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8.02.13.
출처
공간
분류
건축비평

최근까지 서울의 가회동 원서동 일대는 이른바 ‘북촌 한옥마을’로 유명했다. 몇 개의 궁궐들을 제외한다면, 600년 수도라는 서울의 시간적 깊이와 전통적 공간환경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 전국 유일의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돼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주민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논밭으로 또는 쓸모없는 빈터로 천대받던 강남의 땅값과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가 하면, 4대분 안의 다른 땅들은 대형 업무시설과 상업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진짜 금을 깔아도 안될 만큼 최고의 재산가치를 향유하는데 비해, 그들의 한옥은 기껏 지상1층의 낡은 용적밖에 허용되지 않았고, 고칠 수도 부실 수도 없었으니 집값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땅에 대한 거래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당국의 보존지구 지정은 주민들에게는 사유재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였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공권력의 횡포였다. 아무런 이득이 없으면서 주민들만 문화 보존의 막대한 책임과 재산상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하는 거센 항의와 실력행사에 밀려 1992년 드디어 숙원의 ‘보존지구 해제’가 결정됐고, 이 동네의 건축환경은 나날이 달라지게 됐다.
뜻있는 건축가들은 경제적으로는 주민들의 편에 서면서도, 동시에 한옥 동네가 간직해왔던 건축적 환경과 가치를 보존하려는 운동을 펼쳤다. 92년, 당시 4.3그룹의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실제 상황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건축적 대안들이 제시하고 전시회까지 개최했다. 그러나 건축계와 주민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됐음에도 불구하고, 제시된 대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건축가들의 제안은 현실과는 괴리된 이상안이 되고 말았다. 지금 가회동은 임대수입의 금액이 바로 건축의 형태가 되는 ‘다세대주택’이라는 신종 집장사집들로 가득 채워져가고 있다.
사유재산권을 존중하면서도 굳이 한옥보존의 방법을 찾아본다면, 국가적인 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가장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방법은 보존대상이 되는 한옥들을 전량 국가에서 매입하여 재활용하는 방법이다. 그 많은 물량을 무슨 재원으로 매입하느냐 반문할 지 모르지만, 가회동 일대의 100여채만 예를 들더라도 92년 시가로 300억원 정도면 전량 매입할 수 있었다. 300억원은 무너진 성수대교 하나를 복구하는 비용에 불과하다. 한옥군을 개별 건물이 아니라 국가적인 하부시설로 생각한다면, 다리 하나 관리 잘해 아껴지는 돈으로 충분한 방법이다. 한보그룹이 가져다 쓴 2조원의 부실 채권들을 투입한다면, 전국의 한옥을 모두 사서 활용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이고 거시적 안목의 정부를 갖지 못했다. 결국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항상 일반 시민의 몫이었다.
이처럼 악화일로의 상황에서 건축가 김영섭은 한옥보존의 다른 전략을 실험하고 있다. 89년 한옥 한채를 사서 개조해 살면서 이 동네 주민이 된 그는 최근 바로 앞집을 더 매입해 수리를 마쳤다. 물론 그의 한옥에 대한 애착이 개인적 취향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목적적인 보존의 사례를 보여주는 유일한 예라고 할 수밖에 없다.
김영섭을 포함해서 안목있는 건축가들은 도시한옥이 가진 건축적 가치에 매료돼 왔다. 세가지 정도만 요약한다면, 공간의 투명성, 토지이용의 효율성, 그리고 목조건물 자체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한옥에 대한 애착은 사라져가는 문화의 보존이라는 사회적 의무보다는 건축가로서의 전문가적 관심의 비중이 더 큰 것 같다.
이제는 상식화된대로 한옥의 공간은 말 그대로 ‘비어있음’의 허체들로 이루어진다. 특히 도시한옥의 안마당이나 대청의 비움은 서원, 사대부가등 성리학적 관념의 비움이 아니라 ‘일상적인 비움’의 형태로 존재했다. 따라서 근대건축의 공간개념과도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는 편이성을 가져왔다. 이 집의 건축주이자 건축가는 우선 이러한 공간의 본질을 복원시키는데 목표를 두었다. 안마당을 다용도의 공간이 아니라 관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노력, 대청과 외부공간과의 투명성을 보장하려는 노력들이다.
특히 삼송헌의 대청에서 투명성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대청의 -원래는 부엌이었던 칸에 대청마루를 옮겨온 곳임- 앞 뒤에 4짝 유리창을 달아 안마당 대청 뒷마당이 투과되는 공간을 의도했다. 그러나 4짝의 문짝수는 지나치게 많아 문틀의 두께가 투명 효과를 절감시키고 있다. 또, 복잡한 창살의 장식적 문양은 내외부의 투명성을 반감시키는 역작용을 한다. 삼송헌의 경우, 한옥의
도시한옥의 유형은 대지의 밀집성과 협소함에서 탄생되었다. ㄱ자 혹은 ㄷ자의 구성들은 건물을 최대한 대지경계선에 붙여 자투리 공간을 없애고, 외부공간을 하나의 비교적 넓은 마당으로 통합하려는 결과물이었다. 그러면서도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끊임없이 맺음으로써 협소한 내부, 혹은 협소한 외부의 공간감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매월당(梅月堂 – 89년에 개조한 뒷집)과 삼송헌(三松軒)의 개조에서 건물과 외부공간, 특히 자투리로 남는 작은 바깥들을 다시 내부공간과 관계를 맺어주고 있다.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들을 거두었지만, 몇 개의 지점들은 관계맺기에 실패한 부분이 보인다. 예를 들어, 삼송헌 대문 옆의 길쭉한 쪽마당에 힘들어 꽃담을 만들었지만, 그 앞에 키 큰 꽃나무를 심어 꽃담을 가려버린 부분.
이 꽃담의 바깥면 – 길에 노출된 외벽-은 사고석을 쌓은 돌담으로 처리한 점도 수긍하기 어렵다. 한옥이 가진 내외부의 관계맺기는 비단 대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지의 내부와 외부, 사적인 영역과 공공적인 영역, 더 나아간다면 건축과 도시가 접하는 경계의 관계맺기가 더욱 중요한 부분이었다. 자연 속에 놓여진 사대부집들에서 건축 구성의 기준은 지형적 환경이었다. 사랑채에서 어떤 앞산이 보이는지, 뒤산의 맥이 안대청과 어떻게 만나는지가 집의 좌향과 영역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도시한옥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가회동 일대가 일제기에 지어진 개량성과 날림성 때문에 건축-도시의 관계가 모호하다 할 지라도, 개조하는 시점에서는 그 거대한 관계를 복원했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하면, 길이라는 도시공간에서 삼송헌의 내부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적어도 사고석의 견고한 돌담이 아니라, 집 안의 의도를 연상할 수 있도록 바깥벽도 꽃담으로 처리했어야 하지 않을까. 담장의 문제가 지엽적이라 할지라도, 삼송헌과 매월당은 도시에 대해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물론 주택 내부의 보안이나 프라이버시 보장은 지켜져야 하지만, 내-외의 관계맺기가 주택 내부에서만 한정된 점은 이 집을 비롯한 도시주택의 큰 한계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