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전반적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 중반, 엄청난 인구가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의 길에 나서던 시절, 우리 도시를 가득 메웠던 고향 떠난 유랑민들의 심정을 달래준 노래가 있었다. “돌담길 돌아서서 또 한번보고 ……”. 차마 떠나기 어려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상경한 소시민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대변한 노래였다. 당시만 해도 시골집의 상징은 돌담으로 쌓여 대문까지 이르는 길고 구부러진 돌담길이었다.
시골의 돌담길이 이처럼 서글픈 사연을 지녔던 바로 그 시절, 서울의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이 피해야할 금기 장소 중의 하나였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데이트를 하면, 그 쌍의 관계는 꼭 깨지고 만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왜 그런 설이 널리 퍼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지금은 말끔히 단장되어 도심 내 보행자 천국으로 환영받고 있지만, 당시 이 돌담길은 인도가 없이 차도뿐이어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매우 불안한 길이었다. 또한 조명등조차 침침해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할 소지가 큰 길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보통 길은 양옆이 터져 있거나, 건물들의 문과 창으로 뚫려 있는데 비해서, 돌담길은 양옆이나 한쪽 옆이 육중한 돌담으로 막혀있다는 점이 큰 차이를 이룬다. 이 때문에 일상적인 보통 길과는 달리, 여러 가지 의미를 띄게되고 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게된 것 같다.
담을 쌓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군사용 성곽이나 궁궐의 담과 같이 담 안에 있는 시설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이런 담은 외적이나 도둑을 막을 수 있도록 튼튼하고 높이 쌓아야 한다. 보통 살림집에서는 소유자나 이용자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담을 만들었다. 나뭇가지 따위를 엮어 만든 엉성한 담을 ‘울, 울타리’라 부르는데, 이 정도는 마음먹기 따라 얼마든지 뛰어넘거나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울타리는 단지 “여기는 내 땅이라는 걸 알고 들어오시오”라는 표시에 불과하다. 이 때 담은 높을 필요도 튼튼할 필요도 없다. 그저 경계만 표시하면 될 뿐이다.
농업생산력이 늘어서 중소지주 집들에도 재물이 쌓이기 시작한 조선시대 말이 되면 일반 살림집의 담도 높아지고 튼튼해진다. 나라 형편이 어지러워져 창궐한 도적 떼 또는 의병들의 일차 공격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들의 재산과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높이 쌓았다. 높은 담은 잘사는 집의 상징이었다.
더 옛날 신라 때도 담 높이가 집주인의 신분을 상징했던 적이 있었다. 삼국통일 후 생활수준이 높아진 일반 경주시민들이 너도나도 높은 담을 쌓아 자랑하기에 이르자, 엄격한 신분질서를 수호해야 할 정부에서는 드디어 건축법을 제정해 담의 높이를 제한하였다. ‘삼국사기 옥사조’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하위 귀족계급이었던 6두품은 8척 이상, 하위 관료인 5두품은 7척 이상, 4두품과 일반백성은 6척 이상의 담을 쌓을 수가 없었다. 평민들의 집의 담은 사람키 정도면 충분했다는 말도 된다.
한국 집의 아름다움은 불필요한 부분이나 크기를 갖지 않는 절제성에 있다. 과욕을 부리지 않는 적당한 높이와 크기로 만들어진 집 – 이런 살림 공간을 이른바 인간적 스케일의 공간이라 부르며, 모든 건축이 추구하는 이상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잘 반영된 것으로 사대부가에 흔히 사용된 내외담을 들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세워진 작은 담으로서, 여성의 영역과 남성의 영역을 구획하고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외담의 높이는 눈높이 정도, 길이 역시 한길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벽면 전부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시선만 차단할 수 있는 정도로 구획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안채를 엿볼 수 있는 짧고 낮은 담. 엿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막힌 듯 터져 있는 내외담은 얼마든지 쌓아도 좋을 담이다. 경주 양동마을 손씨 대종가에 설치된 내외담은 길이가 불과 1m 정도이다. 그러나 이 짧은 담장은 남자들의 사랑채와 여자들의 안채 영역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경계이며, 실제로 이 담의 존재 때문에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
필요한 크기대로만 집을 짓기 때문에 한국 집의 건물은 크지도 넓지도 않다. 건물만으로는 넓은 대지를 나누어 아늑한 공간들로 만들 도리가 없다. 집 터 가운데에 건물을 놓고 사방으로 담을 뻗어 나가서, 사랑마당도 만들고 행랑마당도 만든다. 따라서 담들은 건물과 함께 ‘집’의 공간을 완성하는 2대 요소가 된다. 그처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인지, 담만큼 다양한 재료와 방법으로 만들어진 집의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다.
생나무를 조밀하게 열 지어 심은 생울, 나뭇가지 등을 가로 세로로 엮은 바자울, 나무판자로 막은 판장, 흙과 석회와 지푸라기를 섞어 다진 토담, 돌멩이로만 쌓은 돌각담, 돌과 흙을 섞어 쌓은 맞담, 맞담 중간 중간에 별을 상징하는 장식돌을 넣은 곡담, 그리고 갖가지 무늬의 장식을 한 꽃담까지 풍부한 재료와 기법을 가진 담들이 발달해 왔다. 이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며 경제적인 생울타리가 흥미를 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 있는 나무들을 심어, 그 나무 열로 담장을 삼은 생울타리가 가장 비싼 담장이 될 수도 있겠다. 생울에는 탱자나무 같이 가시가 있는 나무들을 많이 사용한다. 이 담은 항상 자라나기 때문에 자주 손질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계절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을 얻는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역시, 한국 담의 진수는 크고 작은 돌로 쌓은 돌담이다. 꽃담과 같이 화려한 장식도 없고, 생울타리같이 자연을 가장한 억지도 없다. 돌들의 중후한 느낌을 그대로 담장으로 바꾸되, 그 크기와 높이와 형태를 조절하는 기술을 자랑하는, 자연과 인공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담장이다.
아직도 시골 마을에 가면 나지막한 돌담에 둘러싸인 농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집안을 들여다보고 싶으면 제자리 뛰기 한번만 해도 넘겨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다. 이런 담들은 영역의 표시 외에도 바깥의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너무 높게 쌓으면 집안에서 바깥을 내다볼 수가 없다. 바깥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내다볼 수 있는 높이. 바로 그런 높이는 사람 키보다 한 뼘 정도 위면 충분하다. 이런 담장의 높이라면 앞집 갑순이가 우물가에서 설거지하는 장면을 얼마든지 훔쳐볼 수 있으며, 뒷집 감나무에 달린 잘 익은 홍시를 따먹을 수도 있다. 경계를 짓되 들여다 볼 수 있는 넉넉함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막힌 듯 열려있는 담장의 이중적 성격은 돌담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살림집의 대문에 이르는 ‘고샅’이라는 길은 똑바른 골목길이 아니다. 서양의 저택과 같이 우람한 주택의 정면을 보면서 다가서는 그런 길이 아니다. 마을에서 고샅으로 들어서면 집도 대문도 보이지 않는다. 돌담길 끝에는 여전히 돌담이 막혀있는 것 같이 보인다. 길이 똑바르지 않고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길을 더듬어 들어가면 홀연히 대문이 나타나고 집안이 된다.
여염집의 고샅 뿐 아니라, 덕수궁의 대문인 대한문도 숨겨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대로의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한쪽 귀퉁이, 덕수궁 돌담길로 빠지는 길가에 수줍은 듯 다소곳이 서있다. 비록 후대의 변화에 의해 더욱 초라해지기는 했지만, 원래 덕수궁의 모습도 중국의 자금성과 같이 위풍당당하게 도시에 군림하는 그런 궁궐은 아니었다. 또한 덕수궁의 돌담길도 네모 반듯하지 않다. 구불거리고 감추어지기는 여염집이나 궁궐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여염집 고샅이 휘어진 정도나, 왕궁 돌담길의 구부러진 정도는 그다지 과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똑바르게 나 있다. 한국의 담장이 막힌 듯 열려있다면, 한국의 돌담길은 구부러진 듯 똑바르게 만들어졌다. 담장과 돌담길에서 우리의 조형예술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실체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