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겪은 이야기. 주제는 주로 20세기 도시건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서울시내에 세워진 몇 기념비적 건축물에 대한 비평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예의 질문이 있었는데, 시니컬한 강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학생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삼성타워는 국내 어떤 건축보다도 진취적이고 독특한 데, 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은 비뇰리 뿐 아니라, 하라 히로시나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 방법론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파편적 도시이론이나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야 말로 첨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반론도 폈다. 진지한 탐구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현대건축의 접근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느 누구가 옳고 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특히, 국내 건축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유명한 세계적 대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과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훈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실현된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특정한 도시에 섰을 때는 무조건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종로타워가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그 건물은 종로라고 하는 역사적인 땅 위에 서있는 대상물이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정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종각역 부근의 부분일 뿐이다. 한마디로 종로타워는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5년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흔적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500년간 서울의 등뼈를 이루어온 운종가라는 도시적 중추에 대한 해석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 뒷골목의 복작대는 서울 청년들의 활기나 거리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물 뒤편의 전통적 거리-인사동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독특한 기념물로서 서울의 명물이 되고픈 상업적 욕망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종로타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라는 거리에 대한 건축적 리얼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재화라는 명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쑥쓰럽다. 건축은 우선 대지라는 한정된 재화를 필요로 한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대지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개인이 소유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부풀릴 수도, 폐기할 수도 없고, 단지 일시적인 이용권만 소유할 뿐이다. 또한, 어떤 건축이든 일단 세워지면 좋던 싫던 공공에게 공개되고 도시의 부분으로 사회화된다. 그리고 그 공공적 수명은 짧으면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을 지속한다. 미술관이나 음악당과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공유되는 타 예술 장르와는 그 존재양상이 전혀 다르다. 건축적 리얼리티란 건축을 둘러싼 대지와 장소, 역사와 문화, 사회와 인간이라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는 건축이란, 아무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발상을 가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역할을 포기한 개인적 유희에 불과하다.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파편도시론과 같은 현대적 도시관을 비판하게 된다. 비록 현대도시가 파편과 같이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라 하더라도, 또 하나의 파편을 만들어 도시의 분열에 가담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건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 비판을 받는 것도 결국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이유일 수 있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방법이라면, 그것이 비록 세계적 대가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화두는 ‘일상성’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변에 널려있고, 이 시간에도 풍미하고 있으며, 내 친구나 내 이웃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다. 이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론과 해답을 난해한 이론서나, 기상천외한 대가들의 방법론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일상이란 이곳, 여기와는 다르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발견과 해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건축적 리얼리티의 실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어느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겪은 이야기. 주제는 주로 20세기 도시건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서울시내에 세워진 몇 기념비적 건축물에 대한 비평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예의 질문이 있었는데, 시니컬한 강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학생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삼성타워는 국내 어떤 건축보다도 진취적이고 독특한 데, 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은 비뇰리 뿐 아니라, 하라 히로시나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 방법론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파편적 도시이론이나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야 말로 첨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반론도 폈다. 진지한 탐구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현대건축의 접근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느 누구가 옳고 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특히, 국내 건축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유명한 세계적 대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과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훈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실현된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특정한 도시에 섰을 때는 무조건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종로타워가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그 건물은 종로라고 하는 역사적인 땅 위에 서있는 대상물이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정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종각역 부근의 부분일 뿐이다. 한마디로 종로타워는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5년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흔적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500년간 서울의 등뼈를 이루어온 운종가라는 도시적 중추에 대한 해석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 뒷골목의 복작대는 서울 청년들의 활기나 거리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물 뒤편의 전통적 거리-인사동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독특한 기념물로서 서울의 명물이 되고픈 상업적 욕망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종로타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라는 거리에 대한 건축적 리얼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재화라는 명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쑥쓰럽다. 건축은 우선 대지라는 한정된 재화를 필요로 한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대지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개인이 소유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부풀릴 수도, 폐기할 수도 없고, 단지 일시적인 이용권만 소유할 뿐이다. 또한, 어떤 건축이든 일단 세워지면 좋던 싫던 공공에게 공개되고 도시의 부분으로 사회화된다. 그리고 그 공공적 수명은 짧으면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을 지속한다. 미술관이나 음악당과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공유되는 타 예술 장르와는 그 존재양상이 전혀 다르다. 건축적 리얼리티란 건축을 둘러싼 대지와 장소, 역사와 문화, 사회와 인간이라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는 건축이란, 아무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발상을 가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역할을 포기한 개인적 유희에 불과하다.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파편도시론과 같은 현대적 도시관을 비판하게 된다. 비록 현대도시가 파편과 같이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라 하더라도, 또 하나의 파편을 만들어 도시의 분열에 가담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건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 비판을 받는 것도 결국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이유일 수 있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방법이라면, 그것이 비록 세계적 대가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화두는 ‘일상성’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변에 널려있고, 이 시간에도 풍미하고 있으며, 내 친구나 내 이웃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다. 이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론과 해답을 난해한 이론서나, 기상천외한 대가들의 방법론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일상이란 이곳, 여기와는 다르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발견과 해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건축적 리얼리티의 실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어느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겪은 이야기. 주제는 주로 20세기 도시건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서울시내에 세워진 몇 기념비적 건축물에 대한 비평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예의 질문이 있었는데, 시니컬한 강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학생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삼성타워는 국내 어떤 건축보다도 진취적이고 독특한 데, 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은 비뇰리 뿐 아니라, 하라 히로시나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 방법론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파편적 도시이론이나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야 말로 첨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반론도 폈다. 진지한 탐구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현대건축의 접근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느 누구가 옳고 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특히, 국내 건축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유명한 세계적 대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과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훈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실현된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특정한 도시에 섰을 때는 무조건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종로타워가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그 건물은 종로라고 하는 역사적인 땅 위에 서있는 대상물이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정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종각역 부근의 부분일 뿐이다. 한마디로 종로타워는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5년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흔적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500년간 서울의 등뼈를 이루어온 운종가라는 도시적 중추에 대한 해석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 뒷골목의 복작대는 서울 청년들의 활기나 거리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물 뒤편의 전통적 거리-인사동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독특한 기념물로서 서울의 명물이 되고픈 상업적 욕망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종로타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라는 거리에 대한 건축적 리얼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재화라는 명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쑥쓰럽다. 건축은 우선 대지라는 한정된 재화를 필요로 한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대지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개인이 소유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부풀릴 수도, 폐기할 수도 없고, 단지 일시적인 이용권만 소유할 뿐이다. 또한, 어떤 건축이든 일단 세워지면 좋던 싫던 공공에게 공개되고 도시의 부분으로 사회화된다. 그리고 그 공공적 수명은 짧으면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을 지속한다. 미술관이나 음악당과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공유되는 타 예술 장르와는 그 존재양상이 전혀 다르다. 건축적 리얼리티란 건축을 둘러싼 대지와 장소, 역사와 문화, 사회와 인간이라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는 건축이란, 아무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발상을 가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역할을 포기한 개인적 유희에 불과하다.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파편도시론과 같은 현대적 도시관을 비판하게 된다. 비록 현대도시가 파편과 같이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라 하더라도, 또 하나의 파편을 만들어 도시의 분열에 가담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건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 비판을 받는 것도 결국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이유일 수 있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방법이라면, 그것이 비록 세계적 대가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화두는 ‘일상성’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변에 널려있고, 이 시간에도 풍미하고 있으며, 내 친구나 내 이웃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다. 이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론과 해답을 난해한 이론서나, 기상천외한 대가들의 방법론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일상이란 이곳, 여기와는 다르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발견과 해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건축적 리얼리티의 실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어느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겪은 이야기. 주제는 주로 20세기 도시건축의 문제에 대해, 특히 서울시내에 세워진 몇 기념비적 건축물에 대한 비평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예의 질문이 있었는데, 시니컬한 강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학생들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라파엘 비뇰리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삼성타워는 국내 어떤 건축보다도 진취적이고 독특한 데, 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은 비뇰리 뿐 아니라, 하라 히로시나 피터 아이젠만의 설계 방법론을 열거하면서, 이른바 파편적 도시이론이나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야 말로 첨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이론이 아니냐는 반론도 폈다. 진지한 탐구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보기 드문 학생이었다.
현대건축의 접근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어느 누구가 옳고 누구는 나쁘다는 식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특히, 국내 건축계에서 회자될 정도의 유명한 세계적 대가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수준과 독자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교훈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이, 실현된 건축물이 서울이라는 특정한 도시에 섰을 때는 무조건 정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종로타워가 아무리 새로운 공법과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졌다고 해도, 결국 그 건물은 종로라고 하는 역사적인 땅 위에 서있는 대상물이고, 서울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일정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종각역 부근의 부분일 뿐이다. 한마디로 종로타워는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5년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서있던 박길룡의 화신백화점을 기억할만한 어떤 흔적도 없을뿐더러, 조선조 500년간 서울의 등뼈를 이루어온 운종가라는 도시적 중추에 대한 해석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길 건너, 뒷골목의 복작대는 서울 청년들의 활기나 거리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물 뒤편의 전통적 거리-인사동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독특한 기념물로서 서울의 명물이 되고픈 상업적 욕망만이 빛을 발할 뿐이다. 종로타워에 대한 비판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 종로라는 거리에 대한 건축적 리얼리티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재화라는 명제를 끄집어내는 것조차 쑥쓰럽다. 건축은 우선 대지라는 한정된 재화를 필요로 한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대지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개인이 소유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부풀릴 수도, 폐기할 수도 없고, 단지 일시적인 이용권만 소유할 뿐이다. 또한, 어떤 건축이든 일단 세워지면 좋던 싫던 공공에게 공개되고 도시의 부분으로 사회화된다. 그리고 그 공공적 수명은 짧으면 몇십년, 길게는 몇백년을 지속한다. 미술관이나 음악당과 같이 한정된 장소에서만 공유되는 타 예술 장르와는 그 존재양상이 전혀 다르다. 건축적 리얼리티란 건축을 둘러싼 대지와 장소, 역사와 문화, 사회와 인간이라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리얼리티가 없는 건축이란, 아무리 독창적이고 첨단적인 발상을 가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역할을 포기한 개인적 유희에 불과하다.
위대한 건축은 일상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파편도시론과 같은 현대적 도시관을 비판하게 된다. 비록 현대도시가 파편과 같이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이라 하더라도, 또 하나의 파편을 만들어 도시의 분열에 가담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잃어버린 도시의 전체성과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이 21세기 건축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우연성의 설계방법론이 비판을 받는 것도 결국은 구체적인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이유일 수 있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방법이라면, 그것이 비록 세계적 대가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맹목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이상건축 학생공모전의 화두는 ‘일상성’이다.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변에 널려있고, 이 시간에도 풍미하고 있으며, 내 친구나 내 이웃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세계다. 이 일상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방법론과 해답을 난해한 이론서나, 기상천외한 대가들의 방법론에서 발견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일상이란 이곳, 여기와는 다르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소박한 발견과 해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건축적 리얼리티의 실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