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16.03.25.
출처
문화와 나-조선건축가
분류
건축문화유산

야누스의 두 얼굴 –정치가와 예술가

조선조 사회의 주도세력인 사대부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사회적 신분은 양반이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였으며, 정치적으로 관료, 지역적으로 토호였다. 또 있다. 지식인인 동시에 종교적으로 유림이며, 사상적으로 유학 철학자, 예술적으로 시인이며 화가이고 음악가이며 건축가였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그 가운데서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복합인의 대표이다. 조선 중기 사림 명문 해남 윤씨의 일원으로 태어나, 수도권과 해남 일대에 거대한 장원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특히 요즘으로 치면 부동산 재테크에 뛰어나 무인도에 가까웠던 보길도를 개척하고, 진도 해안에 간척사업을 벌여 토지를 확대하는 한편, 완도 일대 해안에 어장을 개척하고 대규모 미역양식업도 성공시킨 경세가였다. 여러 차례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당대의 거대권력 송시열에 맞서 예송논쟁을 벌인 남인 세력의 정치적 영수였다.
그러나 윤선도는 경세가나 정치가로서의 명성보다는 뛰어난 예술가로서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다. ‘오우가’, ‘어부사시사’의 저자로 국문학사상의 최고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해남 앞바다 보길도에 거대한 정원들과 뛰어난 건축물을 직접 만들고 경영한 건축가이자 조경 설계자였다. 그의 일생을 종합해보면, 80여 생애 동안 20여년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19년 동안 은거생활을 했으니, 성인이 된 이후 거의 대부분을 박해와 은둔을 반복한 불우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예술가 건축가로서의 그가 남긴 업적들은 아마도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좌절과 분노, 회한을 승화시킨 삶의 예술일 것이다.
윤선도는 21세에 승보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26세에 진사가 되었다. 30세에 서울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하여 탄탄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유생 신분으로 당대의 권력 이이첨의 악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곧바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기는 등, 10여년에 걸친 긴 유배 생활이었다. 그의 정치 일생에 가장 빛나는 시간은 43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봉림대군 (후에 효종)의 스승으로 보낸 5년간이다. 그러나 그 세월도 잠시, 48세에 정계에서 쫓겨나 가문의 장원인 해남 땅에 은거하게 된다.
51세 때, 그의 일생 뿐 아니라 조선 사회를 송두리 채 뒤흔든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제자이며 유일한 정치적 끈이었던 봉림대군이 강화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안의 가솔 100여명을 이끌고 바닷길로 강화도로 향했다. 의기 충만한 ‘대군 구하기’의 길이었으나, 도중에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고 대군은 인질로 잡혀갔다는 충격적 소식에 접한다. 극심한 좌절은 곧 세상을 버리고 은둔을 택하게 된다. 은둔지로 정한 제주도로 뱃길을 돌려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이름 모를 섬에 피난하게 되는데, 바로 그 섬이 보길도였다.
윤선도는 유림으로서 유가의 경서도 정통했지만, 당시에는 잡학이라 하여 사림들이 경원시한 의약이나 음양, 풍수지리에도 통달했다. 누구보다 땅과 자연을 보는 눈이 발달한 윤선도에게 보길도의 황홀한 자연 환경을 지나칠 리 없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길도는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한” 천혜의 은거지였다. 이 때부터 윤선도는 보길도를 그의 은거지로 삼아 섬 전역을 가꾸고 경영하기 시작했다.
53세 때 전쟁이 끝났는데도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괘씸죄로 다시 영덕으로 유배를 떠났다가 금방 유배가 풀려 또 낙향했다. 이 때 해남 땅에 금쇄동이라는 새로운 은거지를 발견하게 되어, 13년간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오랜 은거 생활을 하게 된다. 보길도에 남겨진 대부분의 유적들은 대략 이 시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금쇄동에서는 유명한 ‘산중신곡 山中新曲’을 위시하여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고금영 古今詠’ 등을 지었고, 보길도에서는 그 유명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66세면 당시로서 천수를 다한 나이였겠지만, 이 노인에게 다시 반짝 봄날이 찾아왔다. 제자 봉림대군이 드디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되었고, 옛 스승을 잊지 않고 불러 복직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최고의 실세 송시열의 눈 밖에 나 다시 삭직되었고, 효종이 승하한 직후인 74세 때 함경도 삼수로 마지막 유배를 떠났다. 81세에 유배가 풀려 낙향한 후 줄곧 보길도에 머물다가 4년 후 그 파란의 운명을 다했다.

온 섬을 정원으로
보길도의 중심부에 부용동이라는 이름의 분지가 있다. 사방에 잘생긴 산봉우리들이 둘러서 마치 한 송이 부용꽃과 같아 붙여진 지명이다.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며, 무수하 산봉우리들이 겹경비 벌여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다”고 윤선도가 평했다고 한다. 윤선도는 부용동의 꽃술에 해당하는 곳에 터를 잡아 낙서재라는 자신의 거처를 지었다. 당시에는 단출한 초가집이었으나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낙서재 남쪽에 무민당이라는 별채를 만들어 서재로 삼았고, 집 뒤 바위를 ‘소은병 小銀屛’이라 이름 붙여, 중국 무이산에서 은병정사를 경영했던 주자를 따랐다.
부용동 낙서재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은 동백나무가 울창한 상록산이다. 그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라는 정자와 원림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