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꿈이 세 개 있다. 이십 년 전, 대학원 1학기 과제는 소공동 재개발 계획이었고 제출기한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제대로 풀었거나 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막막한 초여름이었다. 생각은 안 떠오르고, 시간은 자꾸 지나고, 조바심만으로 나흘 날밤을 새다보니 시도 때도 없이 졸음만 쏟아져 왔다. 그 꿈도 깜빡 잠에 찾아왔다. 한 두 시간 잤을까, 꿈속에 소공동 일대의 광경이 펼쳐지는데 전혀 다른 모습의 빌딩들이 솟아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처럼 갈구하던 아이디어가 마치 계시처럼 꿈에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거야! 거의 외치듯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스케치하고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 하루만에 완성된 설계안을 의기양양하게 학교에 제출했다. 물론 평가는 최고의 학점으로 돌아왔다. 하도 신기해서 친한 친구에게 자랑을 했더니, 그 친구 왈, “너 만화 열심히 보더니 덕 봤구나.” 이게 무슨 소린가? 아, 집히는 것이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고인돌’이라는 만화의 주인공이 야구시합에 나가 번번히 깨지다가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점지해 준대로 홈런을 치게된다는 코믹한 만화를 보고 낄낄거리던 게 바로 열흘 전이었다.
오 년 후에 그런 유쾌한 꿈을 또 꿀 수 있었다. 경북의 어느 한옥을 조사하면서 한 일주일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 이백년쯤 묵은 집의 건축적 비밀을 도무지 풀 수가 없어 답답했다. 왜 이렇게 집을 지었을까? 이 집을 지은 선조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다 떠나기 하루 전, 집주인과 밤술을 얼큰히 걸치고 그 집의 사랑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드디어 그 집의 조상들이 나타났다. 푸른 도포에 갓을 쓴 노인 두 분이 나타나 “내 집을 조사해주니 고맙소”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조사 내내 의문을 가졌던 질문들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잠을 깼는데 그렇게 머리가 상쾌할 수가 없었다. 꿈 속 노인들의 대답을 기억하며 집을 한바퀴 돌아봤더니 미처 보이지 않았던 비밀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그 후, 그 대답들을 기초로 보고서와 논문을 작성하여 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물론 학술적 논문에 꿈 이야기를 차마 쓸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문제는 이태 후에 받은 한 통의 편지였다. 그 집의 막내아들 역시 다른 대학의 건축과 교수였는데, 내 보고서를 그때야 본 모양이었다. 내용은 내 보고서가 그도 모르는 비밀들을 잘 풀어주어 신기한데, 결정적으로 건립 연대 등 몇 가지가 틀렸다는 비판과 함께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했다. 벌써 뜨끔했는데, 마지막 문장은 아예 과녁을 꿰뚫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상상력이 지나쳐 몇 가지 실수를 범했으니, 혹시 꿈이라도 꾼 게 아닌가요?”
가장 기뻤고 동시에 가장 한스러웠던 꿈이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프랑스의 르 꼬르뷔제를 꼽는다. 그의 대표작은 프랑스 리용 근처에 있는 라 뚜레뜨 수도원인데, 다시 오 년 후, 그러니까 십 년 전, 그 집에 가서 하루 밤 잘 수 있는 영광된 기회를 가지게 됐다. 한국의 내노라하는 건축가들과 같이 간 여행이었는데, 모두들 그 수도원의 건축적 감동에 취해 잠이 들었다. 원래 수도원이었으니 내 침실 역시 수사들이 쓰던 일인실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명작이라 해도 캄캄한 수도원의 밤은 을씨년스러웠고, 여러 가지 감상에 깊은 잠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비몽사몽간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드디어 그 위대한 꼬르뷔제 선생이 나타났다. 아마도 전혀 할 줄 모르는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여러 질문들에 그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고, 꿈이 깨는 순간 나는 건축의 진리를 모두 깨우쳤다는 희열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같이 아침을 먹던 일행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너무 엄청난 깨달음의 비밀을 발설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게 비극의 원인이었다. 하루가 지나니 그 깨달음의 내용, 꿈속의 가르침을 모두 잊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히 지워질 수 있을까? 뒤늦은 고백을 들은 일행들은 “그런 꿈은 빨리 얘길 해야지”하며 타박을 했다. 그 후 십 년간은 회한의 기간이었다. 그 꿈의 일부만이라도 기억이 난다면 정말 끝내주는 연구를 할텐데 하는 아쉬움의 연속이었다. 올 초 봄날, 꼬르뷔제의 책을 뒤지다가 어떤 페이지에서 드디어 그 꿈의 내용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바로 그 페이지에 쓰여진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들에는 이미 밑줄이 그어져 있었으니, 십 오 년 전에 내가 읽었던 글들이 아닌가? 잊었던 가르침을 꿈속의 꼬르뷔제가 다시 알려준 것이었다. 지금 보면 그다지 대단한 깨우침도 아니다.
비록 결말은 허망했지만 그 꿈들의 효능은 대단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진리의 영이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왕꿈들은 우연히도 오 년 주기로 찾아왔기 때문에 오 년 전부터 다시 한번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딱 세 번뿐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는 왕꿈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왕꿈은 고사하고 개꿈이라도 꾸어본 날이 기껏해야 일년에 서너번 정도다. 그런지 벌써 여러 해가 됐다. 나이가 든 것일까? 세속의 피곤에 짓눌린 것일까? 이제는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