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1.09.03.
출처
아시아나
분류
건축문화유산

慶尙南道 咸陽郡 水東面 院坪里에 있는 남계서원은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건축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지어진 건물 속에는 그 건물의 건축가나 건축주의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특정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야말로 이 격언이 가장 잘 들어맞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사설 학교인 서원이 설립되려면 특정 선현의 위패를 사당에 모시어 主享者로 삼고, 주기적인 祭享을 올려야한다. 서원은 성리학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에 주향자는 자타가 인정하는 위대한 성리학자여야 하며, 그의 철학이나 사상이 바로 서원의 교육 이념이 되기 때문이다. 서원의 설립주체는 주로 주향자의 제자들이나 후손, 또는 연고지의 후학들이며, 이들은 주향자의 학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서원 건축에도 그 학풍은 표현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서원건축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 주향자의 인품과 학문세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慶尙南道 咸陽郡 水東面 院坪里에 있는 남계서원은 一蠹 鄭汝昌(1450-1504)의 학덕을 기념하여, 이 지역의 유림이었던 姜翼(1523-1567)과 당시 함양군수 徐九淵의 노력으로 1552년에 설립된 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되었으며, 1597년 일본과의 전쟁(임진왜란을 일본어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에서 불타 없어진 것을 1612년 재건한 이후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정여창은 서원이 있는 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부친은 중하급 관리로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었고 그나마 일찍 죽어서, 가계는 홀어머니와 어린 정여창의 몫으로 남아 무척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공한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어린 정여창은 매우 총명한 아이였고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당시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대유학자 金宗直(1432-1492)의 눈에 띄어 학문을 전수받게 되고, 친구였던 金宏弼(1454-1504)과 함께 김종직의 수제자가 되어 당대의 큰 성리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 위대한 스승을 만난 행운은 철저한 도학자로 일생을 살 수 밖에 없도록 규정했으며, 끔찍히 불행한 말년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의 시작이었다.
성장기의 정여창이 총명하고 성실한 모범생으로 살았다면, 청년기의 그는 강직한 비판적 은둔자의 삶을 택했다. 그는 암기하여 앵무새같이 반복하는 학문을 극도로 혐오했고, 유학의 근본서인 <논어>에 밝아서 만물의 근원적인 성질과 이치를 탐구하기를 지극히 좋아했다. 따라서 단순히 중국의 성리학을 수입하는 차원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조선 유학의 학풍을 수립하게 된다. 또한, 출세를 위한 노력을 일절 배제하여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만 몰두했고, 그 결과 그의 학문적 명성과 고고한 인품이 전국에 알려져 중앙관직에 추천되기 했으나 과감히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