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0.02.01.
출처
이상건축
분류
건축론

작년은 ‘건축문화’의 해였다. 문화라는 단어만큼 다의적으로 쓰이는 말도 없다. 화이트헤드는 ‘문화’에 대한 정의를 16가지로 정리할 정도로, 문화라는 말이 중층적으로 쓰인다 한다. 그렇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판단한다면, 문화란 ‘예술과 인문학의 총체’라는 정의가 적절하다. 건축이란 기술과 예술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니, 건축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건축적 현실을 과연 문화라고 볼 수 있을까. 타 예술 분야와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심미적 정서와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의식이나, 철학적 주체성이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모두가 ‘아니다’. 이 사회의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며, 지식인은 더더욱 아니다. 예술가연하는 기술자요, 지식인인 척하는 소시민에 불과하다. 건축계는 음악계나 미술계에서 무엇이 이슈화되고 있는지, 누가 무슨 작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니, 명성황후가 매일 무대에 올려져도 무대 디자인에 참여할 길이 없고, 한국영화가 공전의 중흥기를 맞아도 영화와 건축간의 협력작업 한번 할 수 없다. 그저 유한 한량으로서 건축가라는 직업이 영화 주인공으로 간간히 등장할 뿐이다.
지식계나 다른 인문학계와의 교류는 더더욱 빈곤하다. 철학적 담론이나 사회 진단을 하는 자리에 건축계 인사가 구색 갖추기로 종종 참여할 때가 있는데, 다른 분야 인사들로부터 듣는 소리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건축이란 공학기술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대화를 나눌만은 하군요.’ 이처럼 사회에서는 건축계가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리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중 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지도 않다. 대중들은 HOT 멤버들의 이름을 낱낱이 알고 있지만, 이 사회의 지도적 건축가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영화 ‘거짓말’의 등급 심사위원들을 수사할 만큼 민감한 여론이지만, 건축계의 파렴치한 현상설계 비리에 대해서는 언론조차 관심이 없다. 건축계의 유일한 교류영역이라고는 건축 위에 군림하는 자본시장이나, 공무원 사회뿐이다. 그리고는 자체 시장 안에서 니전구투를 벌일 뿐이다.
올해는 ‘새로운 예술의 해’이다. 20세기의 새로움이란 전문화, 기술화, 독자화를 지칭한 것이었다면, 21세기적 새로움은 탈장르화, 인문화, 보편화를 의미한다. 20세기적 창조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명적인 것이었다면, 21세기의 창조란 이미 존재하고 실험된 것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 결합시키는 발견적인 창조다. 따라서 예술과 기술, 인문학과 공학, 전통과 현대, 전문가 집단과 대중 사회 사이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들면서 만들어지는 건축만이 이 세기의 주역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 소개되는 ‘오래된 우리들의 미래’ 집담회는 건축 뿐 아니라 영화, 철학, 미술, 문학계의 주목받는 주역들이 모여서 벌이는 말 잔치였다. 그 내용이 얼마만큼 생산적이고 집약적인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집담회를 위한 몇 차례의 예비 만남과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들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첫째, 서로의 만남과 인정이 둘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건축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인문학적 소양을 극대화시키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건축계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경계 넘기의 움직임들이 벌어지고 있다. 건축과 춤이 만나는 이벤트도 있었고, 지역사회 시민단체와 연합한 워크샾도 열렸었다. 그러나 아직은 문화예술계의 비주류로서 머물러 있고, 대중들과의 소통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이나 건축집단의 적극적인 소통 노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스스로 문화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건축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국제적 건축전문인을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제에 문화로서, 지식으로서 건축교육의 틀을 새롭게 짜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