일반적인 기능 구성이기도 하다. 상업 속에서 예술이 자라고, 소비 속에서 문화가 창조된다. 이 현실적 메카니즘을 스스럼 없이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기 이른 것이다.
문화공간이 취하고 있는 문화와 소비의 화해 전략은 매우 도시적이다. 노출된 직선계단이 지하부터 지상 4층까지의 모든 기능을 연결시킨다. 비록 하나의 건물 안에 갇혀 있지만, 각 층의 시설들은 모두 독립된 개별공간이고, 마치 독립건물들이 가로에 의해 연결되는 도시적 구성과 같이, 상승하는 가로 (계단)에 의해 개별공간들은 관계를 맺는다. 이 건물의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매스와 형태들 역시 내부 개별공간들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문화공간’이란 어쩌면 이 상승하는 가로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극히 현실적인 이 건물이 동숭동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다분히 노출 콘크리트라는 묵직한 재료와 절제된 형태에 있을 것이다. 서로 자신들의 맵시를 뽑내고, 현란한 간판으로 가득찬 아우성 속에서 침묵하는 자세로 내려다보고 있는 문화공간은 결코 우호적이라 할 수는 없다. 이 건물의 모든 구성이 도시에 대해 열려있고 모든 통로가 동네에 개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접근을 꺼려할 정도로 위압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건축적 침묵과 함께 대중들의 소란함도 이 집에서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침묵은 대학로의 대중적 건축을 꾸짖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애정이 짙게 깔린 경청해야 할 목소리가 있다. 소비와 문화, 상업과 예술의 화해란 이런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