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6.09.09.
출처
행복
분류
건축론

계단은 아래와 위의 공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건축요소이며, 수직적으로 형성된 도로다. 입체적인 공간을 다루는 건축가들이 가장 기교를 부리는 부분은 당연히 계단이다. 아무리 높은 고층건물이라도 계단이 각층을 연결해 주지 않으면, 각층은 통로가 차단된 암굴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설계하기 여하에 따라서 계단은 공간의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유명한 로마의 스페인 계단은 계단 자체가 광장이요 건축물인 효과를 거두었다. 우리나라의 부석사도 따지고 보면, 온통 계단뿐인 건축이다. 아주 멋진 계단들인 청운교와 백운교가 없는 경주 불국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특히 경사지가 많은 한국의 건축에서 계단이란 필수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가장 건축적인 요소가 된다.
현대건축에서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계단의 기능을 대신하지만, 계단 본연의 건축적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해야하는 백화점에서 투명한 전망 엘리베이터를 도입한다든지, 고급 호텔 로비의 중심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주변을 아래 위층으로 뚫어 시원한 공간감을 조성한다든지 하는 디자인은 모두 계단이라는 건축요소가 가졌던 공간적 감흥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들이다.
수직적 통로인 계단은 수평적 통로인 복도에 비해 독특한 성질을 갖는다. 아래 위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속도는 느려지고, 앞 사람과 뒷 사람의 높이 차이가 생기게 된다. 복도를 걸을 때 남자가 여성의 뒤를 따라가면 실례가 아니지만, 계단을 오를 때 여성 뒤를 따르면 실례가 된다. 내려갈 때는 반대의 예절이 적용된다. 모두가 계단의 높이 차 때문에 생겨난 매너들이다.
성리학이 한 사회의 지도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서 서원건축은 최고의 유교건축이었다. 성리학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예법’과 ‘순서’다. 삼강오륜이 예법의 기본이라면,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간의 서열이 순서의 기본이다. 성리학의 전당인 서원에서는 더말할 나위없이 스승과 제자 간의 서열과 선배와 후배 사이의 서열이 엄격하게 지켜졌다. 스승과 선배가 밥상을 받기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먼저 밥상을 물려서도 안된다. 같이 걸을 때에도 스승과 선배는 앞에서, 제자와 후배는 뒤에서 따라야한다. 부득이 나란히 걸을 때면 스승과 선배는 동쪽에, 제자와 후배는 서쪽에 서서 걸어야한다.
대구시 달성구에 있는 도동서원은 한국의 3대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 곳이다. 이 서원은 조선조 성리학 최초의 순교자인 김굉필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명문학교답게, 건물들이 좌우대칭 엄격한 규범에 따라 배치되었다. 전체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루각-대문-강당-사당이 일직선 상에 배열되어 건물들의 예법과 순서를 충실히 구현했다. 도동서원은 경사가 심한 뒷산에 기대어 앞의 낙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전체 대지를 10여개의 돌단으로 조성하였다. 당연히 각 돌단들을 연결하는 계단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하지만 도동서원의 계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첫째는 중심축선상에 놓여진 중요계단들의 폭이 불과 60cm 안팍으로 매우 좁다는 점이다. 서원의 유명도나 전체규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계단들이다. 또 하나는 계단의 디딤돌이나 소맷돌에 꽃모양이나 이상한 짐승들을 조각한 점이다. 근엄함과 청빈함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서원건축에는 이례적인 장식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은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면 곧 풀리고 만다. 제사에 참여한 인원들 모두는 각각 임무와 서열이 매겨진다. 초헌관 아헌관을 선두로 시작하여 많은 직책들이 서열화되어 있다. 이들은 이동할 때도 높은 서열의 사람들이 앞에 서고, 낮은 서열은 뒤에 설 수 밖에 없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십명의 인원이 한줄로 순서지어 계단을 밟게된다. 도동서원의 계단들은 철저하게 한사람 폭의 통행만을 허용한다. 제자가 스승을 앞서거나 나란히 걷기가 불가능한 건축적 의도 때문에 계단의 폭을 좁힌 것이다. 도동서원 전체가 성리학의 예법과 순서를 위한 무대라면, 좁은 계단은 중요한 소도구들이다. 그러면 장식적인 조각들은 왜 있는가. 엄격한 서열을 지키면서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여유와 웃음을 주기 위한 인간적인 배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