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4.01.12.
출처
부산일보
분류
기타

새해까지도 뚜렷한 방향 없이 표류하고 있는 국가적 난제들이 있다. 이라크 추가 파병을 천명하면서도 구체적인 규모나 일정은 누구도 모른다. 부안에 핵폐기물 처리장문제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미봉책만 남겼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의회 비준을 미루고 미루더니 끝내 다음 임시국회나 총선 뒤로 연기되고 말았다.
3가지 난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정도 사안이면 정치권은 여야로 갈려서, 언론과 지식층들은 보혁으로 갈려 격렬한 찬반 논쟁을 벌일 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 소신을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론분열은 고사하고, 누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주장이 있기나 한지 알 수 없는 묘한 상황이다. 여당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지만 할 수 없으면 파병하자고 하고, 야당은 내심 찬성하지만 나서서 표 나게 찬성할 수는 없다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핵폐기물 처리장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모두 동의를 하면서도 굳이 부안이나 특정지역일 이유가 뭐냐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의견을 피력한다. FTA는 여야 지도부 모두 비준하기로 합의를 보았으면서도 초정당적으로 결집된 ‘농민당’의 반대로 그 강력한 지도부의 결정조차 무시된 채 유보되었다.
총선을 앞에 두고 표와 당락에 모든 목줄을 걸고 있는 정치권의 표리부동, 오월동주, 오리무중은 그런대로 이해하자. 어차피 한국의 정치가들에게 분별과 이성, 소신과 정의를 기대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여론 지도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마저 침묵하고 방관하는 현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보수와 진보의 양 대척점에 선 한두 언론에서나 의사를 표명할 뿐, 대부분의 언론들은 정부나 의회, 미국과 부안의 반응만을 중계 방송할 뿐, 자신들의 해설이나 주장을 밝히지 않는다.
여론이 이처럼 불투명한 것은 난제들의 밑바닥에 국익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파병을 찬성하자니 명분 없는 전쟁에 말려들 것이고, 반대하자니 미국의 비위를 긁어 혹 국익에 손해를 볼까봐, 아니 국익을 해친 장본인으로 몰릴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폐기물 처리장을 반대하자니 막대한 전력 수급이라는 국익에 상치되는 것이고, 찬성하자니 지역의 이익과 환경적 가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된다. FTA 비준에 찬성하자니 농민이 울고, 반대하자니 국익이 운다는 꼴이다. 국익이라는 대의명분 아래에서 세계 평화와 환경 보존과 농촌문제는 하위 가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익이란 모든 가치보다 우선하는가? 아무리 한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도 해서는 안되는 게 있다. 강도와 도적질을 통해서 개인의 이익을 취한다면 이는 처벌받아야할 중대한 범죄일 뿐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승하는 것이 국익이라 하지만, 침략과 약탈을 통해 얻어지는 국가적 이익마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국익에 앞서 인류애와 세계 정의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우선 인정한 후에 현실적인 대응전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익이란 무엇인가? 산업이 발달하니 에너지 소비가 급증하고, 이를 충당하자니 원자력 발전이 가장 효율적이고, 당연히 핵폐기물이 나오니 어딘가에 처리하는 것만이 국익인가? 에너지 저소비형 발전모델을 채택하여 환경을 보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국익일 수 있다. 특정 지역을 설득하기 위해 국력을 쏟기보다 단열 시공, 소형차 사용, 자원 절약을 의무화하여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것도 유용한 비전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적어도 국가적 이익이란 국민의 다수가 혜택을 보아야한다. 특정 소수계층만의 이익을 국익이라 할 수는 없다. 농업에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제조업과 정보통신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본다면 FTA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FTA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을 농촌에 환원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과 시행을 통해 국익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국익이라는 명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한다. 어디까지를 지킬 것인지, 어떤 정책이 더 근본적인 이익인지, 그리고 그 이익을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지. 이런 철학적 질문이 없다면 언론은 양비론에 그치고, 지식층은 우유부단한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국익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국력을 소모하는 모순에 빠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