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5.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 4월달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386세대를 비롯한 신진들이 대거 당선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밝게 했다는 것이 낙관이라며, 영남과 호남의 특정정당 싹쓸이와 같이 더욱 심화된 지역주의의 거대한 벽 앞에서는 비관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만 노무현 (전직)의원의 말은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한다. “부산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지역주의가 이기주의와 편견 또는 독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고 부패로 멍들게하는 것이 또 있다. 집단 이기주의, 또는 유치한 말로 ‘밥그릇 논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밥을 먹고 사는 생물학적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먹고, 쌓아두고,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싸움이다. 배가 부르면 사냥을 멈추는 맹수와1는 달리, 인간만이 벌이고 있는 맹목적 사냥이며 착취적 채집이다. 그러다 보니, 남의 밥그릇을 깨버려야하고, 뺏어야 하고, 남들이 모두 밥그릇을 챙기니 나도 뒤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에 온 존재를 맡겨야 한다.
건축계에도 지역주의가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문제는 끈질기게 작용하는 학연주의와 연고주의다. 중요한 현상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획안에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심사위원이 어느 대학 교수인가를 추적하고 그 대학출신을 앞장 세워 집중적인 로비를 벌인다. 대학 교수직을 지원할 때면, 어느 대학에 어디 출신 교수가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성공확률이 높다. 물론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은 모두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논리에서 비롯된다. 누가 먹어도 먹을 것 아닌가? 그럼 내가, 우리 편이, 내 후배가 먹는 것이 낫고, 그래야 내게 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밥그릇 논리는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건축계의 화두는 단연 건축가 자격과 교육에 대한 인증문제와 제도 개편이다. 전국의 어느 대학치고 자신들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 곳이 없다. 5년제 설계학부로 갈 것인가, 4년제 건축공학과정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전문대학원으로 갈 것인가?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3자택1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인근 학과들과 통합하여 학부제를 시행하고 있고, 같은 학과 내에서도 건축학과 건축공학이 통합된 애매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선 그 대학의 교육목표를 설계쪽인지, 공학쪽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취할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제도 개혁을 준비했던 당사자들은 전국에서 설계전공 프로그램을 택할 대학은 20%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교육 여건 상 실제로 그 정도만 설계교육이 가능한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재 벌이지고 있는 상황은 예상과는 크게 다르다. 전국 거의 모든 대학이 한 학과 내에 건축학 전공과 공학 전공을 동시에 개설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 학과 안에서 한쪽은 5년제, 다른 한쪽은 4년제 과정을 공존시키는 기현상을 감수하려 한다. 그 원인은, 단적으로 말한다면, 교수진의 구성분포 때문이다. 설계나 계획전공 교수는 결코 5년제 설계과정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공학전공 교수는 4년제 공학과정을 양보할 수 없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양자 공존론이다. 학생들의 졸업후 진로나, 지역사회의 요구나, 교육여건의 충족도 등은 그 다음 문제이거나,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밥그릇 논리가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100개 대학이 모두 5년제 설계교육과정을 택한다고 했을 때, 소요되는 설계지도 교수수는 최소 1,000명에 달한다. 또, 한해 배출되는 졸업생만도 최소한 3,000명이다. 현재 우리 여건으로, 교수는 공급 결핍이요, 졸업생은 공급 과잉이다. 단순한 산수만으로도 불합리한 결과가 예측되지만, 밥그릇 논리의 강점은 모든 합리적 판단과 예측에 우선한다는 사실이다. 5년제냐 4년제냐 하는 논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교육하는가가 실질적인 교육인증의 내용인데, 건축교육계는 지나치게 제도의 선택에만 매달려있다. 이러한 부차적 논의를 전면화시키고, 교육의 내용과 내실화를 뒷전으로 미루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교수들의 밥그릇 챙기기에서 유발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이고, 제도 개혁인가? 이제는 침묵했던 학생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전선에 나서야 할 것 같다. 이에는 이로, 밥그릇에는 밥그릇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