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3.01.28.
출처
미확인
분류
건축문화유산

천재 예술가 김정희의 고향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역사상 독보적인 예술의 천재로 손꼽힌다. 왕실의 핏줄이 섞인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웠고, 약관의 나이로 중국 청나라의 대가들로부터 “경전해석과 문학에 있어 해동 제일”이라는 평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의 학문은 경전, 역사학 등 전통적인 유학 탐구는 물론이고, 불교와 천문 지리 음악 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했으며, 옛 비문들의 고증과 그림 비평까지 일가를 이루어 모든 분야에 박학한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를 완성하여 동아시아에 명성을 떨친 대예술가였다.
우리 역사상 중국의 학문과 예술을 받아들여 대가로 성장한 이는 무수히 많지만, 중국적 세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이는 불교학의 원효나, 탈성리학의 정약용 정도를 꼽을 수 있고, 예술 분야에서는 추사 김정희가 거의 유일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 위대한 지식인이요 예술가가 태어난 집이 바로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이 위치한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는 예사로운 땅이 아니다. 기름진 예당평야를 앞들 삼아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추사집안의 오랜 세거지였다. 용궁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부드럽고 나지막한 능선들이 연이어진 내포지방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조선시대 지리책인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내포지방이란 충청도 가야산 일대의 열 고을을 일컫는다 했으며, “산천이 평평하고 어여쁘며, 서울에 가까워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충청도에서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 내포지방”이라 했다.
경주 김씨인 추사집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린 때는 15세기 중반이며,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을 역임하고, 급기야 영조 임금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최고 권력의 절정을 구가하게 된다.

추사가문의 추모공원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은 키가 크고 눈빛이 맑으며 풍채가 뛰어났던 전형적인 귀공자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열심이었고, 특히 글씨를 잘 써서 궁중의 공식 서예가로 활약했고 중요한 인보(도장에 새겨진 글씨)들을 많이 작성했다고 한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근원은 증조부에게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김한신과 결혼한 영조의 맏딸 화순옹주는 사도세자의 누이기도 하니, 정조임금은 추사의 할아버지뻘, 순조임금은 아저씨뻘이 된다. 화순옹주와 결혼한 김한신은 서울을 떠나 고향 땅에 지금의 추사고택을 지었고, 금지옥엽 공주는 당대의 귀공자 김한신을 깊이 사랑하여 시골까지 따라 내려와 전원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천재는 박명”이랄까, 김한신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화순옹주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부왕인 영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식음을 전폐한지 14일 만에 사랑을 좇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조는 요절한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운함으로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지만, 조카인 정조가 등극하여 열녀문을 하사했다.
용궁리에는 추사고택 뿐 아니라 고택에 이르기 앞, 서쪽 언덕에는 추사의 묘소, 추사고택, 동쪽으로는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 및 묘막, 그리고 고조부 묘소와 백송이 연이어 들어섰다. 추사가문의 기념 추모공원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고택 뒤쪽 사과밭 사이 오솔길로 15분 정도 걸으면 작은 사찰 화암사에 이르는데, 역시 추사가문에 속했던 산사이다. 절 뒤 암벽에는 단정하면서도 힘찬 예서체로 ‘시경(詩境)’과 ‘천축고선생택(天竺古先生宅)’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젊은 시절 추사의 솜씨다. ‘인도의 옛 스승님 댁’ 이라는 뜻이니, 부처님의 집, 곧 법당을 가리키는 추사식 해학이다.
화순옹주의 열녀문은 묘막 터 대문 앞에 세워졌는데, 묘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묘막은 원래 53칸의 큰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불에 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아있다. 다행히 8칸 대문채는 남아 홍패를 단 열녀문이 보존된 것이다. 고조부 김흥경 묘소 앞의 백송은 추사가 중국에 다녀오면서 심은 것이라 전하는 희귀한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었다.

궁궐과 같은 살림집

증조부 김한신 때 지은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개 고을이 동원되어 한 칸씩 맡아 공사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거도적인 사업이었다. 도목수는 서울에서 데려와 일을 맡겼다. 당시 김씨 가문의 세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사연이기도 하고, 고귀한 공주마마를 모신 주택이니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가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집은 비록 충청도에 자리 잡고 있지만, 집의 구조나 격식은 서울지방 고급주택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잘 다듬어진 기단과 주춧돌, 벽의 아랫부분에 정교하게 쌓여진 화장 돌벽 등은 충청도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서울지역의 유행이었다. ㄱ자 모양으로 꺾인 사랑채도 서울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살림집의 모습이다. 날아오를 듯 유려하게 휘어진 추녀의 율동감이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적재적소에 설치된 채광용 창문의 가지런한 창살들이 차분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다. 전반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집이다. 당대 최고의 귀족 집다운 품격이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에 있다. 口자형으로 폐쇄된 안채는 사랑채와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ㄱ자 사랑채가 마당을 감싸고 있듯 개방적이라면, 중문을 거쳐 들어가야 하는 안채는 외부에 대해 완벽히 닫혀있는 구조다. 역시 이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성으로, 사랑채 보다 안채가 더욱 중요하게 지어진 느낌을 준다. 안채의 대부분은 사랑채에 가려 보이지 않고, 특히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사랑채 너머로 안채의 끝부분이 보이는데, 여기에 청지기방을 두고 감시창을 달아 안채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규모도 안채가 더 크고, 건축 솜씨도 더 정교하다. 안채에는 사랑하는 부인이며 고귀한 신분의 공주가 살았던 때문일까?
안채에 대한 배려와 정성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어머니의 안방과 며느리의 건넌방은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데, 대등한 격식으로 꾸며져 있다. 각 방에는 두 칸 부엌이 각기 딸려있고, 각 방 뒤에는 별도의 툇마루 방이 달려있다. 건넌방보다 안방이 훨씬 격이 높은 여느 살림집과는 사뭇 다른 구성이다. 아마도 이 집이 지어질 당시 며느리였던 화순옹주를 위한 건넌방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시어머니를 무시하는 되바라진 며느리는 아니었다. 안방은 건넌방보다 한 칸이 더 크다. 비록 공주의 신분이지만, 가정에서는 어른을 모시는 고귀한 겸손을 확인케 하는 구조이다.
안방과 건넌방 뒤에 딸린 좁고 긴 툇마루방이야 말로 여염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공간이다. 이곳은 시녀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궁궐건물에나 있을 수 있는 공간이며, 공주의 살림집임을 확연하게 증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방 뒤 감춰진 곳에서 주인마마의 부름을 기다리기도 하는 곳이며, 외부에서 직접 방으로 닿지 못하도록 하는 매개공간이기도 하다.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가 설치된 궁궐 같은 집, 그러나 벼락부자와 같은 거대함과 화려함이 아니라, 고귀한 품격을 간직한 집이다.
비록 증조부대에 건립된 집이지만, 추사는 종종 이 집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했으며 그의 숨결이 집안 곳곳에 배어있다. 사랑채 앞마당에 ‘석년(石年)’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 해시계가 서있다. 추사의 친필로 긴 돌의 방향에 맞추어 글씨의 꼬리를 세로로 길게 썼다. 어느 곳에 쓰느냐에 따라 글씨의 공간을 조절하는 추사의 안목이다. 사랑채의 집 이름 ‘죽로지실(竹爐之室)’의 액자가 사랑채에 걸려 있으며, 역시 추사의 친필이다. “대숲에 둘러싸여 화롯불을 쬐는 방”이라는 정감 넘치는 이름에서, 글씨도 글씨려니와 추사의 깊은 사유와 시정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 집이 겪은 우여곡절은 서글플 정도였다. 후손들이 200여년 살다가 1968년 남에게 넘어갔다. 1976년 충청남도에서 사들여 정비하여 어느 정도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53칸에 이르던 건물 중 32칸만 복원할 수 있었고, 행랑채와 중문채, 곳간, 담장 등은 원형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짜임새 있고 아기자기한 모습이었음을 상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추사의 시문들을 기둥마다 걸어놓아 작위적 냄새가 나기도 한다.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다. 추사체에서 볼 수 있는 절제의 미학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부처의 애절한 사랑이 배어있고, 대예술가의 시정이 스며있는 명품 살림집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