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열기는 아직도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잘 나가는 광고 화면마다 태극전사와 붉은 악마들이 가득 채우고 있고,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은 6월의 광기를 해석하기에 분주하다. 그 와중에 슬그머니 당선된 이명박 서울시장은 발 빠르게 청계천 복원공사와 시민광장 건설사업을 공약했다. 시민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대환영이다. 세계 4강이 꿈이 아니었듯이, 복개도로를 철거하고 도로를 막아 광장을 만드는게 뭐 어려울까?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아름다운 광통교가 다시 자태를 드러내고, 그 밑으로는 짙푸르게 흐르는 청계천. 얼마나 낭만적인 도시인가. 그러나, 고가도로 아래 어두 침침한 5평짜리 가게를 차려놓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수십만의 상인들의 재산권은 어찌할 건가. 고가도로와 복개도로 위를 달리는 수십만 대의 자동차들은 어디를 달려야하나. 시청앞 시민광장도 마찬가지다. 말이 광장이지, 시청 앞은 ‘교통광장’이라고 기묘하게 번역된 원형교차로(round about)다. 그것도 7갈래 간선도로가 모이고 갈라지는,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교통광장이다. 여기를 보행자들이 모일 수 있는 월드컵 기념광장으로 만든다면 당연히 소공로, 을지로, 서소문로, 태평로의 차량통행 대책을 먼저 물어야 한다. 막대한 상권 붕괴에 대한 대책, 불을 보듯 뻔한 교통문제의 해결 등 현실적 문제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없다면 그야말로 인기영합적 공약이요, 시민들의 이성을 기만하는 선전술일 뿐이다.
물론 서울시의 계획가들은 현실적인 해결책들을 찾고 있고, 제안할 것이다. 문제는 일반 여론 뿐 아니라 전문가들까지도 현실보다는 꿈을, 복잡한 문제는 회피하고 장밋빛 청사진에만 환호하는 지적 분위기다. 6월의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걸까, 우리들의 이성은 쉽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청개천 복원이 또 다른 개발과 파괴는 아닌지, 시청광장 조성이 얼굴을 바꾼 파시즘 공간을 만드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주체도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적이 전체주의라고 경고했다. 전통적인 소속감이 파괴된 산업사회에서 원자화된 인간들이 느끼는 적막함(erlassenheit)을 채울 공통 이념과 공동체적 환상을 제공하기 위해 전체주의가 등장한다. 근대사회에서는 그것이 파시즘의 형태로 등장했지만, 탈근대사회에서는 대중공연이나 스포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600만의 인구가 같은 옷을 입고 축구경기에 열광하며, 축제가 끝난 뒤 질서정연하게 청소까지 끝내는 과정을 시민의식의 성숙이라 봐야할지, 전체주의의 서곡이라 봐야할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외부 시각으로는 섬뜩한 국가주의의 표상으로 읽혀지기 쉽다.
광장은 개방된 공적 영역이기도 하지만, 양도된 권력이 공식적으로 행사되는 곳이기도 하다. 근대 사회에서 총통이나 독재적 대통령의 권력을 과시하고 복종하기 위해 가장 많이 활용된 공간이 광장이기도 하다. 시청앞 시민광장에 자발적으로 수십만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유의 많은 부분을 응원을 주도하는 연예인들과 대형 디지털 화면에 위임했던 것이다. 아렌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나갈 때, 권력을 위임 내지 양도한다는 것은 전체주의화하는 첫걸음이다. 그녀는 또한, 공적 영역에서 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의 평등성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개인의 개성과 자유의 구현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 서울에서, 그리고 이상건축 이번 호에서 논의하고 있는 시민광장이 파시즘의 훈련장이 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시민의 공공적 장소가 되는가는 계획의 목표와 실행과정에 달려있다. 우선 무엇을 위한 광장인가가 논의되어야 하고, 교통문제의 완벽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월드컵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시민들의 다양한 휴식과 활동을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기념성이란 일종의 강력한 권력이며, 기념광장이란 그 권력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