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없이 동성들만 모여사는 수도 공동체는 비단 불교 뿐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에서 발견된다. 로만 카톨릭의 수도원과 수녀원, 유교의 서원과 향교 등은 모두 종교적인 생활공동체다. 수도원이란 종교적인 수양을 하기 위한 곳이지만, 수행자들도 인간인 이상 먹고 자고 쉬어야하는 인간사가 필수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공간 뿐 아니라 침실, 부엌과 식당, 휴게실들이 모든 수도원에 필수적인 시설이 되었다. 동성 사회이기 때문에 침실은 공유하지 않아, 대부분 수도시설의 침실은 독실을 기본으로 한다. 반면, 공동 취식이 기본이기 때문에 부엌과 식당이야말로 진정한 일차적 공동공간이 된다. 또한 무료한 수도생활에 비록 소찬과 맨밥일 망정 먹는 행위야말로 커다란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승방들은 먹고 자고 수양하는 최소한의 공간들을 갖추고 있다. 우선 여러 승려들이 모일수 있는 대중방(혹은 큰방, 대방)이 승방의 중심시설이다. 여기서는 예불과 참선공부 등을 수행하지만, 모여서 공양하는 식당으로 쓰이기도 한다. 부엌은 동선의 편리와 난방을 위해서 대방 옆에 위치한다. 대방은 보통 일반 신도들이 드나드는 불전의 마당을 향해서 놓여진다. 대부분 불전은 남향하고 있기 때문에 대방은 동향 또는 서향으로 놓여진다. 따라서 오후의 따가운 햇빛을 피할 길이 없고, 승려들의 개인실은 대방과는 직각인 방향으로 놓아 전체적으로는 ㄱ자 혹은 ㄷ자의 건물이 된다. 규모가 더 커지면 口자형으로 완전히 감싸진 건물이 된다. 자연스럽게 승려 방들로 감싸진 안마당이 형성되고, 일반인들의 눈에서 감추어진 이 안마당은 생활의 중심적인 공간이 된다.
대중방과 개인실을 제외하면 모두 부엌과 관련된 시설들이다. 4칸 혹은 6칸의 널찍한 부엌과 인접해서 곡식과 음식재료들을 보관하는 고간 – 대규모 승방에서는 2층집을 만들어 고간을 위층에 설치하여 고루라고 부른다 -과 헛간, 세면과 세탁을 위한 수각들이 설치된다. 부엌과 면한 안마당, 혹은 뒤뜰에는 넓은 장독대가 있어서 간장 고추장 된장 김치 등이 크고 작은 장독들에 담겨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다. 선암사 승방에는 무려 60여개의 장독들이 열을 지어 있다. 재일이나 불사가 있는 날에는 수백명의 신도들이 몰리고 모두 공양을 하는 것이 예의다. 따라서 승려들의 취사를 위한 부엌 만으로는 용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별도의 독립된 부엌을 시설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솥을 걸 수있는 부뚜막만을 설치한 야외의 간이부엌을 ‘한뎃부뚜막’이라 부르고, 아예 독립 건물을 만들어 부엌을 들인 것을 ‘반빗간’이라 부른다. 신륵사 송광사 등 유명하고 큰 사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들이다.
승방의 생활은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매우 규범적이다. 보통 한 승방에는 2-30명의 승려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며 그들간에는 각각의 임무와 역할이 주어진다. 부엌을 담당하는 책임 자를 ‘원주스님’이라 하여 중진급의 승려가 임명된다. 원주 밑에는 땔감을 장만하고 불을 때는 ‘불목하니’, 곡간을 관리하는 고지기, 그리고 음식을 장만하는 ‘공양주’들이 있다. 과거에는 승려들이 직접 공양주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여성신도들인 ‘보살’들이 실질적인 부엌살림을 꾸려나간다. 예전에 승려가 되기 위해 절을 찾아오면, 가장 먼저 불목하니 생활을 해야했다. 추운 겨울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오고, 새벽 예불시간보다 먼저 일어나 장작을 지펴야했던 불목하니가 승방에서는 가장 고달프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불목하니 자체가 초심자 수행의 중요한 시험과정이기 때문에 불성실하면 곧장 절집에서 쫒겨나고, 몇 년간의 시련을 잘 이겨내면 드디어 승려로 입문할 수 있었다.
경남 고성의 옥천사에는 과거 12방사(승방)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 승방에 30명의 승려가 있었다면, 적어도 300여명의 고정 승려가 있었다는 계산이다. 승방들은 건물로 구분될 뿐 아니라, 공동생활의 최소단위가 되는 자치조직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수행과 취사 등은 승방별로 따로따로 이루어졌다. 재물을 시주하고, 곡식을 찧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체의 행위를 승방별로 수행했기 때문에 각 승방에는 장독대와 고간은 물론, 물을 담는 석함(돌물확), 곡식을 찧고 가루로 만드는 맷돌, 떡을 만드는 떡판석 등이 필수적인 설비였다. 양주 회암사와 같은 옛 절터에 가면 여러개의 맷돌이나 돌확들의 유구를 볼 수 있는데, 맷돌의 개수로 당시 승방들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승방의 부엌은 취사 외에도 특별한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부엌의 위치는 보통 대방의 남쪽과 개실서쪽 사이의 모퉁이에 위치한다. 양쪽의 온돌방에 난방을 하기 위한 위치다. 그런데 승방의 안마당에 출입할 수 있는 대문이 이 부엌에 달려있다. 승방 내부에 들어가려면 꼭 부엌을 거쳐서 가야한다. 부엌에는 공양주나 불목하니들이 항상 머무르며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은밀한 승방 안으로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 일종의 수위실 역할을 부엌이 겸ㅆ하는 꼴이다. 또 부뚜막 위에는 부엌의 불씨를 지키는 조왕신이 모셔져있다. 한지에 글씨를 쓰거나 조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고, 그 앞에 작은 단을 마련하여 쌀알과 정한수를 촛불밝혀 바친다. 음식을 맛있게 하고 불이 잘 붙기를 염원하는 민간신앙이다. 한국의 불교는 민간신앙까지도 수용하는 융통성을 보인다. 보통 부엌 근처에 위치하는 수각에도 물의 신인 용왕신을 모시기도 한다.
부엌의 바닥은 마당보다 30-60Cm 낮고 잘 다져진 흙바닥으로 마감된다. 아궁이는 온돌바닥보다도 1.2m정도 낮다. 바닥과 온돌이 이처럼 낮은 이유는 넓은 대방의 구들을 덮히기 위해서다.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암의 아(亞)자방은 한번 불을 때면 일주일 동안 온기가 지속됐다고 한다. 구들 자체도 기막힌 솜씨로 놓았겠지만, 오랫동안 온기를 보존하려면 구들이 두꺼워야 하고 깊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궁이의 위치는 낮을수록 좋다. 여기에 널찍한 부뚜막에는 – 보통 살림집에서는 80Cm 폭이지만 승방의 부엌은 120Cm가 넘는다 – 커다란가마솥이 3개 걸린다. 가장 큰 솥은 물을 끓이기 위한 것이고, 중간 것은 밥을, 비교적 작은 것은 국을 끓이기 위한 것이다. 어슴프레한 밝음 속에 바닥은 움푹파져 굴곡을 이루며, 바닥에 떨어지는 음영은 다시 바짝거리게 잘 닦여진 솥뚜껑들과 대비를 이룬다. 한국건축으로는 매우 특이한 건축공간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