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8.04.01.
출처
코리아나
분류
건축역사

현대 미터법의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4km’보다는 ‘십리’가 거리감이 있고, ‘600g’보다는 ‘한근’이, ‘2L’보다는 ‘한되’가 더 친근하고 계량감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미터법으로 환산된 거리-무게-부피의 단위가 전통적인 크기는 물론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터법에 따라 20L를 ‘한말’로 정한 부피 단위 ‘말’은, 조선조 세종 때는 5.96L, 일제 강점기 때는 18.04L로 시대에 따라 다른 크기였다.
전통적 부피 단위의 대표적인 것이 홉-되-말로 정착된 이른바 두승(斗升)법이었고, 곡식이나 액체 가루같은 물질들을 가늠하기 위한 계량법이었다. 다른 먹거리와는 달리 유독 곡식들에 두승법을 적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원래 한되(升)는 장년남자가 두손을 모아 거기에 담기는 곡물의 양을 일컫는 단위였다. 일년간 피땀흘린 노력의 대가로 추수한 햇낱알들을 소중하게 두손에 퍼올리며 기쁨을 누리던 고대인들의 심정이 그대로 계량단위가 된 것이다. 한되의 1/10을 한홉, 10배를 한말, 100배를 한섬(石)으로 정해 모든 부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만큼 다른 단위들과는 달리 일상생활의 근본이 되고, 가장 소중한 단위로 애용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식의 계량법이 들어오고, 국제적 통일단위인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두승법의 체계는 혼란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곡물상들은 다섯되를 한말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되는 대두되였고, 소두되의 2배였으니 지금 세대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어떤 계량단위도 결국 그것을 측정하는 용기에 따라 실제로 측정된다. 두승법 역시 한홉, 한되, 한말을 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홉과 되박은 정사각형 평면의 입방체로 만들어지고, 말은 원통형의 나무용기로 만들어졌다. 쌀이 한말 정도면 무게도 8kg에 달해, 입방체형 용기로는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서 이내 마구리가 터져버리기 때문이었다. 되나 말의 형태는 무척 아름답다. 정확한 측량을 위해서는 기하학적 지식을 동원해 완벽한 형태를 만들어야 했고, 또한 온갖 목가공 기술을 동원해 견고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용기에 담겨진 곡식의 윗면을 평으로 깎느냐 (이른바 평두법), 아니면 불룩하게 남기느냐 (고봉두법)에 따라 한말의 부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어수선한 사회에서는 고봉두법이 일반화됐고, 장사치들은 덤으로 주는 고봉두의 분량만큼 한말의 크기를 줄였다. 결과는 용기의 크기들이 각기 달라지는 계량형의 문란을 가져왔다. 또 소위 ‘낱알을 세워단다’는 일제시기의 솜씨좋은 점원들은 한말을 달면 두세홉을 남기는 신기를 보여줬고, 이 유능한 기술자들을 스카웃하기 위해 싸전의 주인들은 백방으로 정성을 기울였다는 과거사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