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도 작품전시회가 가능할까? 미술관을 찾는 이유가 복제된 책자에서는 불가능한, 전시된 진품만의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나 건축전시회에 보여지는 것은 진품이 아니라 건축물을 축소한 모형이나 영상, 그리고 기호화된 도면 뿐이다. 진품은 전시장 바깥의 거리나 자연 속에 떨어져 있으며 재현물 만이 전시장을 지킬 뿐이다. 판매할 진품도, 판매를 통한 이득도 기대할 수 없는 건축전이란 막대한 전시비용만 소요되는 소모적인 이벤트일 뿐이어서, 미술관측에서도 건축가측에서도 외면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2002년 가을은 건축전시회의 계절이다. 건축가 승효상전 (국립현대미술관 8.28-10.27)과 헤이리 건축전 (성곡미술관 9.10-10.27)은 그 규모 뿐 아니라 내용과 형식면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헤이리 건축전은 파주 법흥리 통일동산 일대에 계획되고 있는 ‘헤이리 문화예술촌’의 전체적인 마스터플랜과 1차적으로 계획된 40여개의 설계작품들을 담고 있다. 김종규 김준성 등 주로 3,40대 소장 건축가 30여명이 참여하여 차세대 국내 건축계의 활력과 의욕을 예견케 한다. 각각 작품들의 개성에 맞게 여러 가지 입체적인 전시방법을 택하면서도 하나의 공간 안에 밀집되어 있어서 앞으로 펼쳐질 헤이리 마을의 현장을 재현한다.
현대미술관측은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승효상을 ‘2001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다. 그는 이론적 토대가 탄탄한 건축가로서 그의 작품 뿐 아니라 건축적 이론들이 아시아권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도시공간으로 설정해 16개의 블럭으로 나누고 각 블럭에 자신의 대표작 한 작품씩을 전시하고 있다. 관객들은 골목이나 광장과 같이 남겨진 여백에서 우연치 않게 마주치고 부대끼면서 건축과 도시를 체험하게 되는, 어느 설치미술전보다도 훨씬 현장성이 강한 ‘건축 도시’를 만들고 있다.
헤이리에 전시된 40여개의 작품들이 하나의 마스터플랜을 구축하고 있다면, 승효상전의 16개 프로젝트는 한 건축가의 생각이 전개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집단과 개인이라는 차이와 같이, 헤이리전은 수십개의 이질적인 작품들을 한 공간으로 통합하고, 승효상전은 같은 작가의 프로젝트들을 16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있는 전시방법의 비교도 흥미롭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메시지들이다.
이제 건축은 건물이라는 좁고 폐쇄적인 경계를 넘어 도시 또는 자연환경과 강력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효상은 웰콤시티에서 잘 표현하듯이 건축물을 도시적 경관을 수용하고 만드는 그릇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헤이리에서는 전 마을 지표면의 모양과 패턴을 디자인하여 건축적 하부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건물들이 올라설 지형의 구조이며, 건물들의 집합적 경관이다. 하나하나 건물의 형태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윤리적 규범은 물론이고 미학적 가치도 갖지 못한다.
승효상 전시회는 ‘도시의 여백(urban void)’를 주제로 걸고 있다. 도시의 주인은 멋진 건물들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남겨진 여백들 -도로와 광장, 빈터, 공허한 계단들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행해왔던 건물 설계를 넘어서 도시 전체의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건축가의 임무임을 상기시키다. 헤이리에서는 이처럼 확장된 건축의 정의를 ‘건축적 경관(landscape)’으로 구체화한다. 하나의 뛰어난 건물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오히려 건축물은 도시의 풍경을 위해 겸손히 봉사해야한다. 마을 전체의 지면을 세부적으로 디자인하여 그 위에 올라갈 건물들의 규모와 형태, 재료들을 미리 제안하고 있다. 도시와 건축의 영역을 허물고 통합적인 설계과정을 도입한 것이다.
거대한 설치 미술전시회를 보는 것 같이, 전시장 전체의 독특한 구성도 뛰어나고 전시된 작품 하나 하나도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건축의 영역을 경관과 도시로 확장하고, 건축의 범주를 작품과 예술로 전환시키려는 획기적인 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