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어느 대학의 세미나에서 벌어났던 하나의 기억. 당시 주제는 <현상학적 투명성>으로 진지하면서도 약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였다. 근대건축의 중요한 개념이었던 현상학적 투명성에 대하여 너무나도 유명한 콜린 로에의 학설에 대한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진행 중에 유명한 한분의 교수께서 불쑥 질문을 던지셨다. “도대체 콜린 로에가 뭐하던 사람이냐?” 발표자는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설명을 드렸다. 꼬르뷔제와 팔라디오의 주택들을 비교하여 서로 간의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하여 근대건축의 “새로움”에 대한 신화를 깨뜨린 주역이며, 탁월한 건축이론가임을. 그러자 그 교수께서 한 말씀 덧붙였다. “그럼 그 분은 설계는 못하는구만.” 좌중은 웃음의 도가니였고, 세미나 후 사담들을 통해 우리 건축계가 이른바 “이론”이라는 것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가하는 실상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명 교수의 요지는 이렇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을 떠들면 무엇하나? 제깍제깍 설계해서 건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
그 무렵은 츄미와 하디드들의 디컨스트럭션 건축이 국내에 소개되던 시점이고, 그 해 쯤엔가 열린 대한민국 건축대전에는 어김없이 비틀리고 삽입되고 휘어진 유사 디컨스트럭션들이 대거 출품 입상하였다. 당연히 건축계 일각의 우려가 있었지만, 당시 건축가협회 측의 총평은 매우 인상에 남는 것이었다. 기억나는 요점을 말한다면, “외국의 최신 경향을 모방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학생 작품이란 원래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학습의 과정이다. 배우는 과정에서 최신의 국제적 조류를 인용하고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며 오히려 권장할 부분이다.” 아직까지도 동도서기(東道西器)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우리 건축계 지성의 발언으로는 매우 용기있고 파격적인 변호였다.
몇년 전 건축학회지에 단편으로 실린 글의 제목 가운데 <생에네르기 건축학>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매우 생소한 용어여서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省에네르기 건축학>의 한글 표기였고, 그 뜻하는 바는 바로 <에너지 절약을 위한 건축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의 학계에서 발간된 건축환경학 계통의 서적을 그대로 소개한 내용이었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을 굳이 일본어 그대로 옮긴 분의 깊은 뜻을 알기 어려웠다.
“한국 현대건축 이론의 해외의존도”의 주제로 글쓰기를 의뢰받고 곧 떠오른 단편들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과연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라도) 이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과연 이론이란 무엇인가? 에서 찾아져야 할 것 같다.
우선 구별해야 할 것은 건축이론 (architectural theory)과 설계방법론 (design theory)이다. 후자는 분석적이며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경향이 강하다. 물론 설계방법론에도 질적인 어프로치가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두 범주를 혼동하게 되면, 건축이론의 효용은 그만큼 반감하게 된다. 기존의 이른바 과학적인 설계방법론들이 이른바 좋은 건축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이란 불필요한 관념의 유희이며 직관으로 가능한 일을 현학적으로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이론이란 설계의 원동력이며 출발점이다. 그것은 건축가의 세계관이며 건축관이고, 사상을 형태로 변환시키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꼬르뷔제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와 알도로시의 <도시의 건축>은 대표적인 이론서이다. 여기에는 소론-본론-결론으로 연결되는 논문의 구성이나, 객관성을 위장하는 작의적인 통계도표나,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복원도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과 부분이 맞지 않는 비약과, 자신의 생각을 웅변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선동적 문장과, 상상력이 충만한 스케취들로 가득할 뿐이다. 그들의 이론은 소위 과학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다. 이론은 다시 말하면 하나의 담론 (discourse)일 뿐이다. 담론에는 옳고 그름의 판정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유용한지 아닌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 적합한지 아닌지, 그 담론의 패러다임 안에서 정당한 구조인지 아닌지만 판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담론적 이론들은 우선 다양하게 전개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서로가 충돌할 수도 보완할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진다.
담론적 본질에서 본다면 한국 뿐 아니라 어떠한 건축에도 이론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유독 우리에게는 이론의 효용과 실천성을 부정하고 비하하는 권위적인 담론 이전의 담론들만이 판을 치고 있다. 이론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실천 (설계와 시공, 사용)이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탁월한 이론없이 탁월한 작품을 바란다는 것은 우연의 행운에 기대하는 것일 뿐이다. 이탈리아 현대건축에서 로시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절반은 로시를 따르고 절반은 반대할 정도로. 그러한 영향력은 로시의 작품 자체가 세련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건축의 사회성과 역사를 투시하는 실천적 이론의 힘 때문이다. 아이젠만이나 벤츄리의 경우도 작품보다는 이론들이 먼저 평가받고 추종된 사실을 상기하자. 그들의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 한국의 실무 건축계는 해외 토픽 쯤으로 치부하고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건축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작품들이 잡지에 발표되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흉내내고 인용한 풍조 역시 사실이었다. 우리가 겪어왔던 실천적 이론에 대한 경시, 이론 부재의 상황은 건축계의 지적 능력의 열악함을 자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은 즉물적이며 열등한 지적 수준을 확인하는 것 외에 무엇인가.
근래에 와서야 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일각의 움직임이 있다. 특히 주도적 중진건축가들이 이를 수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과 작품의 경향으로 통해 본 이론적 바탕은 획일화된 경향이 짙다. 예를 들어 “시대정신”의 구현으로서의 건축, 또는 “모더니즘”의 수용 등. 건축의 사회성을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한 시대정신론이 불필요하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모더니즘에서 찾아야 할 보물과 같은 교훈들을 폐기하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단지 수많은 건축가들의 이론적 바탕이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현상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다양성이 제거된 지적 풍토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획일적 선호성은 젊은 건축가들에게도 나타난다. 최근 건축 유학의 메카로 각광을 받는 빠리에는 백명이 넘는 한국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희망하는 1순위 지도교수로 씨리아니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꼬르뷔제의 전통을 잇고 정교한 이론과 감각을 보이는 씨리아니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지만, 아무리 대가라도 백명의 지식인들 가운데 소수라도 반발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지적 풍조는 국내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당연히 건축대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됨을 확인한다.
그러나 지적 편향성을 지적하기 이전에 더욱 중대한 문제는 파편화된 지식의 남용이다. 중언해서 말하자면, 외래의 건축이론을 구조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지극히 단편적인 문장이나 단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다. 예컨데 흔히 쓰이는 격언 가운데 “장식은 죄악이다” 혹은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다” 등. 그러나 뛰어난 장식 예술가였던 로스가 장식과 죄악이라는 에세이를 쓸 수 밖에 없었던 당시 비엔나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 명제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장식과 죄악>이라는 에세이를 음미했다면 그처럼 남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꼬르뷔제의 이 말 한마디로 그를 기계론적 기능주의자로 이해할 우려가 높다. 그의 뛰어난 서정성과 감수성은 은폐된 채.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 쓰여진 이 문장의 중층적 의미에 접근하려면 역시 원전을 주의깊게 탐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저널리즘적 지식에 익숙한 건축계의 지성들은 “광기”라는 한 단어로 푸코를 이해했다고 착각할 수 밖에 없다. 지식의 단편화 현상은 건축 아카데미의 책임이 크다. 건축학자 이론가 비평가 그룹은 현학적인 지식의 양적 경쟁에 익숙해 있고, 누가 원전을 보았는가로 언설을 신뢰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그들의 현학과 원전 숭상의 태도는 건축 지식계의 유식 분위기를 형성하고, 건축가들은 단편적인 지식들을 건축이론이라 착각하게 된다. 외래 이론이 국내 지식체계로 여과되고 소화되어 전파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과정이며 그것은 아카데미 그룹의 임무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론 수입의 창구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7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에게 근대건축사의 유일한 스승은 펩스너였다. 그의 러스킨과 모리스 예찬은 미술공예운동이 가장 강력한 근대건축 운동이었고, 모리스가 웨브에게 주문한 주택 “레드 하우스”가 근대건축 최초의 성과라고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알려진 대로 독일 태생이지만 영국으로 망명하여 <영국의 건축> 전집 발간의 총책이 될 정도로 영국 건축계에 빚을 졌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근대건축의 정통이자 선구로서 영국 건축을 선전한 것은 개인적인 보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론의 근대 철학적 토대라든가 뻬로 불레 르두 들의 프랑스 계몽 이론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 심지어 모국인 젬퍼와 슁켈의 합리주의 이론마저 소개를 등한히 함으로써 근대건축 형성의 중요한 줄기들을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국내 학계는 영어라는 매체 때문에 영어권 이론과 학설을 금과옥조로 삼을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편향된 이론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최근의 경향은, 여전히 영미권 이론의 수입이 주류를 이루지만,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다양한 국가에 유학들이 이루어지고 교류가 있어서 수입선이 다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접했던 계통의 이론만이 지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편협성이 나타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건축적 뿌리가 영미 이론이든, 일본 이론이든, 프랑스 이론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범 세계적인 차원에서 지식과 이론들을 비교 평가하고 소화하는 작업이다.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소유한 지식을 무기로 삼아 비무장 대중과 투쟁하는 전사가 아니다. 자신이 배우고 깨우친 지식의 실체를 공개하고 설득하고 계몽하는 전도자이어야 한다.
마지막 의문은 그러면 이른바 한국적 이론의 모색과 정립은 가능할 것인가? 흔히들 한국적 이론이라 하면 과거의 한국건축에서 무엇인가 화끈한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필요한 이론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과거의 한국건축에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 존재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와 맞지 않는다면 담론의 중요한 요건, 즉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또한 현재의 문제는 소위 “한국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국제화되어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명제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세계 건축의 이국취미를 충족시키는 역할만을 할 것이다. 세계 건축의 보편적인 이론을 충분히 소화한 위에, 개성적인 한국적 이론이 융합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한국건축의 이론 가운데서 현재성을 가진 이론을 찾아내고 발전시켜야 한다. 따라서 모색의 출발은 현재의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고, 그 문제의 해답을 세계건축의 성과 속에서, 과거 한국건축의 탁월함 속에 찾아야 한다. 꼬르뷔제가 아크로폴리스에서 표준화의 개념을 구체화 했듯이, 팔라디오가 로마의 폐허 위에서 중심성의 이론을 확신했듯이, 부석사와 선암사에서 도시적 건축의 이론을 발견해야 한다. 건축가의 특권, 건축적 이론의 장점은 전혀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사물들을 상상력으로 관계를 맺으며, 과학적 논리를 뛰어넘어 창조적인 비약을 보장받은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거의 역사는 항상 현재이다.
감기나 설사 따위의 일상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에게는 생리학 병리학 등의 기초의학이론이 필요치 않지만, 심장판막증 수술을 해야하는 흉곽외과 전문의에게 생리학과 의료전자학의 연구와 이론은 절실한 것이다. 인습적이고 진부한 설계에 안주하는 건축가에게 건축이론이란 필요하지도 유용하지도 않다. 표준화된 아파트 설계나 최대 용적율의 근린생활시설 설계가 자신의 본업이요 사명이라 생각하는 건축가에게 건축이론이라는 지적 유희는 사치스럽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또 그러한 건축만이 가능하고 우리의 몫이라고 자위하는 한, 한국건축계에 이론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없는 애물단지가 해외에서 직수입된들, 그 수입국이 편중되어 있은들, 그 내용이 완제품이 아니라 부품인들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후죽순의 아파트 건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그러나 개방된 건축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하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살 맛나고 문화적인 도시와 건축을 만들고 싶다면, 비상구 없는 혼돈 속으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 세계건축에 하나의 가능성 만이라도 던져주고 싶다면, 실천적 이론의 정립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건축이론의 중요함을 인식하는 것이 첫째, 단편적 상식을 넘어 전체로서의 이론을 소화 구축해야하는 것이 둘째, 세계 곳곳에서 제안되고 있는 다양화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세째, 그리고 현재의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역사 속에서 독창적인 이론을 찾는 것이 마지막이다. 아니, 그것이 바로 출발이라고 감히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