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1.01.01.
출처
건축문화
분류
건축비평

1.건축가의 개인성과 사회성

건축가들의 의식과 삶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르기 쉽다. 특히 예술로서의 건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특이한 경력을 갖기 일쑤다. 그것은 간혹 기벽이나 독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때는 그러한 것이 위대한 작가가 되는 전제조건 쯤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 건축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하고, 건축가는 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이 경우 건축가의 사회란 자신이 존재해 나갈 환경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회는 사회이되 지극히 개인화된 사회이다.
건축가로서의 조건영이 가지고 있는 의식과 삶의 경력은 독특하다. 이때 독특하다는 것은 사회의 보편적 구성원으로서의 평가가 아니라, 소위 건축가들의 독특함과 비교해 독특하다는 말이다.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보편적 인간 조건영은 건축계의 기준으로 볼 때 독특한 인물이 되고 만다. 어느 건축가를 통해서도 이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지만 조건영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서는 이 시대 이 땅에 일어난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보다 극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문제 뿐 아니라 건축적인 상황까지도 포함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건축가 자체로서보다 8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결부돼 언급되기 일쑤다. 아직 40대의 연륜과 몇년간의 공백 때문에 또 그 자신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스스로의 홍보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정당한 평가가 여론화되지 못한 까닭도 있다. 어쨌든 그는 80년 서울의 봄이 백일몽으로 깨져 버리던 시절 혹독한 고초를 겪고 해외로 훌쩍 떠난 유일한 건축인으로 기억되어 왔으며, 85년 귀국 후에도 그의 작품보다는 그가 관여한 사회적 활동이 화제의 촛점이 되었다.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예총)의 건축분과 위원장으로서, 청년 건축인 협의회 (청건협)의 후원자로서, 정치적 서명 명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등의 활동은 소위 재야 건축가라는 오해를 일으킬만 했다. 더욱이 그가 교류했던 황석영 오윤 최민 심우성…등의 면면을 본다면 건축가로서 보다는 양심적 지식인 예술가로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러한 건축외적 평가는 건축가로서의 조건영을 이해하고 비평하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근작인 동숭동의 J&S 빌딩이 완공되었을 때, 스스로 그를 알고 있다고 자처하던 이들은 당혹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소위 민중적 건축가의 작품으로는 너무나 세련되고 현대적이었기 때문이었고, 하이테크 건축 경향에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확히 말한다면 하필이면 그가 서구 자본주의의 표상인 하이테크를 추종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한편 그를 아끼고 존경하던 측의 이 건물이 리얼리즘 미학이 이루어낸 쾌거이며 현 사회의 소외상을 표현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방향의 반응은 모두 건축외적인 차원의 시각을 건축에 대입한 피상적인 결과로 보여진다. 이 건물은 하이테크나 리얼리즘으로 보기 이전에 건축가 조건영의 작품이며, 작가가 추구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평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가로서의 정당한 평가는 건축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예컨데 귀족주의자 미스의 범주 안에서 환스워드 주택을 평가할 수없고, 근대 건축의 지평을 연 미스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호모 촬스 무어의 낙인으로 크레스지 컬리지를 평가할 수 없듯이, 우리의 거장 김수근이 부인을 여럿 두었다는 스캔달은 자연인 김수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과 정신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물론 건축가 조건영이 가진 사회에 대한 인식과 역사적 이해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영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의 단면을 문자나 그림을 통해 재현할 수 있는 문학과 회화에 비해, 건축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비재현적인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건축가의 스타일이 곧바로 건축의 스타일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조건영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축 본연의 속성과 현 한국 건축계의 상황을 통한 구조적 인식을 통해서 가능하리라 본다. 마찬가지로 조건영 개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 건축계의 보편적 문제에 접근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지금의 조건영론은 그러한 양면적 의미를 갖는다.

2.작품에 나타난 기하학과 실험정신

남보다 빨랐던 출발에 비해 완공된 건물로서 나타난 조건영의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해인 72년 종로4가의 상업은행 지점을 설계함으로써 대단한 행운을안고 출발한 셈이다. 그후 80년 초까지 “기인건축”을 운영하면서 주택공사의 아파트 단지계획, 율산의 서울 고속터미날 기본계획등 제법 큰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나 많은 작업이 실현되지 못했거나 실현되었더라도 소위 작품성을 부각하기 어려운 종류의 일들이었다. 굳이 꼽는다면 상업은행 지점과 79년의 신사동 주택 2동을 들 수 있다.
최초의 작품인 상업은행 지점은 광장시장과 종로통의 모퉁이를 이루는 곳에 서 있다. (사진-1) 원래의 계획은 10여층의 중층건물로 계획했으나 현상태에 그쳤으니 미완성의 건물이다. 획기적인 것은 모퉁이에 면한 파사드의 처리다. 친우인 오윤이 제작한 테라코타 부조가 전면을 덮고 있으니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부에서 눈에 띠는 것은 나선형의 묘한 계단이다. 건물 전체를 평가하기 보다는 이 두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직 본격화는 안 되었지만 이 두 요소의 발상을 통해 그가 이후에 보여준 건축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실험정신이다. 비록 완성도는 미흡하고 또 전체를 엮지 못한 부분에 그친 실험이지만, 평범함을 거부하는 엘리트 의식이 짙게 깔려있음은 최초의 작품부터 읽을 수 있다. 79년에 설계한 신사동 주택은 지금은 헐리고 없다. (사진-2) 고속도로 초입에 45도 박공형의 주택 2동을 나란히 지었다. 한집은 청색, 다른 한집은 백색타일로 벽체 뿐 아니라 지붕까지 마감했다. 이 주택들 역시 붉은 벽돌에 기와지붕의 처마를 드리운 당시의 영동식 주택에 대한 거부의 발로다. 타일이 주택의 재료로 성공할 수 있는가, 동일한 재료로 벽체와 지붕을 처리할 때 또 같은 형태에 다른 색채를 부여할 때 얻어지는 건축적 효과는 무엇인가? 가 이 계획의 원점이었을 것이다. 건축의 통념을 깨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패기의 작품이었다.
실험정신이란 건축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류의 실험이란 한반도 바깥에서는 이미 일상적인 것을 최초로 도입한 것에 불과할 때가 많다. 소위 전위적이라는 작가들까지를 포함해 그러한 구한말식의 선각자들의 작품은 강렬한 에너지보다는 세련성만이 부각되기 일쑤다. 이들과는 달리 70년대 조건영의 실험은 세련도와 완성도는 부족하지만 자신의 건축적 성찰을 통한 자생적인 힘이 있다. 이 시기에 만난 남창녕은 현재까지 조건영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남창녕은 소위 재야의 기하학자였다. 그가 고안한 기학학 이론은 공간지 75년 1월호에 “기하학적 현상학 시론”으로 정리돼 있다. 심오한 이론의 실체는 이해할 수 없으나 대략 √2 사각형 격자가 무한히 중첩된 구조가 모든 형태의 출발이며 가장 완전한 구조라는 요지다. 청년 시절의 조건영은 이 신비로운 기하학자의 이론을 전수받는 데 심취했다. 공간지의 논문도 그가 정리한 것이며 무수히 많은 모형을 만들어 (사진-3) 입체적 증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기하학적 훈련은 건축가로서의 그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기학학은 그를 더욱 더 논리적으로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입체에 대한 자신만의 원리를 터득케 했기 때문이다.
혹독한 80년을 넘기고 미국으로 떠난 그는 85년에 돌아왔다. 그 5년동안 그가 무엇을 보고 배워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기산건축”으로 활동을 재개한 그의 작품들은 청년시절부터 지녔던 기하학적 사고의 한차원 높은 실험으로 비춰진다. 주목할 만한 것들은 86년의 불광동 근린생활시설 (자택), 89년의 역삼동 주택, 90년의 J&S 빌딩이며, 계획안으로 유보된 서울 미술관 계획, 계획 중인 프랑소와즈 사옥이다.
불광동 근린생활 시설의 실재 용도는 다가구 주택이다. 작가에 대한 급진적인 소문과는 달리 서정적인 건물이다. (사진-4,5. 도면-1) 좁은 대지에서 최대 용적을 확보한 알뜰함이나 전면의 피로티 내민 창등 흡사 70년대의 텍스트를 보는 듯한 차분함이 있다. 다가구 주택이라는 기능을 중정의 형성으로 풀어나가는 현명함도 엿보인다. 전체적인 평범함에 비해 중정의 구성은 파격적이다. 한층 떠서 대각선으로 놓인 브릿지와 양 끝의 나선형 계단. 예의 대각선 계단은 작가가 즐겨 쓰는 어휘다. 단지 습관적으로 얹혀진 전면의 삼각 페디먼트는 눈에 거슬린다.
역삼동 주택과 J&S 빌딩은 같은 시기에 설계된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현격히 다른 모습이다. 역삼동 주택은 디컨스트럭션의 영향이 다분하며, J&S 빌딩은 굳이 명명하자면 하이테크 건축 경향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주제가 되는 건축적 개념은 명쾌한 기하학적 구조이다. 두 작품을 서울의 많은 유행적 건물과 구별해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기하학적 개념에 있다. 즉 유행처럼 만연한 디컨스트럭션이나 하이테크를 자신의 주제를 풀어나가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다.
역삼동 주택은 안채와 바깥채의 두 건물로 이루어 진다. (사진-6,7. 도면-2) 한 주택에서 두 건물은 기능적으로 분리되지만, 대지 전체에 수용한 격자의 구조는 두 건물을 전체로 묶어주는 장치인 동시에 역학적 해석이기도 하다. 기본 틀인 격자 구조 사이에 역학적 부담에서 해방된 외벽들은 자유로운 곡선으로 운동한다. 내부 구성에 있어서도 규격화된 공간 단위에 파격적인 계단의 설정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바깥채는 오픈된 거실에 비스듬한 직선계단을 놓음으로써, 안채는 예의 대각선 계단을 삽입함으로써, 외관에서 나타난 변화를 내부에도 재현한다. 뿐만 아니고 직선적인 격자틀 마저도 경사를 주어 전체적인 역동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개념과는 달리 두 건물은 분리되어 보일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우려한 듯 초기 스케치에서는 중정까지도 격자 구조가 설정되어 있고, 두 건물 사이의 중앙을 가르는 곡선 브릿지가 고안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도면-3) 두 건물의 분리현상은 초기 구상이 실현되지 못한데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정의 용도와 공간적 형식을 생각해 본다면, 초기의 격자 구조나 브릿지의 발상은 실현되지 못할 필연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조건영의 작품에서도 결점으로 보였던 문제들 – 즉 지나친 개념적 구성에서 비롯된 현실적 수용 단계에서 나타날 문제들의 경시 현상-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채 현실의 제약에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J&S 빌딩은 보여지는 형태의 이질성과는 달리 개념의 주제나 문제점까지도 역삼동 주택과 동일선 상에 있다. 영동 일대의 진부한 고급주택의 규범을 거부했 듯이, 동숭동 하면 연상되는 붉은 벽돌 건물들의 강요를 거부한다. (사진-8,9,10,11. 도면-4) 70년대 김수근의 독무대가 되었던 이 동네는 80년대에 와서도 그 아류들의 건축으로 가득 채워졌다. 젊음의 광장은 붉은 색이 되었고, 대학 문화는 조적조의 무게에 눌려 버렸다. 획일적 분위기에 반발한 몇 건물이 있기는 있다. J&S 빌딩의 양 옆에는 두손 갤러리와 뽀빠이 하우스가 서 있다. 이 동네 건물 중 그나마 구별이 되는 건물이지만, 뽀빠이 하우스는 상업성에 지나치게 충실한 결과 간판과 같이 돼 버렸고, 두손 갤러리는 애초에 흰 뿜칠 몰탈의 건물이었으나 슬그머니 벽돌 분위기의 타일로 둔갑하고 말았다. 이 동네의 진부한 건축적 규범이 얼마나 강한가의 반증이다.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 안에서 작가는 컨텍스트의 해석을 달리했다. 주위 환경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로 귀착될 수 있다. 주위 환경의 건축적 가치가 높을 때는 주변에 순응하는 태도이고,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다고 판단할 때는 새로운 형식을 추구함으로써 가치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작가가 판단한 동숭동의 건축과 환경은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기존의 건축과는 전혀 다른 –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건축만이 장소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아, 반反조적의 형식과 밝고 경쾌한 내용을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철골의 구조적 실험과 삼각형을 주조로 한 날카로운 기하학의 구성이다. 내용의 경쾌함은 아슬아슬한 철골 파이프의 긴장감으로 나타났고, 반조적의 형식은 비판적인 삼각 매스와 형태로 나타났다.
역삼동 주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근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형태와 공간의 역동성이다. 역삼동의 경우 그것이 직선적 격자 틀 안에서의 자유로운 곡선의 운동으로 나타났다면, 동숭동의 경우는 정적인 컨텍스트에 반항하는 형태와 재료 구조법으로 나타난다. 특히 세개의 철제 파이프가 긴 아이빔을 매달고 있는 구조 개념은 대단한 실험이다. 따라서 두 작품에 있어서 외형의 유행성이란 기하학적 구성법을 실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며, 그 근본에는 건축적 현실에 대한 부정과 변화의 의지가 깔려 있다. 안이한 한국건축계의 풍토에서 특히 부족한 것이 실험 정신이고 전위적 사고임에는 틀림없고, 조건영은 그점에서 가장 기대를 모을 수 있는 작가이다. 그러나 실험적 태도는 종종 비현실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건축적 실험이 결국은 현실화되지 못하고 페이퍼 아키텍트로 머무른 예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미흡한 기술 수준 때문이라고 정당화 할 수 있더라도, 현재의 하이테크나 디컨스트럭션의 실현이 진정한 현실화인가의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급진적인 전위란 건축이 추구해야 할 많은 가치 중 일부분만을 실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험이란 모든 것이 조화된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성이 실험의 속성이라 이해는 한다. 그렇다고 실험이 건축의 궁극적 목표는 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여러가지 건축 조류를 포함한 조건영의 작업이 긍정적인 것은 현재적 관점에서만 허용된다.
조건영에 대한 평가는 가시적인 그의 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작가 정신에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J&S 빌딩에서 엿볼 수 있는 무모한 시도나 과장된 형태 필연성이 미흡한 대지의 해석 등 부분적인 문제는 양해할 수 있고,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현재 계획 중인 프랑소와즈 사옥은 그의 기하학적 실험정신이 한단계 원숙한 결실로 나타날 것이다. (사진-12)

3.우리 건축계에서의 그의 위상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우리 건축계의 흐름 중 건축가 조건영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있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건축계 내부의 활발한 이론 연구열이고, 또 하나는 많은 건축 운동단체들의 출현이다.
80년대 들어 대학원 교육열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건축 이론 탐구열이 높아졌고, 여기에 해외 여행 자유화 등의 유행은 국제적 조류의 소개와 도입을 활발케 했다. 이러한 외적 기반 위에 5공화국이 시행한 대형 현상설계를 계기로 기성 건축가들 역시 작품의 이론적 근거를 갈구하게 되어, 포스트 모더니즘 기호학 유형학 하이테크 신고전주의 등의 소개를 거쳐 디컨스트럭션의 단계에 까지 와 있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이제는 주장이 없는 건축, 설명되지 못하는 건축은 더이상 존립 근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카데미즘이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조건영 역시 80년대 초 미국 유랑을 통해 국제적 보편성을 체득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최근 러시아 구성주의와 디컨스트럭션의 이론에 지대한 흥미를 보이고 있다.
80년대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는 서울의 봄과 연이은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출발한다. 건축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본다면 앞서 말한 이론 탐구열 역시 범사회적 좌절과 자각의 분위기에서 발생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가해진 커다란 충격과 각성은 건축 분야에도 이전과는 다른 운동을 창출케 되었는데, 설계 보조원들의 노조결성, 민예총의 건축분과 신설, 청년건축인 협의회의 창설이 그 가시적 결과이다. 건축은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의 시녀가 아니며, 건축가는 더이상 수동적인 단순 기술자가 아니고 사회와 건조환경에 대한 진단자이며 적극적인 치료자라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2,30대의 소장층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전면에 부각된 것은 조건영이었다.
이론 탐구열과 사회적 운동의 분야는 안타깝게도 상호 보완적이기 보다는 배타적이며, 소위 “재야”의 개념에는 민중 민족적 가치 우선의 묵계가 내재해 있어, 비자생적 이론의 도입에 극히 부정적이다. 이 점은 우리 건축계의 지성들이 당면한 전체의 위기이다. 서구 이론의 심취와 탐구는 무국적주의로 비난받으며 민족적 정서의 기반 위에서 현실 참여를 하려는 노력은 좌파적 모험주의로 경계된다. 확장해 말한다면 젊은 층의 노력은 엘리트와 민중주의, 자율적 접근과 외연적 접근으로 이분되려는 조짐이 농후하다.
이러한 이분적 상황에서 기성건축가인 조건영의 위상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그의 내면에서 이해하자면 그는 양자 사이의 단절과 대립을 원치 않는다. 국제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은 결합 가능한 것으로 믿으며, 전위적 정신 만이 양자를 결합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의식하던 않던 간에 그 가능성에 그 자신이 가장 접근해 있음은 확실하다. 아직은 그의 건축 작업을 통해 변증법적인 창조를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작가적 역량과 역사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이력을 모두 겸비한 극소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과거 저항 문화를 주도했던 김지하 김민기 오윤 등을 볼 때 그들 모두 위대한 저항정신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뛰어난 서정성의 예술가들임을 알 수 있다. 현재에 와서는 투쟁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모두 배척받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다. 현재 가해지고 있는 이러한 비난은 무책임하고 가혹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시절에 이들은 새로운 씨를 뿌렸고 비난하는 이들은 사실 그 과실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하여 그들 자신이 변했다 하더라도 과거의 역할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가 조건영은 혼란한 이 시대에 선명한 이념과 성실한 자세, 뿐만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지녀, 많은 기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의 재능이 그를 위해 또 우리를 위해 꽃피우길 기대한다면, 그가 안고 있는 부담 – 집단 운동에 대한 의무감, 또 낭만적 성향에 대한 비판 들- 이 제거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사명감은 자유로운 창작을 방해하게 되며, 낭만성을 제거한다면 개인적 창조성도 제거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건축계는 집단적 운동 뿐 아니라 개인의 성취를 통해 변화되고 발전되어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사진 도면 리스트>

사진 1.상업은행 종로4가 지점- 전경및 벽화부분
2. 신사동 주택 2동- 입면
3. 입체격자 모형 2점
4. 불광동 근린생활 시설 (플러스 8709) – 전경
5. 同 – 중정+브릿지
6. 역삼동 주택 (플러스8910) – 전경
7. 同 – 주동 전경
8. J&S 빌딩 (공간9005) – 측면전경
9. 同 – 정면전경
10. 同 – 부분상세
11. 同 – 부분상세
12. 프랑소와즈 사옥 모형

도면 1. 불광동 근린생활 시설 1층 평면도
2. 역삼동 주택 1층평면도
3. 역삼동 주택 초기 스케치2. (플러스 8910. 123쪽)
4. J&S 빌딩 배치+1층평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