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지에 도시가 처음 생겨날 때 이 지역에는 6개의 촌락이 존재하고 있었다. 촌락의 추장들이 모여 지역적 연맹체를 결성함으로써 씨족촌락의 단계에서 부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연맹체를 대표할 지도자 – 임금을 뽑는 일이었다. 어느 한 씨족에서 임금을 배출하면 다른 씨족과의 평등관계가 깨져서 연맹이 와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촌락 추장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유지됐고, 그 만장일치 회의제도는 이후에도 화백제도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대표자가 없는 조직은 대내외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때맞추어 임금을 맡을 새로운 후보자들이 외부에서 몰려왔다. 이른바 박-석-김씨 왕가들이었다. 세 왕가의 시조들은 신비하고 화려한 출생 신화로 미화된 바 있다.
양산 아래 금성지역에서 백마가 내려와 꿇어 앉아 붉은 알을 지키고 있었다. 촌장이 알을 지켜보니 밝은 광채가 나는 옥동자가 알속에서 나왔고, 그가 바로 장성한 후 최초의 왕위에 오른 박혁거세였다.
지금의 캄차카 반도 지역의 한 작은 나라 왕부처가 알을 낳아 배에 실어 내버렸고 남쪽 경주까지 떠내려왔다. 경주에 닿은 배에서 출중한 남자아이가 나타나 이후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석씨 왕가의 시조 석탈해였다.
또, 지금의 계림에 황금상자가 걸려있고 흰 닭이 울어 왕이 다가가 상자를 열었더니 역시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그를 태자에 봉했으나 왕위를 사양했고 그의 후손이 미추왕이 됐다. 그는 김씨 왕가의 시조인 김알지였다.
박석김 왕가의 탄생설화는 이들이 모두 외부에서 이주한 집단이며, 말 배 닭이라는 매개체들은 이 이주집단이 철기를 사용하는 기마민족임을 의미한다. 이들의 근원은 모두 중앙아시아의 스키토 시베리아 지역으로 추정된다. 박씨계와 김씨계는 육로를 통해 한반도의 남쪽에 정착했고, 석씨계는 해로를 통해 이주한 집단이다. 아직까지 청동기 사회였던 촌락연맹체에 철기 기마족들의 출현은 강력한 지도자 계급의 출현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세 이주집단은 각각 경주분지의 중심부에 자리잡아, 박씨족은 오릉과 나정이 있는 금성지역을, 석씨족은 월성지역을, 김씨족은 계림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국가 경주의 이름은 사로국이었다. 경주의 중심부에는 세 왕가의 근거지가, 그 외곽에 6개 촌락이 전통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른바 중심과 외곽, 왕가의 도심부와 촌장들의 주변부가 형성되어 도시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당시 사로국의 인구는 2만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나의 촌락은 500호, 인구 2500여명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이 당시 경주의 도시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지 작은 도시국가로서 출발한 상황을 미루어, 금성 계림 반월성 지역에 소박한 형태의 궁궐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촌장들이 중심이 된 귀족회의에서 세 성씨 왕가 중 한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던 시절이었기에, 별도의 정식 왕궁이 있었다기 보다는 각 왕가의 사저가 임시 왕궁으로 쓰였을 것이다. 또 사로국 동맹의 근본 목적이 대내적 단합과 대외적 정복에 있었기 때문에 항시 전시체제를 유지했고, 전시체제 아래서 대규모의 왕궁이나 기념물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구릉의 모습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계림숲, 반월성, 금성과 오릉 등이 시내의 중심을 형성하고 주변에 인가들이 산재한 소박한 모습의 도시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초기 사로국의 정치적 상황이 얼마나 불안했는가를 전해 주는 전설이 있다. 금성지역에 있는 오릉은 박혁거세의 무덤으로 전한다. 혁거세 임금은 즉위한지 62년만에 하늘로 올라갔다. 승천 7일만에 시체가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났다.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려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하는 수 없이 5조각의 시신을 각각 장사지내 무덤의 봉분이 5개가 되어 오릉이라 했다는 전설. 설화의 내용은 초기 사로국의 권력투쟁과 임금 암살의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촌도시 경주가 구태를 벗고 국제적인 형식과 규모의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5세기 들어서다. 이 시기는 박석김 세 왕가의 윤번제 왕위계승이 끝나고 김씨 왕가의 세습제가 실시된 시기와도 일치한다. 왕권의 안정은 곧 신라가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변의 군소 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가적 부가 증대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화된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김씨 왕조는 경주시역에 사각형 가로체계를 도입해 도시를 정비했다.
이른바 ‘방리제’라 부르는 이 격자형 도시형식은 고대 중국 뿐 아니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로마 등 모든 고대 전제왕국에서 흔히 나타난 도시형식이었다. 격자형 도시체계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로망과 도시를 완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모든 블록을 평등하게 나누어 같은 조건을 갖게 하여, 시민권이 지배권력에 의해 제한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민들은 똑같이 작은 대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지만, 왕은 몇 개의 블록을 차지한 거대한 공간적 특혜를 누리기 때문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공간적 형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이 방리제의 일면이기도 하다.
신라 왕경의 1방리(坊里)는 가로 세로 164-5m 정도 (100보=800척)였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시내의 방리들은 3가지 폭의 도로에 의해 연결된다. 대로는 수레 9대 폭 (10보, 15.5m) / 중로는 수레 5대 폭 (9m) / 소로는 수레 3대 폭 (5.5m) / 이 도로 폭의 기준은 <周禮> 考工記 匠人條에 규정된 중국 제도와 일치한다.
비록 격자형의 방리제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기존 권력층이 이루어 놓은 계림 월성 금성등의 자연스러운 형태는 변화시키지 않았다. 또한 오릉을 시작으로 시내 곳곳에 축조된 거대한 고분군들 역시 방리제 계획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불규칙한 형태의 왕성과 숲들, 고분군들이 질서정연하게 계획된 격자 가로망 사이에 자리잡은 꼴이 됐다. 경주가 아무리 방리제를 따라 격자형 도시로 정비됐다 하더라도, 기존의 자연적 유기적 질서는 그대로 살아남아, 곡선과 직선, 규칙과 불규칙이 조화되는 인간적인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대에 조성된 당나라의 장안이나 일본의 평성경이 왕궁을 포함해 모든 시설이 예외 없이 격자형 질서를 따라 만들어진 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전성기 경주의 가구수는 17만 5천호, 인구 백만에 육박하는 거대도시였다. 여기에는 360개의 가구블록들이 방리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도시 내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이 기와집 뿐이었고, 연기가 날까봐 모든 연료는 숯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성안에는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니 호화의 극을 다한 일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열집 건너 하나 정도로 절이 들어섰고 탑들은 기러기 떼 같이 즐비했다고 한다.
불교 사찰은 경주의 도시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시설물이었다. 모든 시민이 불교신도였고, 중은 귀족출신의 남자들만 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아이의 잉태부터 출생, 생일, 혼사, 회갑, 장례 등 일생의 모든 의례들은 사찰에서 행해졌다.
시내의 절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황룡사였다. 황룡사는 전성기 경주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국가적인 사찰이었고, 4개의 방리 블록을 차지하여 왕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위용을 자랑했다. 황룡사 앞의 넓은 광장은 항시 시장이 열려 사람들이 북적였던 곳으로 사찰은 종교적인 중심일 뿐 아니라 각종 시민생활의 중심이기도 했다. 황룡사 외에도 흥복사와 분황사 등은 한 블록 전체를 차지한 대규모 사찰이었다.
황룡사는 왕실에서 직접 지은 국가적 대표 사찰일 뿐 아니라, 경주 도시계획의 새로운 중심이었다. 6세기에 기존 시가지에서 동쪽 평야지역을 확장한 새로운 경주는 사방에 중요한 4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도시였다. 소금강산(북), 금오산(남), 명활산(동), 선도산(서)이 그것으로, 황룡사는 이들 4개 산 정상을 잇는 지형축의 교차점에 위치했다.
격자형 도시체계는 평지 도시에 맞는 형식이었다. 경주는 근본적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 지형이고, 서천 북천 동천의 세 개천이 시내를 관통해 흐른다. 따라서 기하학적인 방리제가 지형과 잘 들어맞지 않는 부분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 개의 하천은 도시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커다란 장애요소였다. 따라서 수많은 다리들을 놓아 가로를 연결하여 시민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따라서 유독 다리에 얽힌 설화와 전설들이 많이 전해온다.
엉뚱한 이야기의 다리는 귀교였다. 한창 도시가 건설중인 진평왕 때, 비형랑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날 때부터 예사 아이와는 다르더니 커서는 도깨비들의 대장이 됐다. 이를 알아챈 임금이 비형랑을 시험하느라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을 것을 명령했다. 비형랑의 인솔하에 경주 시내의 도깨비들이 총출동해 거뜬히 다리를 완성하니 붙여진 이름이었다. 건설이 지상 목표였던 시절에, 귀신같은 기술과 초스피드의 공사일정 때문에 생겨난 설화로 여겨진다.
기록 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다리는 월정교와 일정교였다. 모두 반월성 주변에 놓여졌던 가장 중요한 다리다. 현재 유구가 발굴돼 있는 월정교 인근에는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있었다. 당대의 천재 승려 원효대사는 일부러 월정교에 빠졌고,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 들어가 과부인 공주와 사랑을 싻 틔웠다. 그 파격적인 사랑의 과실로 태어난 이가 신라 최고의 학자이자, 이 나라 지식계의 체계를 세운 설총이었다.
또 효불효교라는 이름의 다리도 있었다. 과부가 된 어머니가 개천 건너 홀아비와 눈이 맞아 밤마다 애들을 재워 놓고 홀아비 집을 다녀오느라 항상 치마가 물에 젖었다. 이를 눈치챈 아들들이 어머니를 위한다고 몰래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어머니에겐 효도였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라 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두가 다리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고, 당시 경주시민들의 낭만적인 생활과 자유로운 연애관을 엿보게 하는 설화들이다.
경주가 어느 정도 대도시의 체계를 갖추고, 약소국이었던 사로국이 어엿한 신라왕국으로 성장하여 백제 고구려와 대등한 국력을 겨루던 당시부터 경주는 국제적인 교역의 도시로 동아시아의 거점이 됐다. 백제와 고구려에 둘러 쌓여 외국과 통하는 육로가 두절된 상황에서도 중국, 인도, 아라비아 지역까지 교역의 대상이었다.
미추왕릉에서 나온 유리병은 아라비아 제품이었고, 천마총에서 나온 술병과 동일한 형태의 것이 아라비아 지역에서 발견됐다. 경주 괘릉에 있는 군인 석상들은 영락없는 아랍인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창 뒤의 이야기지만 유명한 처용설화의 주인공 처용은 아라비아 지방에서 건너온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이 외국인은 현지처의 불륜을 눈감아주었고 그 아량과 낭만적 성품이 소문나서 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아직도 외국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화됐던 국제도시 경주의 단면을 보여주는 설화다.
최근 동서교류사의 연구에 의하면, 아라비아나 소아시아 지역 (西域)에서 유행한 패션이나 장신구가 경주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해로로 6주, 육로로 6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인구 2만도 안 되는 촌락도시에서 출발하여 100만의 국제적인 대도시로 성장하기까지 경주는 많은 시련과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특히 5세기 대대적인 도시정비가 시행될 때, 전혀 새로운 도시체계를 만들면서도 발생기의 중심지들을 보존한 탁월한 안목과 능력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경주는 거대한 동산 같은 고분들이 곡선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그것들이 기하학적이고 직선적인 가로망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 이런 도시는 발견하기 어렵다. 죽은 자와 산 자들의 공간이 이처럼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만나고 뒤섞이는 도시는 경주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