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2.07.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월드컵과 축구는 열기를 넘어 광기를 뿜고 있다. 16강에만 진출하더라도 개최국의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텐데, 아니면, 사상 첫 승만이라도 거둔다면 원이 없을 텐데, 하던 염원이 바로 한달 전이었는데, 한국팀의 예상 밖의 선전과 행운에 힘입어 결승 진출까지 눈앞에 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하는 철없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가 하면, 500만이 넘는 인구가 붉은 악마로 변해 길거리 응원에 나서기도 한다. 온 나라의 이성은 마비되고 거의 혈연적 동족의식에 가까운 애국주의가 휩쓸고 있으며, 축구의 기본적 룰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맹목적인 축구 사랑과 나라 사랑의 열기가 뜨겁다. 심지어 “국수주의라 불러도 좋고, 냄비현상이라 해도 좋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한데”라는 비이성적 논설이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월드컵 열풍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히딩크라는 벽안의 이방인 지도자가 1년 7개월 사이에 보여준 놀라운 리더쉽이며, 둘째는 이 사회의 금기와 편견을 일시에 날려버린 붉은 악마 응원단의 자발성이다. 히딩크는 하나의 거대한 화두가 되고 있다. 모든 기업과 조직이 히딩크 리더쉽을 분석하고 본받으려 할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부드럽고, 웅장하면서도 섬세하다는 모든 찬사를 받고 있다. 처음 몇몇 철없는 젊은이들의 광기 정도로 치부되던 ‘붉은 악마’들의 전염성은 정말 경악할 정도다. 1000만 장에 가까운 붉은 색 티셔츠가 팔려서 단군 이래 최대 히트 상품으로 기록되며, 열에 한 명은 길거리에 나서 축제를 즐기니 세계 최대의 응원단을 조직한 셈이다. 누가 시킨 것도 매스컴에 선동한 것도 아닌데, 이처럼 열광이니 그 자발성과 전염성은 우리 사회가 전혀 체험하지 못한 강도며 규모다.
뛰어난 지도자와 위대한 대중의지지. 물론 4강 진출이라는 한국팀의 기적적인 성적이 이 두 가지 신화를 창조했다고 할 수도 있다. 축구라는 비과학적 운동이 그렇듯이 모든 것은 결과가 중요하니까. 그러나 4강은커녕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더라도, 히딩크 리더쉽과 시민적 자발성에 대한 평가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드컵 열풍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소중하다는 또 하나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또 하나의 사회적 변화의 기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건축계는 어떠한가? 우리 건축계의 성적을 세계무대에 올렸을 때, 월드컵 이전 한국 축구의 랭킹이었던 40위권에는 들 수 있을까? 리더쉽을 가진 개인도, 집단도 세대도 없고, 대중적 자발성은 더더욱 없는 것이 현실이다. 히딩크 정도의 신화적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홍명보와 같은 믿음직한 노장도, 안정환 같은 신세대 스타도 없다. 건축계 내부에서 조차, 그러한 스타탄생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초적인 시스템이 튼튼한 것도 아니다. 건축시장 개방이 결정된 것이 벌써 5년이 지났고, 국제 기준 도입을 결정한 것이 3년째다. 건축 3단체가 모여 공조를 약속하고 FIKA라는 국제 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한 지도 2년이 넘었다. 그러나 일부 대학의 건축과 5년제 실시라는 가시적 성과만 있을 뿐, 그나마 실질적인 교과과정이나 설계교육 시스템 구축이 여러 암초에 부딪혀 난항 중이다. 공동 기구는 결성에 합의만 되었지, 기본적인 조직 구성도 안된 상태이고, 최소한의 활동도 없었다. 개점 휴업 상태로 2년을 보낸 것이다.
기존 기구들은 해묵은 헤게모니 쟁탈에 더 큰 관심들이 있었던 것 같다. 건축학회 회장선거를 둘러싼 치밀한 작전들과 논공행상에 따른 임원진 구성이 구설수에 올랐으며, 신임 건축사협회장이 전임회장 임기시의 결정에 대해 불신하고 시행을 지연함에 따라 FIKA 구성이 늦어지고 있다는 원망도 일고 있다. 거대한 파도가 가까운 바다에 밀려들고 있는데, 항구에서는 아무런 대비없이 작은 싸움과 잔치로 기상예보마저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각에서는 ‘새 건축사협회’ 결성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그 주도세력들은 우리 건축계를 리드하는 5,60대 중견 건축가들이다. 사회적 변화와 제도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일선에서 개혁과 개선을 주도해 왔다. 건미준 활동이 그랬고, FIKA 합의의 핵심에도 그들이 있었다. 10년이 지난 이번에도 또 그 사람들이냐?는 주도 세력에 대한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보다 비판을 가하는 3,40대 후진들에게 있다. 기존 단체들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연장선상에서 새 건축사협회의 움직임도 예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치부하고 있다. 심각한 견유주의에 빠져 옥석 구분의 노력을 배재한 상태다. 리더쉽 부재를 큰 문제로 지적하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리더쉽 구축을 포기하고 있다. 비판만 있고, 행동은 없다. 모든 것에, 심지어 자신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경향이 이들 세대에 만연해 있다. 우리 사회 변혁의 핵심에 있다고 하는 386세대가 건축계에서는 왜 이렇게 됐는가?의 진단은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자. 그러나 리더쉽이란 자발적 대중들의 지지가 없이는 형성되지도 못하고, 영향력을 갖지도 못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떤 변혁도 기대할 수 없다.
히딩크의 리더쉽은 그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붉은 악마들의 자발적 지지와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맹목적 응원이라도 좋고, 일시적 열광이라도 좋다. 변혁과 개선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리더쉽을 확보해주자. 월드컵의 경험이 우리 사회 각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들 한다. 건축계도 제발 한번의 승리만이라도 경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