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정궁, 동궐
지금의 서울,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태조 이성계였지만, 실질적으로 한양의 도시구조를 계획하고 궁궐들을 비롯한 여러 공공시설들을 건축한 것은 태종 이방원이었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일세의 야망가로 재조명받고 있는 그는 정치적으로만 고수였던 것이 아니라 건축과 도시계획가로서도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창덕궁도 태종이 왕위에 올라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창건한 궁궐이다.
여러 후보지들을 제치고 수도로 결정된 한양의 지리적 환경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는 도시의 주산인 북악산이 너무 서쪽으로 치우쳤다는 점. 따라서 주산 아래에 세워진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은 한양성의 중심 위치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서대문과 바짝 붙은 꼴이 되었다. 태종은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2의 주산인 응봉(혹은 매봉)을 이용했다. 응봉은 한양성의 동북쪽에 있어서 서쪽의 북악과 함께 도시의 지리적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 아래에 제2의 궁궐인 창덕궁을 건립함으로써, 서쪽에는 경복궁, 동쪽에는 창덕궁이 한양의 두 중심을 형성하게 되었다. 비로소 한양이 균형잡힌 도시로서 면모를 완성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궁궐들은 정궁과 이궁, 행궁으로 나뉜다. 정궁은 임금이 상시 거주하면서 정사를 이끌던 궁궐로 경복궁이 이에 해당한다. 이궁은 사정에 따라 정궁에서 어가를 옮겨 일정 기간 정궁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예의 창덕궁과 창경궁, 경운궁 (현 덕수궁), 경희궁 (현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이다. 이를 5대 궁궐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궁은 임시로 어가가 행차했던 곳으로, 남한산성과 강화도 수원 온양 등지의 지방에 산재했다. 창덕궁은 비록 이궁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태종 이래 대부분의 임금들이 경복궁을 비워둔채 여기에 머물기를 고집해, 왕조의 대부분 기간 경복궁은 명목 뿐이고 창덕궁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정궁 역할을 했다.
규모로만 보아도 창덕궁은 정궁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비록 궁궐 자체의 규모는 경복궁보다 작았지만, 바로 동쪽에 창경궁이 붙어있고, 북쪽에는 창덕 창경궁의 넓은 후원이, 남쪽에는 종묘가 연결된 거대한 궁궐 복합체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창덕궁 바로 서쪽에는 광해군 때 경덕궁이 지어졌었다. 가운데 창덕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왕실의 대단위 건축군들이 에워싼 형태였다. 이 거대한 복합궁궐을 통틀어 <동궐>이라 불렀고, 상대적으로 경복궁은 <북궐>이라 불렀다. 창덕궁의 진정한 감상법은 <동궐> 전체를 조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창덕궁을 고집했던 조선의 임금들
태종 이방원이 굳이 정궁인 경복궁을 제쳐두고 창덕궁을 새로 세운 이유는 일면 수긍이 간다. 왕위에 오르기 까지 수많은 정적들을 참살했고, 자신의 형제들까지 제거했던 골육상쟁의 무대가 바로 경복궁이었기 때문에 경복궁을 외면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다음의 역대 임금들이 경복궁에 있기 보다는 창덕궁을 더 선호했던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경복궁이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했다는 설, 중국 궁궐을 연상하도록 딱딱하게 만들어진 경복궁의 분위기를 싫어했다는 심정적 이유들이 거론되는 정도다.
까닭이야 어떻든 창덕궁은 국가의 정사와 왕실의 복잡한 생활을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많은 시설들로 가득했었다. ‘궁궐지’ ‘동궐도’ ‘동궐도형’ 등의 각종 문자와 그림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도 현존하는 건물들은 과거 전성기 때의 20% 남짓 밖에 안된다. 지금의 창덕궁은 중요한 건물들만 남아있고, 과거 무수히 많았던 왕가의 생활공간이나 궁인들의 부속시설들은 거의 대부분 없어졌다. 현재와 같이 넓은 공지 위에 띄엄띄엄 건물군들이 배열된 것이 아니라,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들어찼으며, 요소요소에 복도와 담장들이 미로와 같이 둘러쳐져 복잡 다양한 하나의 도시와 같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여기에 여러 시녀들과 나인들, 벼슬아치들, 호위 무사들이 복작대고 있었던 광경을 상상해야 올바른 창덕궁의 감상법일 것이다.
창덕궁에 대한 편애는 광해군 대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은 불에 타 버렸고, 수도 수복 후에 왕실이 거처할 궁궐을 짓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이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정궁인 경복궁은 그냥 폐허로 방치한 채 동궐 일곽의 대대적인 복구공사를 시작했다. 비록 지금의 창덕궁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건물들이라 하더라도, 광해군 복구 때 과거의 모습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여, 태종 세종 때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동궐의 창경궁을 복원할 때 조정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원래 창경궁은 동쪽을 향해 자리잡았었기 때문에, 군자는 남향을 해야한다는 예법에 맞지 않아 차제에 남향 궁궐로 구성을 바꾸자는 안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최종적으로 광해군은 선조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 남향의 창덕궁과는 달리 창경궁은 현재와 같이 동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기적인 복합궁궐
창덕궁은 거대한 동궐 복합체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여러 작은 궁들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복합체다. 본궁 외에도 왕비를 위한 중궁, 세자를 위한 동궁, 선왕의 부인을 위한 대비궁, 왕의 둘째 셋째 부인들을 위한 후궁 등, 왕실의 중요한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의 독립된 건물군을 가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에 대한 존칭이 살고있는 건물에서 유래한다는 점이다. 궁궐 중앙의 궁에 사는 중전마마, 동쪽 궁에 사는 동궁마마, 뒤편의 구석진 궁에 사는 후궁마마 등.
창덕궁은 이처럼 많은 부속 궁과 시설물들을 일정한 체계없이 자유롭게 배치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계가 없다’는 표현은 경복궁과 같이 기하학적인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경복궁은 넓은 평지에 세워져 중심축 상에 중요 건물들을 배치하고 여러 부속시설들을 좌우로 대칭적으로 배열했다. 창덕궁에서는 이런 인위적인 질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창덕궁의 배치도만 본다면, ‘한나라의 정궁이 어떻게 이처럼 무질서할 수 있나?’할 정도로 어지럽다. 건물들의 좌향은 남향, 남서향, 동남향 등으로 제각각이고, 건물과 건물들이 서로 어긋나고 비틀려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창덕궁 안에 들어가 보면 이런 무질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있고 극적인 공간들이 요소요소에서 발견되고, 모든 건물들이 잘 조화된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기계적이고 삭막하기 까지한 중국의 궁궐이나 경복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짙게 배어있다.
일견 무질서해보이는 창덕궁의 배치는 철저하게 지형의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창덕궁의 앞 뒤에는 낮은 구릉들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존재하고, 모든 건물군들은 구릉의 높낮이와 자연스러운 곡선에 맞추어 변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땅이 그러하니 사람도 그러해야한다’는 한국적 자연관을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군이다. 건축은 공간적인 예술이다. 따라서 입체적인 지형에 서있는 창덕궁이 입체적이고 변화있는 배치로 계획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이를 건축적으로는 ‘유기적 질서’라 부르고, 세계의 현대건축가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기계적 질서’에 충실한 경복궁이 중국의 규범을 따랐다고 한다면, 창덕궁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구성을 뽐낸다. 그런 면에서 창덕궁이야 말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며, 조선조의 임금들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이유도 이런 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이 경복궁을 제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될 수 있는 이유도 가장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움의 외전들
실제로 궁궐의 대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보자. 우선 북경 자금성의 천안문이나, 경복궁 광화문 같이 육중한 석축이 없이 모두 목조로만 이루어진 5칸의 아담한 대문이다. 돈화문을 지나도 궁궐의 위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조금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져야만 또 하나의 문, 진선문을 만날 수 있다. (진선문 일곽은 일제 때 모두 없애버렸던 것을 최근에 복원 공사 중이다.) 진선문을 들어서도 아무런 오브제가 없다. 단지 사방을 행랑으로 둘러싼 텅빈 마당만이 있을 뿐이고, 그나마 그 마당도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의 부정형이다. 이 텅빈 마당은 신성한 궁궐로 들어가지 직전, 마치 태풍 전야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곳이다.
진선문 마당에서 왼쪽으로 꺽여 비로소 정문인 인정문이 나타난다. 인정문 역시 낮고 아담한 건물이다. 그러나 인정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린다.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쳐져 꽉짜여진 공간 속에 2층의 아름다운 전각이 불쑥 솟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창덕궁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인정전으로, 외국사신의 알현이나 국가 대사를 행하던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는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정전의 동문을 빠져나가면 정면 3칸의 아담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임금과 고위 신하들이 모여 어전회의를 열었던 편전인 선정전이다. 편전에서 자주 열리는 어전회의야말로 중요한 국사와 정책들이 결정되는 가장 실질적인 정치의 중심이었다. 선정전 앞에는 보다 규모가 큰 건물, 희정당이 있다. 희정당 역시 어전회의를 개최했던 또 하나의 편전이다. 그러나 선정전이 모두 마루바닥인데 비해 희정당은 온돌방으로 꾸며졌다. 다시 말해서 선정전이 의자와 탁자가 구비된 입식 편전이라면, 희정당은 좌식 편전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여기까지를 외전이라하여, 임금을 중심으로 정치를 담당했던 구역이다.
아름다움의 내전들
외전 뒤로는 왕가의 생활공간인 내전이 펼쳐진다. 궁궐의 명목적인 주인은 왕이었지만, 실질적 주인은 왕비나 대비 등의 여성들이었다. 궁궐의 가장 중심 위치에 있는 중궁전은 바로 왕비의 침소인 대조전이다. 중전마마가 대조전에 거하면서 온갖 궁궐 생활을 조정하고 규율을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궁궐 내 어느 곳에도 왕의 침실은 없다. 하기야 모든 여인들이 왕의 소유여서, 오늘은 중궁, 내일은 후궁 식으로 행차해 전용 침실이 따로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주인인 왕이 주거불명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조전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이다. 가장 높은 여성이 기거하는 음의 건물이기 때문에 용마루를 두지 않는다는 규범에 따랐기 때문이다. 원래의 대조전은 일제때 화재로 없어지고,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을 옮겨온 것이다. 교태전 역시 무량각이었다. 교태전의 뜻은 ‘큰 인물을 위해 교접한다’는 의미고, 대조전 역시 ‘큰 인물을 만든다’는 의미다. 왕비의 최대 임무가 왕자를 낳는 것임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건물 이름이다.
대조전 뒤에는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거처하던 함원전과 경훈각이 있다. 가장 앞의 희정당이 왕이 거처하는 사랑채와 같다면, 대조전 함원전 경훈각 등은 일반 살림집의 안채에 해당한다. 따라서 가장 은밀하고 보안이 철저하던 여성들의 영역이다. 함원전 뒤는 바로 경사지여서,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화단을 조성해 동산 위로 오르게 된다. 이를 ‘화계(꽃계단)’라 부르며, 화계 중간중간에 아름다운 굴뚝을 세워 마치 설치예술을 보는 듯하다. 동산 위에는 왕가의 여인들이 노닐던 가정당 정원이 전개된다. ‘가정당 별원’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정자가 서있고 아름다운 정원이 전개돼 여성공간의 극치를 이룬다.
또 다른 여성들의 영역은 창덕궁의 가장 동쪽, 창경궁에 인접한 낙선재 영역이다. 낙선재는 3채의 주택으로 이루어진 건물군을 지칭하며, 선왕의 후궁들, 즉 고귀한 과부들이 여생을 보내던 건물이다. 낙선재를 세운 철종 때는 역대 후궁 미망인들이 3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대비와 같이 궐안의 법도를 좌우할 권력도 없었고, 애정으로 자신들을 보호해줄 남편도 없었다. 따라서 궁궐의 한편에서 고립된 채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러나 이 낙선재 영역이야말로 창덕궁 내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건축공간의 극치다. 끈 떨어진 후궁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어머니와 할머니 뻘이고, 그들의 지위나 심미관은 최고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낙선재의 아름다움은 뒷동산에 조성된 후원에서 절정에 달한다. 예의 화계식 정원과 그 사이에 세워진 조각같은 굴뚝들, 석물들, 그리고 그 위에 전개되는 정자와 루각들의 어우러짐.
현존하는 창덕궁의 건물들은 이외에도 낙선재 일곽을 감싸고 있는 승화루, 그 서쪽의 내의원으로 사용했던 성정각, 그리고 인정전 서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옛 선원전이 남아있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차례를 올렸던 곳으로 궁궐의 상징적인 정통성을 지닌 곳이었다. 일제기 조선왕조가 단절되자, 식민 통치자들은 옛 선원전을 폐쇄하고 궁궐 가장 동북쪽 구석에 새 선원전을 건립했다. 이씨 왕가의 정통성을 구석에 쳐박으려는 의도였다. 이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은 아직도 일반에게 미공개되는 구역이다.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경사길을 올라가면 후원이 전개된다. 이 후원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뒷 정원으로 왕실의 가장 은밀한 휴식처로, 일반 신하들의 출입도 금지되어 ‘금원’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러나 일제는 1926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서거하자마자 후원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해 공원으로 삼고 ‘비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에도 그 바로 앞의 낙선재에는 순종황후인 윤비가 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낙선재는 영친왕비 방자여사가 서거한 1989년까지 옛왕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후 수리하여 1995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하니, 드디어 창덕궁에는 단 한명의 옛주인도 남지 않았다. 이제 창덕궁을 가꾸고 보존할 책임은 국민 모두에게 돌아왔다.