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3.11.19.
출처
래미안
분류
건축문화유산

이언적의 좌절과 은거
포항에서 영천으로 가는 국도에 위치하는 안강읍은 풍산금속 공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풍산금속은 무기생산업체로 우리나라 국방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약간은 살벌한 이 대규모 공장 맞은 편 깊숙한 곳에는 전혀 다른 별세계가 펼쳐졌으니, 옥산서원을 품고 있는 옥산골짜기다. 짙은 송림과 빼곡한 낙엽수 숲 속에 요란한 폭포 소리가 들리며, 그 앞에 단아한 모습의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 3대서원에 꼽히는 명소로 조선 성리학의 태두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이언적은 인근 양동마을의 여주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안동 하회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양반마을인 양동에는 지금도 이언적의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언적의 서원이 연고지를 떠나 이처럼 한갓진 곳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약관 20대 초반에 당대의 석학인 조한보와의 논쟁에서 승리한 후 전국의 유림들이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고, 정계에 진출하여 칼날같은 논리와 대쪽같은 성품으로 승승장구 출세를 계속했다. 그러나 송곳은 감추어도 들어나는 법, 타협을 거부하는 그의 직언 때문에 많은 정적들이 생기게 되고, 정적들의 모략에 의해 40세가 되던 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낙향하게 된다. 그의 야인생활은 무려 7년간 계속되는데,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의 터전으로 잡은 곳이 바로 옥산 골짜기였다.
양동마을은 그의 외가인 손씨들의 본거지였고, 이언적 가문은 아직 세력이 미미하여 거의 더부살이와 같은 형편이었다. 잘 나갈 때는 문제가 없지만 낙향의 경우에 외가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안으로 택한 옥산에는 이미 그의 아버지가 건립하고 젊은 날의 이언적도 종종 머물렀던 정자가 있었고, 자신 소유의 살림집도 갖추고 있었다. 이언적은 당시의 풍습대로 25세 때 양주 석씨 가문의 규수를 소실로 맞은 적이 있었는데, 석씨 부인이 지참금조로 이곳에 살림채를 건립했던 것이다. 본처보다는 소실에 더 애정이 있었던 것일까? 이언적은 본처가 있는 양동보다는 옥산에 거주하길 즐겨했고, 게다가 옥산은 은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4산5대 -자연을 재조직하다
은거 초기에는 곧 조정의 부름이 있으리라 기대했는지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한 이태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사랑채를 신축해 ‘독락당’이라 이름을 붙여, 이 집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비로소 본격적인 은거생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선비들의 은거란 정치적인 관심이나 사회적 교류를 끊고, 오로지 책과 자연을 벗 삼아 심신을 수련하는 생활이었다. ‘독락-홀로 즐거움’이란 자연 속에서 자신을 수양한다는 뜻으로, 은퇴나 현실도피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우선 독락당 주변의 자연을 이언적 식으로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 계곡의 동서남북을 감싸는 4개의 산에 각각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가운데 화개산과 자옥산은 불교적 색채를 띤 이름이고, 무학산과 도덕산은 도가적 이미지가 가득한 이름이다. 청년기의 이언적은 불가와 도가를 우상과 이단으로 무자비하게 몰아붙여 ‘성리학의 수호자’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중요한 4산에 불가와 도가의 이름을 붙였다는 건 은거생활을 통해 그의 사유가 한결 유연하고 풍부해졌음을 뜻한다.
독락당 뒤쪽으로 특이하게 생긴 석탑이 있으니, 정혜사지 13층석탑이다.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형식적으로나 심미적으로 뛰어난 신라시대 석탑인데, 바로 그 자리에 정혜사라는 고찰이 이언적 당시는 물론 임진왜란 때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이언적은 세상과의 교류는 거부했지만, 정혜사의 승려들과는 친해져서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정혜사와 독락당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쪽문이 뚫려있고, 이 문을 통해 서로 왕래 했으리라. 당대의 성리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교류였다.
멀리 있는 4개의 산이 바라보는 대상이라면, 독락당에 바로 붙어있는 자계 골짜기는 산책과 소요의 장소였다. 자계 골짜기는 평평한 바위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5개의 바위, 즉 5대를 골라 특별한 이름과 기능을 부여했다. 관어대 위에서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영귀대 위에서 목욕 후 노래를 부른다. 탁영대는 갓 끈을 풀고 땀을 식히는 곳이고, 세심대에서 잡념을 씻어내고, 징심대에서 마음을 평정한다. 4산이 불가와 도가의 세계라면, 5대는 유가의 세계이다.
사랑채인 독락당은 은거생활의 베이스 캠프가 된다. 평소에 독락당에서 독서를 하다가 뒷마당에 심어진 약쑥을 뜯고 화초를 가꾸기도 하며, 자연이 그리워지면 계정 아래로 나아가 자계의 5대를 거닐고, 4산의 기슭을 산책했다. 집으로 돌아와 석씨부인의 수발을 받으면서 사랑채에서 곤히 잠을 자고,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리라. 가끔은 정혜사를 찾아 승려들과 담론하기도 하고, 그들이 독락당을 찾아오는 일도 있었으리라. 이것이 진정한 여유이고 은거생활이다.

자연을 향한 미로
4칸의 독락당은 한 칸이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인데, 계곡 쪽 담장에는 특별한 장치가 있다. 독락당에 면한 담장에 나무로 된 살창을 설치해 안팎의 시선이 통하게 했다. 독락당 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담장에 난 살창을 바라보면 그 창살 사이로 계곡 물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바라볼 수 있다. 이 집의 주인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독락당 뒤로 돌아가면 또 하나의 마당이 나오고 계정이라는 정자의 마루에 앉을 수 있다. 마당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살림살이 건물 같지만, 일단 마루에 앉으면 그 아래 펼쳐지는 계곡의 유장함과 건너편 산등성이의 웅장함이 대자연의 경관을 이룬다. 분명 계정은 집안에 있는 건물이지만 동시에 자연 속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자연과 세속의 경계에 세워져 인간에서 자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 된다.
독락당이 자리 잡은 위치를 살펴보자. 일반적인 양반집은 뒤로 산을 기대고 앞으로 들판과 하천을 접하는 이른바 ‘배산임수’의 형국에 약간 비탈진 경사지 위에 자리 잡는다. 풍수적인 이유도 있지만 마을 내에서 돋보이는 위치에 서려는 사회적인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락당은 계곡가 평지에 세워졌고, 마을과도 별로 관계가 없이 외떨어진 집이다. 지대도 낮은 곳이지만 건물들의 높이도 높지 않아, 돋보이기보다 오히려 최대한 낮추고 감추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무심코 지나면 과연 이 자리에 이 큰 저택이 있는지 눈치 채기 어려운데, 심지어 그 앞을 여러 채의 집으로 가리기 까지 했다. 독락당 대문을 들어가면 담장이 가로막고 그 안에 살림채가 한 채 나타난다. 이 집은 주인의 주택이 아니라, 청지기가 살았던 이른바 ‘공수간’이다. 본채는 공수간 담장을 끼고 옆으로 돌아야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본채가 금방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의 대문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 다른 대문을 열면 또 담장이 가로막는다. 당황함을 추스르고 자세히 살펴보면 담장 앞에 한 평 남짓한 빈터가 마련되어 있고, 양 옆으로 두개의 또 다른 대문과 하나의 골목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왼쪽 대문은 안채로 향하는 문이고, 오른쪽 대문은 예의 사랑채인 독락당으로 향하는 문이다. 안채 쪽 대문을 열면 또 막다른 길과 같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 오른쪽 벽에 감추어진 중문을 열어야 비로소 안마당에 도달한다. 집 밖에서 안채까지 오려면 4개의 문을 열어야 가능하며 그나마 모두 숨겨져 있는 문들이다. 또한 통로의 방향을 4번이나 꺾어야 갈 수 있을 만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집을 낮추고 입구를 감추며 통로를 복잡한 미로로 만들어 놓은 것은 예사 양반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모습이다. 이언적의 본가는 양동마을에 있는 향단이라는 저택이다. 향단과 독락당 모두 이언적이 직접 지은 주택으로 건립시기도 10년 안짝의 차이 밖에 안 난다. 그러나 향단은 독락당과 달리 마을에서 가장 눈에 잘 띠는 언덕 위에 세워졌고, 입구도 명쾌해서 찾기에 쉽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지은 두 집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까닭을 굳이 찾자면 두 집의 가족적 차이랄까, 또는 두 집을 지을 당시의 이언적의 심정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독락당은 소실댁의 주택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집이고, 향단은 본가로서 양동마을의 외가 식구들이나 권속들 앞에 우뚝 서고 싶은 집이다. 독락당은 낙향하여 은거를 위해 지은 집이고, 향단은 복직한 후 경상감사로서 관운이 한참 잘나갈 때 지은 집이다. 집은 주인의 가족구성과 인격을 닮게 된다. 독락당과 향단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독락당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두 번째 대문에서 오른쪽으로 숨겨진 골목을 따라가면 나타난다. 이 골목은 계곡으로 이르는 길이다. 분명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골목을 따라가면 다시 집 바깥의 자연이 된다. 계곡에 서서 독락당을 바라보면 이 집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토록 낮추고 감추었던 독락당이 이 곳에서는 자연에 대해 활짝 열려있고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계곡은 아무나 올 수가 없는 곳이다. 여기까지 오려면 역시 두개의 대문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마저도 감추어진 곳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자연은 만인에게 공개된 곳이 아니라, 독락당 식구들에게만 열려있는 지극히 은밀한 자연이 되다. 자연을 넓은 정원으로 삼은 셈이다.
세속에 대해서는 닫혀있고 자연에는 열려있는 집. 그래서 인간사회를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홀로 즐거워하는 집. 그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는 집. 그 집이 바로 독락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