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2004.06.27.
출처
부산일보
분류
기타

너무나 억울하고 처참하게 학살당한 김선일씨의 유해가 고향인 부산에 도착했다. 정부는 최선을 다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정보 수집력의 무능, 정세에 대한 무지, 파병의지만 내세운 무분별이 현 정부의 능력이라면, 정부는 능력 이상의 일을 했다.
고 김선일씨 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한국 사회는 ‘수도이전’과 ‘미군감축’이라는 국내외의 큰 이슈로 찬반양론의 갈등을 빚었다. 고 김선일씨 참사에 대한 반응도 확연하게 엇갈린다. 당장 무장병력을 파병하여 응징하자는 강경파와 명분도 실익도 없는 파병을 철회하자는 비판세력의 갈등이 국론분열에 이를 지경이다.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찬반 주장들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타당성들이 있다. 그러나 그 찬반 논리들이 대부분 국내의 시각에서만 머무르고 있다.
파병문제는 아랍권을 포함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분석하여 얻어진 결론이 아니라, 국내적 친미와 반미, 그리고 한미관계만을 고려한 논란에 국한된다. 고 김선일씨의 참사를 테러발생의 수준에서 접근하는 단순론은 민족적 감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군감축이란 아시아 관리의 파트너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꾸려는 미국적 세계전략의 일환이다. 동서 냉전 이후 중국의 급부상과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라 냉철하게 변경된 정책의 일부이지, 한국민의 반미감정에 대한 보복책으로 인식하는 건 아전인수적 해석일 뿐이다. 물러나라면 물러날 미국이며, 제발 붙잡으면 있어줄 미군인가?
수도 이전문제의 핵심은 공간적으로 1/10밖에 안되는 수도권이 국부의 1/2을 가지고 있는 왜곡된 구조를 혁신하려는 과정에서의 충돌이다. 미래학자들은 세계는 국경이 약화되고 35개의 거대도시 경제권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중국은 뻬이징-샹하이-홍콩의 3개 도시경제권으로 분할되고, 유럽은 런던 빠리 등 7~8개 도시권으로 통합된다는 가설이다. 이런 ‘세계도시론’에 따르면 한반도는 서울경제권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국내의 지역균형발전이란 세계적 경쟁력 약화를 의미하게 된다. 국토 재편이란 중차대한 문제를 국내적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결정할 때, 간과되고 있는 거대한 세계적 변화다.
이라크 파병, 미군감축, 수도이전 등 중대사를 국내적 관점에서만 거론한다면 필연적으로 정치논리에 기대게 된다. 수도이전을 반대하면 기득권, 찬성하면 혁신, 미군감축을 용인하면 진보, 저지하면 보수의 논리라는 식이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정파적 입장에서 “밀리면 끝이다”는 식의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인 정치논리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또한, 세계 정세는 한국이 보혁의 어떤 자세를 취하든 관심이 없다. 수도를 이전하든 말든 세계도시들은 무한경쟁의 사투를 벌이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더 키울 것이고, 파병을 하든 말든 미국은 차기 대선을 통해 최대 국익을 위해 세계정책을 변경할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을 알지 못하며, 여름철 베짱이는 겨울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의 선택은 우물을 벗어난 넓은 세계를 상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 어렵다고 한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이라크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거의 없다. 12명의 공관원이 이라크에 머물지만, 57명에 불과한 교민들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국제 정보를 수집하려 해도 접근선도, 전문지식도 없다. 모든 정보와 인맥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 뿐 아니라 언론 역시 외신이란 미국언론의 번역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국내라는 우물을 벗어나 봐야 미국이라는 연못에 갇힐 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른 때이다. 지금이라도 세계 각지의 지역 전문가들을 길러내야 한다. 외교관과 학자들 뿐 아니라 기업인과 문화인까지 총체적인 네트웤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가적 과제들, 심지어는 입시문제나 부동산문제와 같이 순수하게 국내용으로 보이는 과제들까지도 전지구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세계적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 식으로 잘하자’는 우물 안 개구리로 멸종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