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일
1996.07.09.
출처
미확인
분류
건축문화유산

경주를 신라시대의 도시로만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다. 1000년 동안 신라의 왕도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지방 거점도시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여 살아 숨쉬는 역사도시이기 때문이다. 경주일대를 다녀보면 신라의 미술품들은 대부분 폐허인 채 널려있거나 아니면 땅속에 잠자고 있다. 그러나 사찰과 향교, 살림집과 같은 조선시대의 유산들은 곳곳에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단지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사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입국한 외국관광객들에게 제공되는 곳이란 서울의 궁전들, 제주도, 경주, 그리고 남대문 시장과 이태원 뿐이다. 이 관광빈국의 부끄러움은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광자원들을 개발하고 홍보하는데 몹씨도 서투르고 무관심했던 결과다. 경주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도 마찬가지다. 경주하면 으레 불국사와 석굴암 에밀레종을 꼽지만 그 다음은 어디인가? 산과 같은 고분들이 인간들의 도시와 자연스레 섞여있는 극적인 도시경관이나, 신선함으로 가득찬 소나무 숲들, 경주남산의 위대한 불교조각품들…..은 모두 경주시민들만 그 진가를 알고 있을 뿐, 관광자원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경주에서 추령고개를 넘어 감포로 가는 길도 단지 신라시대의 감은사탑과 대왕암만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과거 이 길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고려와 조선시대의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유산을 모두 경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의 솜씨가 어떻게 자연과 어울어져 있는지,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무엇인지 탐구하는 여정이면 더욱 좋다. 감포가는 길에는 신라시대의 위대한 건축인 감은사지가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의 웅장한 기림사와 그 안의 뛰어난 고려시대 불상이 있다. 또한 보문단지에는 선재미술관이라는 우수한 이 시대의 건축물과 귀중한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길에 널려있는 미술품들은 그 하나하나도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것들을 통시대적인 관점으로 꿰어서 한국의 조형미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계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역사와 미술이 있는 길”로 더욱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따라서 경주박물관에서부터 길을 출발하는 것이 옳다. 박물관에는 소개가 필요없을 정도로 신라의 예술을 대표하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원한 소리를 얻기 위해 귀여운 아이까지 녹여 부었다는 섬뜩한 전설의 에밀레종을 위시하여, 신라석탑의 원형을 보여주는 고선사지 석탑이 서쪽 마당에 당당하게 서 있다. 고선사지 탑은 이 여정의 마지막에 만나게 될 감은사탑의 아버지 뻘되는 탑으로 감은사에 비해 육중한 느낌과 원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박물관은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된다. 본관보다는 고분들 속에서 발굴된 신기한 유물들을 전시한 제1별관과,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위한 제2별관이 더욱 관심을 끈다. 1별관의 유물 가운데 아라비아에서 수입된 유리병은 이미 천년전 해외무역이 활발했던 국제도시 경주의 실상을 짐작케 하며, 해괴한 체위의 남녀를 조각한 토기에서는 신라인들의 자유분망했던 생활을 엿볼수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더욱 신기한 것들이 많다. 귀족들이 타고 놀았던 작은 나무배가 원형대로 남아있고, 특별한 놀이를 위한 13각형 주사위도 있다.
박물관을 나서면 길 건너에 안압지가 복원되어 있다. 박물관 옆이 바로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반월성이며, 안압지는 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축조한 왕궁부설 정원이다. 평지에 커다란 연못을 파고, 파낸 흙으로는 연못가에 인공 동산을 만들었다. 연못의 서쪽은 네모 반듯한 궁전건물들이 들어서고 반대편은 자연적인 곡선의 동산이 가꾸어졌다. 인공과 자연, 직선과 곡선의 묘한 조화가 ‘통일’의 이상을 상징하고 있다.
안압지 뒤편 넓은 지역에 걸쳐 발굴된 황룡사지를 찾으면 한국건축의 웅대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금당의 넓이만도 500평을 넘고, 9층탑은 20층 아파트 보다 높았었다. 황룡사 뒤에는 원효대사가 머무르며 왕족들을 가르쳤다는 분황사가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모두 조선후기의 것이지만, 사찰 앞의 석탑은 통일 이전의 신라석탑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벽돌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의 이른바 ‘모전석탑’이다.
경주 시내가 그렇지만, 특히 분황사에서 보문단지에 이르는 길은 벚꽃길로 유명하다. 봄철 휴일에는 차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꽉들어차는, 인근에서는 진해 벗꽃보다도 더 화사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감포가는 길은 보문단지를 비껴 지나도록 되어 있지만, 굳이 보문단지에 들르기를 권하는 이유는 바로 선재미술관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 있는 미술관 가운데 건물도 가장 뛰어나고 소장품들도 국제적이다. 미술관은 힐튼 호텔에 인접해 있는데, 두 건물 모두 깔끔한 현대건축이다. 주변의 인공적인 조경도 수준급이어서, 내부에 소장된 뒤샹이나 스텔라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만난 후에 푹 쉴만한 환경이다. 선재미술관은 여러 가지 의미있는 기획전으로도 명성이 높다. 운이 좋으면 팝아트전이나 프랑스 현대작가전 등 서울에서도 대하기 힘든 국제적인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다.
보문단지를 벗어나 덕동댐 쪽으로 고개를 오르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감포가는 길이 전개된다. 아무래도 이 길은 가을에 가야 제맛이 난다. 형형색색의 오색 단풍으로 가득한 구비길은 마치 설악산의 진부령을 넘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 길은 물론 감은사지와 대왕암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러나 중간에도 못지 않은 유적지가 있으니, 기림사와 골굴암이다.
추령 고개를 구비구비 넘어서 평지로 내려오면 안동리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안동리에서 왼쪽 포항쪽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곧 골굴암 표지판이 보인다. 골굴암은 자연적인 동굴 12개가 뚫려 있는 다공질의 작은 바위산이다. 정상에는 보물로 지정된 섬세한 벼랑불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보통 사찰의 대웅전과 주불상에 해당한다. 나머지 작은 동굴들은 한두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각각 나한전 산신각 등 부속 예배당으로 쓰였다. 토함산 석굴암의 정교한 아름다움에야 비할수 없지만, 12개의 굴이 모여서 하나의 사찰을 이룬 점에서 가치가 높다. 원래 인도에서 발생한 석굴사원은 5-10여개의 석굴들이 모여서 하나의 완전한 사찰을 이루었다. 우리나라 사찰이 법당과 승방 등 여러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토함산 석굴암을 위시한 한국의 석굴들은 단독굴로서 불완전하게 구성되었다. 화강암을 주조로 하는 바위를 뚫기가 무척 힘들었기 때문이다. 단 예외가 바로 골굴암으로서 완전한 석굴사원의 흔적을 보여준다.
골굴암에서 포항쪽으로 더 들어가면 대가람 기림사에 다다른다. 신라 때 창건된 고찰로 한때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이 지역의 중심사찰이었다. 지금은 많은 건물들이 없어져서 절의 짜임새가 엉성해졌지만, 아직도 대적광전 등 우람한 건물들이 고색을 풍기고 있다. 특히 이곳에 모셔진 건칠보살좌상은 종이로 만든 후 옻칠을 한 매우 희귀한 불상이며, 신비한 표정이 일품이다. 약사전 앞에는 여러 개의 초석들이 줄지어 남아있는데, 삼층목탑터로 추정된다. 과거의 모습을 복원해서 상상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다시 인동리로 빠져나와 동해 쪽으로 국도를 타면 양북면 소재지의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좌측길이 감포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우측길을 택해야한다. 이 길이 바로 대종천을 타고 대왕암으로 가는 이른바 ‘동해구’이며, 신라 때부터 동해에서 경주로 이르는 주도로였기 때문이다.
감은사.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기품있는 두 개의 석탑. 양식사적으로 말한다면, 벽돌을 쌓듯하던 신라의 석탑들은 통일을 맞이하여 백제식 석탑과 접목을 하게된다. 그래서 경주박물관의 고선사지 석탑과 같은 실험작들이 만들어졌고, 감은사탑에 와서 하나의 전형을 창조한다. 이 조형운동은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감은사탑은 석가탑과 함께 이후 1,000년간 한국석탑의 모델역할을 해왔다. 미술사적 가치를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이 탑 앞에 서면, 누군가의 표현처럼 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돌이 주는 원초적인 힘과 역동성, 시간이 정지된 듯 두 탑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동해와 대종천과 언덕 위의 폐허화된 절터가 어우러진 대자연의 파노라마. 이 길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감은사의 감동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대왕암. 대왕암은 흔히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십자형의 바위일 뿐, 정확히 말한다면 문무왕의 화장터다. 대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골이 가루로 내어져 이 곳에 뿌려진 것이다. 이 모든 행사를 신문왕과 신하들이 바라보던 곳이 이견대다. 현재 이견대에는 80년대에 복원한 정자가 서있다.
여기서 여정을 끝내기 아쉬우면 해안도로를 타고 북상하면 된다. 진짜 감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감포는 1920년대에 이미 인천과 함께 읍으로 승격된 ‘대처’였다. 그러나 인천은 300만 도시로 급성장했지만, 감포는 중소 항구로 옛날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미술 1,000여년의 여정을 마친 뒤, 아직도 ‘촌스러운’ 어항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감포 선창에서 싱싱한 생선회를 즐기며 지나온 길들을 반추해보는 것도 이 길만이 줄 수 있는 낭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