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9.03.31.
출처
중앙일보
분류
건축론

오락성 SF영화 ‘토탈리콜’에는 그려진 첨단의 미래주택. 부엌이 따로없이 리모콘 작동만으로 원하는 메뉴대로 요리가 나오고, 대형 스크린 벽면에는 갑자기 아름다운 전원풍경과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행복한 미래여. 그러나 다른 SF영화 ‘제4원소’가 그리는 미래의 도시와 건축는 암울하기만 하다. 인간들은 선실같이 비좁은 철제 상자 안에 갖혀 살며, 공해로 찌든 도시는 온통 뿌연 회색 안개로 가득하다.
두 영화 모두 미래의 건축환경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난 세기의 건축적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런 기술결정론적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니다. 참으로 무던히도 지어댔다. 5층짜리 반도호텔이 최고였던 서울에 3-40층의 고층건물들이 가득찼고, 100층이 넘는 마천루도 계획 중이다. 불과 50년만의 변화다. 방안의 온도와 조명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이른바 인텔리전트 빌딩은 이미 기본이고, 온갖 하이테크 기술로 무장한 빛나는 건물들이 서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건축사는 거대주의와 기술지향주의로 점철된 실험의 역사였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세워진 세운상가는 ‘O양의 비디오’나 암거래하는 도심의 슬럼으로 바뀌었고, 기술 한국의 자랑인 63빌딩은 교통 혼잡과 에너지 낭비의 주범이 되었다. 세운상가나 63빌딩의 건축계획은 완벽했다. 실제로 내부 환경도 편리하고 안락하다. 단지 이 건물들이 섬으로써 변하게될 주변에 대한 고려, 도시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났다.
건물 하나하나가 번쩍이면 도시는 저절로 빛날 줄 알았다. 그리고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는 무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서울은 점점 혼잡하고 살기 힘든 도시가 됐고, 자원의 고갈과 함께 환경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간다.
이제야 여기저기서 반성하기 시작한다. 근대 건축과 도시의 발전이란 결국 환경 파괴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개발 위주의 건축에서 보존과 재활용의 건축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별 건물 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환경을 개선하는 건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비판과 대안들은 역시 외국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미래건축의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움직임을 국내 건축계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미래는 무슨 미래.
그래서 베르나르 츄미가 설계한 빠리의 라빌레뜨 공원이 종종 미래건축의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여기에는 우선 거대한 건물이나 광장이 없다. 일정한 간격으로 분산된 작은 정자들이 건물의 전부다. 건물 설계보다는 공원의 전체적 조직과 이용자들의 편의를 고려한 결과다. 이 공원의 주제는 ‘과학’이지만 공원의 시설물과 공간은 예술적이다. 기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일 뿐, 인간에게 궁극적 행복을 주는 것은 휴식과 예술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미래의 건축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상이다. 건축이 기술의 노예가 될 수도 있지만, 파괴돼 가는 환경을 복원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우리 건축의 기술이 부족해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기술을 통제하고 점검할 윤리의식의 부재, 건축정신의 결여가 빚은 비극이었다. 다음 세기의 건축은 후손들의 몫도 외국 건축가들의 책임도 아니다. 바로 현재 한국의 건축인들, 그들의 윤리와 정신이 미래건축을 장미빛으로 칠하기도, 또는 잿빛으로 바꾸기도 할 것이다. ((끝))

김 봉 렬 (金奉烈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사진설명> 빠리의 라빌레뜨 공원. 과학과 예술, 건축과 도시, 인간과 환경이 어울어진 미래건축의 한 가능성. 건물 하나보다는 공원 전체의 환경조성에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