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9.04.21.
출처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분류
기타

“대학에 들어가서 놀라고 해서 기대가 많았는데, 고3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우리과 신입생의 하소연이다. 수없는 과제의 부담 때문에 주말에도 설계실에서 밤을 새야하는 불쌍한 신입생들 뿐 아니다. 상급학년도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해보고 청춘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열성에 한편 흐뭇하기도 하지만, 저러다 시집갈 기회도 놓치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다.
우리 학교에는 통상적 의미에서의 ‘대학 낭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학생회장 선거도 그렇다. 일반 대학이라면 총학생회장이 되려고 대규모의 조직적인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금품수수와 매수까지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우리 학생회장은 추대에 가까운 단독출마로 당선되고 마니 싱겁기 짝이 없다. 우리 학생들이라 해서 학교에 대한 불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학생들의 높은 이해심과 애교심 때문에 데모는 물론 온건한 항의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수가 적고 가족적인 분위기다 보니 대리출석은 꿈도 꿀 수 없고, 간혹 몸이 아파 결석이라도 하면 교수에게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이 미안해한다. 과제 때문에 주말은 반납, 방학이라고 해도 계절학기와 잦은 워크샾 등으로 쉴 틈이 없다. 오로지 예술, 오로지 공부만이 대학생활의 전부를 차지한다. 가장 치열하게 교육이 일어나고 학문과 수련이 벌어지는 최고의 대학으로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통 대학생의 1학년 삶이란 학업보다는 다른 활동, 예를 들어 동아리 활동이나 취미생활로 채워진다. 대개 1학년은 교양과정이다 보니, 고등학교 때 배웠던 내용들의 확대 반복에 불과하고, 우리 학생들 같이 우수한 이들은 고3때의 실력만으로도 학점을 딸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전공과도 관계없고, 몇백명씩 한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대형강의여서 대출은 물론 과제물을 서로 베껴내도 발각당할 염려가 없다. 생애 처음 맞이하는 무한정한 자유와 여유 속에서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취미활동이라는 것이 연극 영화 음악 춤 등이고 간혹 미술도 포함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모두 전공으로 삼는 것들이다. 우리 학생들은 취미활동을 할 여유도 없지만 대상을 찾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물리학 기계공학 사회학을 취미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과의 한 교수님은 흔히 “우리 학교에는 교양과정이 없어서 학생들이 교양이 없다”는 농담을 즐기신다. 그러나 그 농담 속에는 뼈아픈 지적이 숨어있다. 전공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인들이지만, 사회 의식이나 폭넓은 지식의 토대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교양과정을 도입한다고 교양이 생길리는 만무하지만,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아쉬운 것은 바로 보편적인 지식과 생각들이다. 현대 예술은 기교나 솜씨보다는 깊이있는 생각과 독창적인 세계관을 요구한다. 의미있는 생각이 없는 의미있는 작품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의미있는 생각이란 한정된 예술계 안에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예술계와의 교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 역사에 대한 시각, 다양한 인간생활에 대한 관심 속에서만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예술의 담론과 콘텐츠를 창출하려면 인문학적 바탕은 물론, 자연과학적 지식과 교양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정규 프로그램만으로는 부족하다. 각자의 노력을 통해서, 더욱 효과적인 것은 이른바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과 예술 동아리, 예술 무의촌 공연 동아리, 인문학 연구 동아리, 지역사회 예술교양화 동아리, 도시와 문화읽기 동아리………. 있었으면 좋겠고 꼭 필요한 활동들은 무한하게 널려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특기와 전공을 살리면서도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사회를 이해하고 기여하는 동아리들의 탄생과 활약을 기대한다. 그들이 바로 우리 학생들에게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