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9.06.04.
출처
미확인
분류
건축비평

건축가 – 발명가인가, 수행자인가?

한 평생 건축 작업에 몰두하는 건축가는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된다.
하나의 길은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새로운 개념으로 설정하고, 세상에 아직 선보이지 않은 재료나 형태를 구사하고 누구도 만들지 못했던 공간을 창조하는 발명가적 태도다. 그는 자신의 작업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뚜렷하게 표현할 수 없고, 단지 작업 프로세스에서 “이건 아니야”하는 선별감각은 생생하게 유지한다. 밑 없는 상상력의 샘물은 그칠 줄 모르고 새로운 프로젝트마다 솟아 나온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한 개인의 ‘새로운’ 상상력의 샘은 밑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칠 일은 아니다. 자신의 부족을 대체할 탁월한 조력자들이 있다면, 이 발명가적 진로를 계속할 수 있다. 그의 직원이나 파트너들이 만들어내는 대안들을 특유의 선별력으로 평가하기만 해도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길은 하나의 이상형을 설정하고 매번 프로젝트를 통해 반복적으로 추구하여 완성에 이르는 수행자적 태도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하는지, 무엇을 달성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일지라도 이전 작품과 유사한 개념, 비슷한 공간, 심지어는 재료와 디테일까지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당연히 ‘식상하다’는 비판적 평가도 수반하지만, 조금씩 바뀌고 변하면서 자신의 이상형에 접근해 나간다. 그에게 ‘새로움’이란, 기존에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향해 접근해가는 진화를 의미한다. 그 누적되는 진보의 결과, 매 작품마다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장하게 된다. 이런 건축가는 그의 신념과 방향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파트너가 필요하며, 기본적으로 남이 그의 작업을 대신해 줄 수없다.
조병수는 수행자의 길을 가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다. 과거 전통적 의미의 건축가는 대개 수행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가 되었다. 급변하는 지식체계의 발전, 전 지구적 시장의 확대, 그리고 사상적 탈 이데올로기화라는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건축가는 늘 놀랄만한 새로움을 선보여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때문이다. 렘 쿨하스나 쟝 누벨로 대표되는 발명가적 건축의 길에 익숙한 국내 환경에서, 하나의 길을 고집하고 깊이를 추구하는 조병수의 작업은 의미있는 소수일 수밖에 없다.

반복과 차이

귀국 후 첫 프로젝트로 신당동다가구 주택을 설계하게 된다. 아울러 신당동 달동네의 자생적 건축들에 관심을 갖고 현장을 연구하여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이름 하여 ‘Contemporary Vernacular’. 울퉁불퉁한 계단, 버려진 문짝들의 재활용, 재료들의 생경한 병치 등… 달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나 지나쳐버리기 쉬운 건축적 일상에 대한 관심이었다. 당시 유학파 건축가로서는 매우 생소한 열정이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정착증후군’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평창동과 일산 신주거지에 ㄱ자집을 발표했을 때, 마당을 에워싸는 집의 형식이나 순 우리말로 이름 짓는 행위가 “어, 참신한데” 정도의 느낌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흔히 시도하는 새로움 정도였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 추적하면 오히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열정을 뿜어내고 있다.
ㅡ자집, ㄱ자집, ㄷ자집, ㅁ자집, 두상자집, 세상자집 ….. 등 형상에 따라 순 우리말로 지어진 이름들의 연작들은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을 연상하기 쉽지만, 하나의 이상적 원형을 이루기 위한 반복적 실험이었다. 그것은 “외부에 닫히고 내부로 열린 상자”들이다. 이 상자들은 일산과 같이 애매한 도시적 환경에 더없이 적합한 주거형식이기도 하다. 마치 서울 북촌의 도시형 한옥들이 ㄷ자나 ㅁ자형으로 구성하여 외부 가로나 옆집에 대해 닫히고, 모든 동선과 행위들이 안마당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원리를 연상시킨다. 이런 점에서 조병수의 상자를 도시적 구성이라는, 또는 주택이라는 상황들이 만들어낸 맥락적 형식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가 아닌, 밀도가 매우 낮은 전원주택에서도 이러한 원형을 되풀이한다면, 심지어 주택이 아닌 오피스 건물이나 유치원에서도 반복한다면, 이는 외부적 상황이 만들어낸 유형이 아니라 건축가의 내면이 추구하고 있는 원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수곡리 ㅁ자집은 한적한 농촌 언덕에 위치한 별장형 스튜디오다. 제법 풍부한 자연 속에 위치하지만 외부에 면한 개구부를 최소화한 콘크리트 박스로 자연을 단절시키는 반면, 박스의 중심에 안마당을 두고 안마당의 4면을 모두 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었다. 외부로는 완전 폐쇄, 내부로는 완전 개방한 이중적 구조의 상자인 셈이다. 수곡리의 같은 필지에 최근 완공한 땅집은 중정을 땅 속에 묻은 지하 건물이다. 외벽 자체가 사라지고 오로지 땅을 파낸 개방된 마당만 존재하는 집이다. 이 집에서 외부의 자연과 소통하는 것은 오직 마당 위로 보이는 하늘뿐이다. 조병수의 집들은 외부의 경관이나 환경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경계를 구획하고 그것을 넘나드는 통과의례를 중시하고 있다.
배재대 예술관이나 램프빌딩에서도 이러한 이중 상자의 원형은 반복된다. 주택과는 달리, 내부의 한정된 마당은 더욱 공공적이고 고층화한다. 배재대의 경우, 박스를 지상에서 띄움으로써 동선 뿐 아니라 시선까지도 내부의 마당으로 집중화시키고, 마당 한 편에 경사로를 노출시킴으로써 공공적 움직임을 주제로 삼았다. 이들 건물이 안마당을 지상에서 띄운 것이라면, 아름솔 유치원은 안마당을 땅 속에 묻어 구성한 집이다. 주택의 지상에 존재하는 안마당이 떠 있기도 하고, 땅 속에 묻히기도 한다. 하나의 원형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조병수의 작품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마당의 수직적 이동은 결국 안마당을 통해 결합하고 있는 개별 공간들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수곡리 ㅁ자집은 건축가 자신의 전원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따라서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연속되는 개별공간들은 서로 바라보고 서로 간섭한다. 반면, 개별공간들의 기능화가 중요한 배재대나 램프빌딩의 개실들은 좀더 독립적이다. 개실들의 독자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필요한 공공성을 안마당으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고, 안마당을 개실들의 매개체가 아니라 독자적 기능을 갖는 주공간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일련의 주택들과 공적 건물들에서 반복적 시도를 통해 차이를 얻고, 그 차이들의 집적은 곧 건축적 완성도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이제 완숙의 경지에 달했고, 더 이상의 실험이 가능할까 의심이 들 정도까지 도달했다. 그 차이들은 순수하게 건축가 내면의 욕구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가치를 갖는다. 차이를 지역적 문화환경이나 건물의 프로그램에 대응하기 위해 시도했을 때는 오히려 생경한 결과를 빚는다. 제주도주택 역시 예의 상자를 원형으로 하지만, 제주의 초가 모습을 유추하여 지붕을 둥그스레하게 만들었다. 이 어색함은 역설적으로 조병수의 상자가 얼마나 강력하고 내면적인 원형인가를 말해준다.
감성마을에 태어난 소설가 이외수의 주택은 일련의 작업에서 이탈한 예외적 사례로 오해할 수 있다. 단단한 껍질과 분절된 마디를 가진 갑각류와 같이, 비정형의 외피와 형태가 일련의 상자와는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로 폐쇄하고 내부로 개방하는 개념은 그대로 살아 있어서, 이중성 상자의 원형을 반복하는 것이다. 단지 매우 큰 차이가 있는 반복일 뿐이다.

원형과 경험

끈질길 정도로 반복하면서, 동시에 미묘한 차이들을 통해 실험하고 있는 원형은 과연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종종 어릴 적 서울의 도시한옥이었던 외가에서 뛰놀던 모습을 추억하곤 한다. 그때 이미 형성된 공간적 스키마는 물론이고, 손끝에 전달된 나무기둥과 문짝의 재질감도 기억한다. 반복되는 콘크리트 박스의 공간배열에서 도시한옥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고, 느닷없이 세워진 나무기둥에서 한옥 부재의 존재감을 연상할 수 있다.
또한,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목재 사과상자를 가장 좋아하는 조형으로 꼽기도 한다. 단순하지만 힘의 분배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한 비례, 기계톱날이 켜고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거칠거칠한 표면의 느낌, 그리고 어떤 기교도 거부하는 듯 무심한 못질로 결합한 공간. 그 스스로 말한 바 있지만, 사과상자 만큼 조병수의 건축적 원형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두상자집이나 세상자집은 아예 사과상자를 쌓아 놓은 광경을 연상시킨다. 매끈하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적으로 배부르고 휜 콘크리트 면들은 또 다른 톱질의 흔적이다. 그의 표현대로 ‘꾸들꾸들’한 콘크리트의 표면은 인간의 감각 깊은 곳에 자리한 원초적 감성을 끄집어낸다. 아마도 ‘현대적 버나큘라’에 대한 관심도 사회학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버나큘라 건축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물질적 건축적 원초성 때문일 것이다. 그 원초성은 굳이 한국의 신당동 달동네에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록키산맥 오지인 몬테나의 시골 창고나 공장에서도 발견하기도 한다.
사과상자는 오로지 목재판들을 직접적으로 접합한 것이듯, 조병수 건축의 재료들은 다른 매개체 없이 서로 맞닿는다. 콘크리트 구멍에 여러 겹의 유리를 겹쳐 올려 천창을 만든다. 콘크리트와 철판이 직접 맞닿고, 목재가 콘크리트 속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콘크리트 지붕에 별도의 방수재를 덧씌우거나 방수용 파라펫을 만들기를 거부한다. 사과상자가 오로지 거친 목재로만 만들어지고 어떤 포장재도 덧씌우지 않듯이, 순수하게 거친 콘크리트 상자만으로 완벽한 건축을 이루려는 것이 여태까지 그의 작품들이 추구했던 원형이다.
그의 수곡리 땅집에서 그의 건축적 원형으로 하바드 디자인대학원의 졸업 작품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경험과 인식”이라는 다소 고답적인 타이틀로 발표한 7개의 원형적 조각들이었다고 한다. 나무 매스 속에 파진 내려가는 계단, 땅에 반쯤 박힌 단순한 직방체…. 등 이상적 입체작품들이었다. 이중성 상자의 큰 틀 안에 이 부분적 원형들을 도입하여 각 작품의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형태적 원형이 아니라 체험적 원형에 가깝다. 그의 이중성 상자가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통과하는 의례라면, 땅 속에 묻힌 계단은 지상과 지하 사이의 수직적 경계를 통과하는 의례와 인식인 것이다.
조병수 건축의 원점은 추상적 이론이나 기하학적 조작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파편화된 요소들이 아니라 일정한 상황과 관계로 존재한다. 예컨대 사간갤러리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얇게 깔린 물은 그 자체의 형상보다는 수면 위로 반사하여 실내로 스며드는 자연광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이다. 외부로 폐쇄된 ㅁ자형 상자들도 어찌 보면 내부 매스로 한정되는 하늘을 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낮게 깔린 창들은 외부의 경관조차 선택하고 조절하기 위한 틀이 된다. 결국 이런 요소들은 인간의 인식과 체험으로 귀결된다.
그가 지나칠 정도로 재료의 물성과 잠재력에 탐닉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와이어의 새로운 표현에 몰입하고 있지만, 대개 조병수가 선택하여 사용했던 재료들은 콘크리트, 합판, 철판 등 지극히 일상적 재료들이다. 이 친숙한 재료들을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체험들을 가능케 한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은 특유의 디테일을 통해 드러난다. 이질적 재료들을 맞대어 병치하기 위해서 숨어있는 복잡한 디테일들이 필요하게 된다. 얼핏 보면 그의 건축들은 디테일이 없는, 그래서 거칠고 약간은 투박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된 모자람으로 고도의 정교함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가 좋아하는 노자는 “큰 기교는 어찌 보면 서툴러 보인다. (大巧若拙) ”고 했다. 조병수 건축의 대교약졸은 반복과 차이를 통해 완숙의 경지에 달했다. 최근 준공한 수곡리의 땅집은 지상으로 노출된 어떤 구조물도 없다. 땅 속에 파묻힌 마당과 계단만 있을 뿐이다.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낮은 출입구, 몸통을 움츠리고 내려가야 하는 좁은 계단 폭, 도배마저도 거부한 방안의 벽과 바닥…….. 이 촌스럽고 서툰 건축을 위해 땅 속에 목조 구조 틀을 묻어야했고, 두텁고 복잡한 거푸집을 여러 차례 변경해야 했다.

수행자적 태도 속에서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건축은 큰 미덕을 선사한다. 모든 작품에서 보통 수준을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누가 어떤 건축을 하던, 런던에서 어떤 획기적인 건물들이 선보이던 관계없이 자신의 원형적 건축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왔던 조병수는 작품들의 완성도만 선물한 것은 아니다. 그의 반복은 늘 새로운 차이를 수반하여 반복한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익숙한, 그러나 이제 우리 건축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건축의 길을 제시한다. 반복이 차이를 낳고, 차이가 쌓이면 전혀 다른 새로움이 창발된다. 이제는 이러한 창발적 변화의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조병수 건축이 이뤄낸 성과들에 주목하면서도 다음 단계의 변화를 더욱 기대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