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 역사라는 경부고속철 공사가 부분 개통했다. 총 13조 5000억원의 천문학적 예산과 최첨단의 기술을 쏟아 부은 결과로 우리 국토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부분 개통에도 불구하고 서울-부산 간 이동 시간이 2시간 40분으로 단축되어 당일 왕복이 가능해졌으니 과연 21세기의 축지법이라 할 수 있다. 경부간 차창에 펼쳐지는 풍경은 더 이상 목가적인 전원이 아니라, 산과 터널과 방음벽들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경치로 바뀌었다.
전철역사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의 발전 속도가 점점 격차를 보일 것이며, 역세권의 개발 전망이 곧 지방화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듯 희망에 부풀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고속철도는 역(逆) 지방화, 수도권 집중화라는 부정적 효과를 야기하기 쉽다. 서울 소비자들이 부산에 올 가능성보다, 부산 소비자들이 부산의 백화점을 외면하고 고속철을 이용해 서울 나들이와 쇼핑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속철은 일종의 빨대를 여기저기에 꽂는 것과 같아서, 수도권이 지방의 양분을 흡입해 버리는 ‘빨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비단 경제 뿐 인가. 지방의 문화인들이 하루 저녁 훌쩍 서울에 와 공연이나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으니, 점점 지방에는 국제적 수준의 문화행사를 유치하기 힘들지 모른다. 천안이나 대전의 직장을 서울에서 출퇴근할 수 있으니, 오히려 지방 인구가 줄어들 수도 있다. 신세대들이 좋아하는 음료 가운데 버블티가 있다. 이 버블티의 빨대는 굵기가 새끼손가락만하다. 음료는 물론, 음료에 섞여있는 찹쌀경단들도 빨아 먹기 위해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고속도로나 새마을열차가 가느다란 빨대였다면, 그래서 경제적 예속화만 가능했다면, 고속철도는 버블티의 두꺼운 빨대와 같이 경제는 물론 문화, 사회, 인구 등 모든 방면의 예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
반대로, 수도권의 거대한 인구와 경제력을 고속철 역사가 있는 도시로 끌어들이는 행복한 현상도 벌어질 수 있다. 고속철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종착역들이 가장 큰 혜택을 본다. 프랑스 리용이나 일본 후쿠오카가 고속철 덕분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그런 면에서 부산은 어느 도시보다도 막대한 잠재력과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고속철을 연계하면 서울의 영화팬들을 당일 코스로 부산에 끌어들일 수 있다. 첨단의 고속철 여행과 전통적인 자갈치 시장의 회 먹거리를 연계한 관광상품은 또 어떤가.
게다가 부산은 일본과 한국을 잇는 관문이기도 하다. 한-일 연계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서울과 일본의 관광객들을 대량으로 유치할 수도, 부산시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련한 벡스코나 시립미술관을 국제적 문화시설로 활용할 수도 있다. 국제 업무지구를 마련하여 일본 회사의 지사를 부산에 유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속철 개통에 대비하여 지방자치단체들이 준비한 게 무엇인가? 화려한 고속철 역사 건립에만 신경 썼지, 고속철을 도시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한 프로그램 마련이나 전략 수립에는 등한히 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덩치 큰 역사를 종합 위락 편의시설로 활용하려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고속철 계획이 확정된 10여년 전에 벌써, 프랑스 정부는 특별한 건축가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고속철이 한국의 경관에 어떤 효과를 미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비단 건축분야 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조사와 연구를 치밀하게 진행하였다. 그만은 못해도 이미 개통해버린 고속철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3시간 정도의 공사만 더하면 남북 분단된 경의선이 완전 개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부산은 남북한은 물론 아시아-유럽 대륙을 관통하는 대륙간 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 된다. 아직도 무궁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빨대의 최종 방향이 어느 쪽으로 향할 것인가? 정말로 참신한 아이디어와 치밀한 준비, 완벽한 편의시설과 프로그램, 그리고 대대적인 홍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