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2.06.11.
출처
원자력문화
분류
건축론

유럽을 여행하면 현지 건축가들에게 흔히 듣는 질문이 있다.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도쿄식인가, 아니면 런던식인가?” 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도시적 상식이 필요하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가 붙어 있고, 모두 고만고만한 높이와 모습을 갖는다. 건물들의 높이는 4-5층, 대개 1층은 상점이고 3층 이상은 주택이다. 따라서 거리를 걷는 시민들은 줄줄이 연속되는 상점들의 쇼윈도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볼거리들을 즐기게 된다. 이런 도시에서는 특정 건물이 돋보이기 보다 여러 건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도시전체의 통일감을 조성한다.
반면, 도쿄와 같은 현대도시들은 한 건물의 대지를 넓게 잡고, 수직적으로 높이 솟는 고층건물을 세운다. 당연히 건물과 건물 사이는 널찍하게 띄우게 되고, 그 사이로 도로들이 관통하여 건물은 마치 고립된 섬과 같아진다. 당연히 거리를 걷는 보행자들은 섬과 섬을 건너다니듯, 차량의 물결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나들이에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서울은 도쿄식으로 개발되었다.” 이런 대답에 질문의 던졌던 건축가들은 서울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을 접는다. 빠리를 예로 들어 그들의 도시적 취향을 설명한다. 빠리의 구도시는 몇 백년 전부터 7층 이상의 건축을 금지하고 건물사이의 공백을 없앤 전형적인 연속형 도시인 반면, 신도시인 라데빵스 지구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고 서로 뚝뚝 떨어져 있는 현대도시로 계획됐다. 구도시는 활기에 넘치는 인간들을 위한 도시인 반면, 신도시는 효율과 차량만을 위하는 비인간적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이나 도쿄와 같은 비연속적 도시의 더욱 큰 문제는 건물이 떨어져 있다 보니 옆 건물보다 내 건물이 높고 커야하고, 더 눈에 띄는 재료로 감싸고 더 멋있는 겉모습을 지녀야한다는 경쟁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서울의 여의도나 테헤란로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보면 나름대로 멋도 있고 현대적인 첨단기술을 도입한 고급건물들이다. 그러나 그 빛나는 건물들이 모인 도시는 오히려 난잡하고 어지럽고 삭막하다. 마치 미인대회에 모인 아름다운 미인들이 서로 경쟁과 질시로 싸늘한 집단적 분위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너무 많은 미인들이 모여 있으면 한사람 한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없다.
건물들의 입구는 철저하게 보호되어 시민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거부하고 있다. 건물 안에 식당과 술집과 사우나와 수영장까지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뿐이다. 백화점과 재래상가를 비교해보자. 백화점 안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있지만, 바로 옆 건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도시로부터 고립을 자초하여 내 건물만 멋있고 장사가 되면 좋다는 건물 이기주의로 우리의 도시는 숨이 막혀 간다.
한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는 건축법상 공동주택으로 분류된다. 공동주택이란 땅과 도로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쓰는 주택일 뿐 아니라, 내 가족을 넘어서 이웃 간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주택이란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 고향마을과 같은 공동체가 존재하는가? 현관문만 닫으면 앞집과 위아래에 누가 사는지 모르며, 더구나 앞동과 뒷동의 주민과는 전혀 교류할 기회도 없고, 만날 마음도 없다. 아파트의 공동체는 철저한 무관심의 공동체이며, 소극적 내 집 이기주의의 공동체이다.
아파트 단지 바깥에 있는 동네와 관계는 더욱 고립적이다. 높은 담을 쳐서 경계를 짓고, 바깥에 널려있는 저층주택들과 완전히 차별된 세계를 이룬다. 인근 동네 주민들이나 아이들이 단지 안으로 들어올라치면 수위실에서 제지하고, 요즘 짓는 초고층 아파트는 첨단 보안장치로 출입이 아예 불가능하다. 아파트 단지는 적극적인 단지 이기주의로 주변의 이웃을 배척하고 있다.
우리가 먹고 자는 주거단지가 이 모양이고, 우리가 일하고 즐기는 도시가 이 지경이다. 도시의 일상생활에 팽배한 불신이 꼭 건축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건물 이기주의와 단지 이기주의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신뢰란 싹틀 수 없다. 인간은 건축을 창조하지만, 만들어진 건축은 인간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한다.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기 때문이며, 이기적인 환경에서는 이기적 심성이 형성되고, 배타적 환경에서는 불신감이 팽배해진다.
도시 생활의 불신을 타파하려면 도시 환경을 바꿔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법과 도시계획법부터 바꿔야한다. 현행법에는 건물과 건물사이는 의무적으로 띄워야하고, 옆 건물과 부조화를 이루어도 아무런 제재 조항이 없다. 미관심의 제도가 있지만, 건물 자체의 형태만 평가할 뿐이지 옆 건물과, 거리 전체와 조화가 되는가에는 관심조차 없다. 기존에 지어진 건물들도 약간의 변화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1-2층 부분은 병합을 허용해야 한다. 작은 도로가 지나간다면 1층만을 띄우고 2,3층을 서로 연결한다. 그리고 연결된 부분의 정면은 가급적 창을 크게 달아 투명하게 한다. 거리를 향해 쇼윈도우를 내고 세련되게 장식하여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걷는 것 자체를 즐겁게 해야한다.
아파트 단지에는 이웃들이 서로 만나고 스칠 수 있는 공동 공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지상의 주차장들을 지하로 몰아 놓고, 어린이가 뛰놀고 어른들이 쉴 수 있는 작은 공원들을 만들자. 옥상공간을 방치하지 않도록 난간을 튼튼히 쌓은 뒤 운동시설을 조성하여 주민들이 어울려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 단지의 외곽을 싸고 있는 성벽과 같은 담장들을 걷어내어 단지 바깥 동네와 교류를 시작하자. 정 경계가 필요하다면 낮고 들여다보이는 투시형 담장으로 대체하자.
약간의 제도적 수정과 건축적 보완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자동차가 불편하고 걷는 것이 즐거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내 건물과 주변의 건물이 함께 어우러질 때 내 건물도, 도시 전체도 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집만, 우리 아파트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주변 동네와 어울려 사는 것이 바로 인간적인 삶이란 가치를 소중히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리에서, 건물의 안과 밖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고 만나는 것이 불신의 벽을 허무는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