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9.03.15.
출처
문화일보
분류
건축론

교과서를 고치자
몇해 전 런던에서 벌어진 주거단지 답사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아일스버리 주거단지 앞에서 인솔자인 휴고 힌슬리(당시 AA건축학교 선생)가 자랑을 늘어 놓았다. 5천호 규모의 그 단지는 유럽 최대의 주거단지였으며, 그 큰 규모를 불과 10년만에 건설했다고. 그러면서 물었다. 한국의 주거건설 실태는 어떠냐고. 물량과 속도라면 어디 뒤질 수 있는가. 우리는 10만호 정도의 신도시를 5년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너희들의 15층짜리 보다 훨씬 높은 25층 아파트로 가득채웠다. 이 철없는 자랑이 화근이었다. 그는 애처러운 눈으로 다시 물었다. 자기네 주거단지는 이미 60년대에 끝난 일인데, 아직도 너희네는 빈민들이 그처럼 많은가?
나를 비롯하여 형제 친척들 처가 식구들 모두 아파트에 살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들은 물론 빈민이 아니다. 대학시절 교과서에서는 분명히 배웠다. 아파트란 주거환경은 불량하지만 서민들을 위해 좁고 높게 지은 경제적인 주거형식이라고.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교과서를 고쳐 써야할 판이다. 고치는 김에 다음도 추가하자.
만일 한국에 아파트가 없다면. 1)30대는 30평, 40대는 40평 아파트하는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서 돈벌이에 게을러진다. 국가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손실이다. 2)그 수많은 베란다 샤시업자들, 이른바 인테리어 업자들의 일감이 없어져서 디자인과 산업발전의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다. 3)아파트 놀이터가 유일한 쉼터인데 우리 애들은 어디에서 놀까? 자전거는 롤러블레이드는 어디서 탈까? 4)이제 안전한 주택은 하나도 없다. 집집마다 흉기를 감추었다 도둑을 쫒는 수 밖에. 5)도무지 신도시를 개발할 방법이 없다. 1,2층 짜리 집들만 깔아 언제 30만호 40만호를 건설할 것인가? 6)밭일 마친 농부들도 엘리베이터 타고 집에 올라가야 기분이 풀리는데, 문명의 혜택을 볼 수 없으니 역시 농촌 복지에 문제가 생긴다. 7)무엇보다도 아직 우리 가족은 다가구주택 한층에서 주인집 눈치를 보며 한숨짓고 있을걸.
만일 아파트가 없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면서도 행복할 것 같다. 도대체 아파트란 축복인가, 저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