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미를 강조한 빌바오 미술관
전시 작품을 위한 흰색상자 미술관
아라리오, ‘건축 미술관’ 역할 기대
건축가들이 가장 설계하고 싶은 건축은 바로 미술관이다. 건축가의 뜻대로 계획할 수 있고, 건축물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스페인 빌바오에 설계한 미술관은 금속 구름 모양의 독창적인 형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낙후된 지방도시에 들어선 희한한 미술관 하나로 이 도시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 이른바 ‘빌바오 효과’라는 도시발전의 유력한 모델이 될 정도였다. 이 대단한 미술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주로 여기에 작품을 전시해야하는 큐레이터와 미술가들이다. 몽환적인 건축 형태는 정작 전시되는 미술품의 존재를 약화시키고, 화려한 내부공간은 다양한 전시공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굴값을 한달까, 멋진 형태의 미술관은 현대미술관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흰색 상자’의 미술관이다. 현대 미술은 회화나 조각뿐 아니라, 설치작업이나 퍼포먼스까지 변화의 폭이 무한하다. 작품도 거대하고 추상적이다. 어떤 작품을 전시할지 모르니 미술관 건물은 크고 단순한 흰색 공간만 있으면 된다. ‘흰색 상자’ 미술관의 내부공간은 가변적이어서 어떤 전시도 가능하다. 국내에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이나, 최근 개관한 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이런 모습이다. 심지어 텅 빈 공장이나 창고건물이 최고의 미술관이 될 수 있다. 흰색 상자 미술관은 철저하게 미술작품에 봉사하는 미술공장이고 미술창고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과 정반대에서 출발한 미술관이 서울 시내에 탄생했다. ‘아라리오 뮤지움 인 스페이스’라는 미술관으로, 그 유명한 ‘공간사옥’을 재활용한 곳이다. 공간사옥은 현대 한국의 건축과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그의 사무실이기도 했던 건물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가장 현대적이면서 가장 한국적인” 건축으로 최고의 명작으로 꼽혀왔다. 회색 벽돌의 아담한 이 건물은 통상 5층이라 하지만, 내부에는 15개의 서로 다른 높이의 층들이 얽혀있다. 연면적 400평의 소형건물이지만, 40여개의 크고 작은 공간으로 구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막힘이 없이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되어 마치 미로 같이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후계 세대의 경영실패로 공간건축사무소는 파산하게 되었고, 2013년 공간사옥은 경매에 처해져 사라질 운명을 맞았다. 건축계와 문화계는 보존운동을 펼쳤으나 결국 아라리오 미술관측이 150억 원에 인수하게 되었다. 새 주인의 뛰어난 경영능력 때문에 공간사옥이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을까 의심의 눈초리가 대다수였다. 또한 현대미술관으로 쓰려면 공간사옥의 복잡한 건축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열흘 전 개관한 이 미술관을 보면, 그런 의구심은 기우에 불과하다. 새 미술관은 공간사옥의 외관은 물론 내부도 거의 훼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미술관 형식의 가능성을 열어준 신선한 모습이었다. 개관전인 ‘리얼리’는 국내외 43명 작가의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까다로운 건축공간에 맞추어 방 하나에 작가 한 명을 전시하는 기획이고, 그 방의 건축적 분위기에 맞추어 작품을 고르고 설치했다. 예를 들어 창이 뚫린 작은 방에는 조지 시걸의 조각을 두어 바깥의 풍경과 일체를 이루고, 6개의 니치(벽이 옴폭 들어간 부분)가 있는 방에는 신디 셔먼의 6개 사진 작품을 걸고 있다. 철저하게 건축에 맞추어 기획된 전시회이고, 건축과 작품을 일체화한 미술관이다.
새 아라리오 미술관은 공간사옥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건물 자체를 거대한 설치작품으로 승격시켰다. ‘흰색 상자’가 아닌 ‘벽돌 미로’도 훌륭한 미술관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적 미술관이 되기에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방은 고 김수근의 집무실이다. 이 방 정도는 김수근 아카이브로 남겨두어야 했다. 전시실마다 지키고 있는 흰 옷의 관리인들은 작고 낮은 방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아 작품관람마저 방해한다. 특별한 관리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순수하게 건축 관람만을 위한 건축 투어도 계획할만하다. 이 미술관 최고의 소장품은 데미안 허스트나 마크 퀸이 아니라, 김수근과 공간사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